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3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조롱과 비아냥거리는 시대를 산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섬긴다고 하는 일은 ‘예수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며 어찌 저들의 흥에 겨운 장단에 맞춰 살까?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점점 더 미신적인 놀음이 난무하고 모든 프로그램마다 점쟁이와 주술가와 강신술과 신접한 자들을 끌어다, '재미삼아' 심지어 자신들이 그리 분장하여 시시덕거린다. 그러면서 우리더러도 웃으라, 즐기라, 노래하라 한다. 믿는다는 자들이 어찌 주를 우스갯소리로 전락시키며 병신 같이 히히거릴까. 우리들은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운다. 우리가 찬양하며 연주하던 수금을,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저들과 덩달아 하하 아하 할 수 없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3).” 그야말로 노래가 나오겠나? 흥에 겨워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5-6).
아무도 알지 못하나 비통한 심정으로 마른침만 삼킬 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7).” 우리는 분노한다. 정당하고 의로운 분노는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이에 우리는 종말의 때를 생각한다. 이 땅에서 저들과 함께 잘 살다가 잘 늙어 죽는 게 끝이 아니다. 우리 안에 결연한 분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연상하게 한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8-9).
우리가 온전히 주를 바란다고 함은 ‘근신하고 깨어 있는 자’로 사는 것이겠다. 이는 그러면 어찌 행함인가?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우리로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게 하심이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저 사느라 사는 데 여념이 없는 이 땅에서 우리는 죽은 제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제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의 삶이 필요하다.
유튜브니 개인방송이니 하는 채널이 많아 요즘은 흔할 뿐인 설교 동영상일 뿐이었지만, 나는 아버지의 설교영상을 보며 감회가 새로웠다. 나의 글쓰기는 아버지의 설교를 받아 적었던 게 바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구단도 못 외우고 철자법도 엉망이었던 시절에도 아버지는 말씀을 전하실 때마다 어린 나에게 당신의 설교를 받아 적게 하였다. 지금도 성경 곳곳에는 물론이고 책을 읽거나 누구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손에는 연필이 들려있고 언제든 메모를 할 수 있어야 안정이 된다. 그래서 나의 독법은 유난히 느리고 더디며, 누구의 말 한 마디는 오래 곱씹으며 되새기는 습관도 있다. 저는 흘려 한 말인데 나에게는 새롭다. 이를 굳이 명명하자면 ‘대리 강화’라 한다. 누구의 행동이나 말, 어떤 결과를 두고 관찰하여 자신도 그와 같은 결과를 얻으려 하거나 주의하여 분발하려는 심리다.
새삼 아버지의 설교 동영상을 보며 내 안에 어떤 열망이, 말씀을 쪼개어 그처럼 말씀으로 되새겨 전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갈망이 꿈틀거리기도 하였다. 가령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바라바와 함께 실루아노에서 구브로로 구브로에서 살라미로 설교 여행을 다닐 때에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자세히 듣기를 바랐다. 그때 거짓 선지자이며 마술사인 엘루마, 엘루마는 번역하면 마술사다. 곧 바예수라 하는 이가 그 일을 훼방하며 총독이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려 하다 장님이 된다. 그 일로 총독 서기오 바울이 더욱 놀라 하나님을 믿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행 13:6-12). 이것이 소위 말하면 심리적인 ‘대리 강화’다. 누구를 보고 저를 닮고자 하거나 또는 그릇됨을 알고 자신을 경계하며 더욱 주의하게 되는… 나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존재는 단지 혈연적인 관계 그 이상의 대상이다.
저마다의 인생에서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이때에 누구는 강렬하게 누구는 미진하게, 누구는 확실하게 누구는 소극적으로 이를 마주하다 주의 쓰임에 합당하거나 버려지거나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나의 날들을 돌아볼 때 그 매순간이 강렬하였고 그럴 때면 내 안의 부정적인 거부감도 극에 달하여,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게 다 하나님과의 씨름이었다. 어차피 이김은 여호와의 것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누구는 말하길 자신에게는 그러한 극적인 사건이 없었다고 하는데, 내가 둘러볼 땐 이를 그리 여기지 못하고 사사로이 다루었던 까닭이다. 가만히 앉아 묵상해보면 그때마다 하나님의 강권하심은 있었다. 동시에 이를 저해하는 마음도 상황도 강렬하여서, 우리는 늘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무마하려 한다.
당장 내 곁의 누구를 보면 주께서 쓰시고자 하는 마음이 크신데 이를 저는 외면한다. 자신의 성향이나 불안을 또는 주변의 ‘어쩔 수 없는’ 아이 문제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두고, 저마다 그럴 여력이 없다고 외면하는 것뿐이다. 사느라 사는 데 따른 장단을 맞추기 위해 버드나무에 걸어둔 수금을 꺼내어 흥을 돋운다. 당장 내 코가 석 자라. 그만하면 된 것 같은데도 늘 없는 것이 기를 쓰느라 아까운 날들을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다. 그야말로 ‘정신이 팔렸다’ 하겠는데 어느 훗날 이 얼마나 애통하며 회개해야 할 일일까? 여느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런저런 일에 분주하여, 누구는 ‘유한부인’으로 자식들 남부럽지 않게 키워내는 일에 여념이 없다. 누구는 한 푼이라도 더 모아서 어디에 무엇을 투자하여 얼마의 이문을 더 남기느라 여념이 없고, 누구는 자신의 미모를 가꾸느라, 누구는 남들과의 관계에서 위신과 체면을 잃지 않으려, 누구는 늘 ‘다음에’ 하고 우선순위를 먼저 다른 데 두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도 그럴 것이 들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들의 이구동성이다. 그때에 다윗은 나를 불러 세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62:5-6).
그러해야 하지 않겠나? 내 안에 불어넣으시는 ‘대리 강화’의 심리는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갈망이 또는 아쉬움이 동시에 일어 오후가 다 찼다. 내가 좀 더 일찍 주의 부르심에 동의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와 이제 노년의 때를 마무리하며 남은 여력을 다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혼선이 된 것처럼 마음을 울컥, 하게 하였다. 내 곁의 누구누구에게 그 영상을 보내고 한 번 들어보기를. 누구는 보았겠고, 누구는 이내 접고 말았겠으나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놀라운 이끄심에 대하여는 나로서도 불가항력적이라 어찌 가늠할 수가 없다. 이때 우리에게 복된 심리를 하나 더 꼽아보라면 ‘공감적 경청’이 아닐까?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 62:7-8).
지난 주일에 나는 일부러 의도한 것처럼 이 네 구절의 말씀을 한 번 더 다루어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특히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는 다윗의 시편에서 나의 공감적 경청은 강화된다. 아버지의 설교 초미에 잠깐 간증으로 시작되었던 ‘그 시절’, 도저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 없는 처지의 그때에 나의 부모를 강하게 붙들고 늘어진 것이 바로 ‘그 앞에 마음을 토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끔 엄마의 간증은 건조할 정도로 시니컬하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우리 사남매를 주께 올려드렸다는 데 대해 나는 종종 서럽기도 하다. 감정적으로는 서운하기도 한 것이 엄마의 따뜻한 기억이 나에게는 별로 없다. 때론 아버지보다 더 냉철하였고 냉정하였다. ‘아버지가 주신 거면 아버지가 살리시라.’ 하는 것인데, 의외로 우리 하나님은 그에 따른 책임을 분명히 하셨다. 나도 너무 어려서 기억에는 없지만 지금의 막내가 열병으로 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죽이시든 살리시든 주 뜻대로 하시라.’ 하며 저를 안고 아버지가 말씀 전하는 성전의 맨바닥에 아이를 눕혀놓고 예배에 경청하고 있으셨다고 하니….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 우리 사남매가 모두 주의 사역자로 주의 길을 가고 있으니 이 또한 희귀한 일이기는 하다. 남들 눈에는 오죽하겠나? 초빙한 교회 목사가 연거푸 그 대목을 부러워하는지 자랑스러워하며 추켜세우자 아버지로서는 부모로서 당신들이 한 게 없다고 하시는 말씀일 텐데, 이보다 더 큰 ‘공감적 경청’, ‘공감적 참여’가 어디 있을까? 다윗은 그 노래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말이 그렇지 그 속이 오죽들 하셨겠나? 나야말로 티를 안 낸다고 안 내는데도 자식들 일로 마음이 쓰여 애달파하고, 이를 곁에서 지켜보며 아내는 안쓰러워하며 너무 애태우지 말라는데. 당시의 가난과 빚과 처한 모든 상황이 나이 마흔이 다 돼 주의 부르심에 응하겠다며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할 처지였겠나? 한데도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시시로 그 마음을 주 앞에 토하였기 때문이겠다. 지지리 공부도 못하고 몸은 부실하고 어디 나가 사람 구실도 못할 것이 연이어 말썽을 부려대며 가출을 일삼고 반항을 밥 먹듯이 하는 와중에도 나의 어머니는 한 번도 내게 뭐라 한 적이 없었다. 나의 성적표를 두고 뭐라 나무라거나 면박을 준 일도 없고, 나가서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도 전혀 관여하지 않는 눈치였으니. 가끔은 나의 생모가 맞나? 계모가 아니신가? 하고 놀라워할 때도 있었다. 되레 늘 강하고 전투적인 목회로 늘 전장을 뛰어다니듯 교회에 전념하는, 강인한 줄만 알았던 나의 아버지가 늘 돌아앉으면 날 위해 우셨다. 자식들의 일로 밥상머리를 적시곤 하셨다고 하니, 그럴 때면 엄마는 늘 분명하였다.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사람 만들어 쓰시든지, 버리시든지.’
이쯤 나이가 들고 나도 이제 주를 더욱 바라며 주만 바라며 살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나의 부모는 그때 그 시절을 어찌 주만 바랄 수 있었을까? 오직 저들을 붙든 것은,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가 요단 동편 마하나임에 은거하며 지은 다윗의 시편이 그야말로 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의 어머니를 버티게 한 건,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8).” 그래서 오늘도 그 마음을 주께 토로하며 우리의 모든 날들을 주께로만 올려드린다고 하시는 것일 테니. 훗날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면면을 되새기며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잠 5:1-2).”
즉 오늘을 사는 데 있어 믿음으로 온전하여짐이란, ‘공감적 경청’으로 첫째는 늘 주의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음을 다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셋째는 근신하며 살라는 것이다. 근신이란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그야말로 ‘거리두기.’ 우리는 어쩌면 너무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과 몸과 마음에 열중한다. 바벨론과 같은 세상에서의 근신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으로부터의 근신 또한 유력하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그리 알게 된 지식을 지키라는 것, 곧 적용하는 삶이다. 사는 데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것이라. 솔로몬은 저의 부친의 생을 되새기며 자신을 돌아보다 노년에 망가져버린 자신의 신앙을 통탄하였다. 부디 나의 생은 남은 것으로 만회할 수는 없겠으나 그러므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하는 오늘 베드로서의 말씀에 주목한다(2:2).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
돌아보면 감사뿐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10).” 그러므로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라 해도 나 또한 그것을 즐기며 그리 살아왔던 날들을 회개하며.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16).” 하여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20).” 오직 주만을 바람이여.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5).” 새삼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