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벧후 2:7-8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 142:7
오늘 본문이 아니면 누가 롯을 의인이라 여기겠나?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고아가 된 조카 롯이 안쓰러워 함께 길을 나섰다. 이후 저의 행적은 어느 것 하나 의롭다고 할 게 없다. 서로 갈릴 때 저는 더 좋은 땅, 소돔과 고모라가 가까운 산지로 옮겨갔고 기어이 소돔에 섞여 저들 가운데서 살았다. 한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저를 의인이라 하여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이라 정의하고 있으니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한데 저에 대하여 덧붙여 말하기를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곧 롯의 상태가 그러했던 것에 대하여 부연해주고 있다.
며칠 전에도 묵상하면서 내 안의 ‘바리새인’과 같은 속성은 나보다 못한 어떤 이들에 대하여 판단하고 비난하기를 수시로 한다. 누가 교회도 안 가고 말씀을 저버리고 사는 듯할 때 나는 가차 없이 저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한다. 돌아온 동생 탕자를 두고 이를 기뻐하며 잔치를 베푼 아버지의 마음에 서러움을 느끼는 내 안의 ‘맏아들’이 건재한 것이다. 생각보다 스스로를 낫다고 여긴다. 누구보다 나은 것을 두고 저를 은근히 무시한다. 행여 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럴 줄 알았다! 하고 내심 인과응보로 여긴다. 우리 안에 분이 가득하다. 나름 애쓰고 수고한 것에 대해 스스로 선히 여긴다. 역사적으로 단죄해야 할 누구에 대해 서슴지 않고 저를 정죄한다. 설마 히틀러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다? 전두환이 예수 믿고 천국에 간다?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롯을 두고 의롭다고?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 2:7).” 왠지 껄끄러운 말씀처럼 입안이 떫다. 그런데 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이어지는 진술을 묵상하다보면 서서히 나는 어떠한가? 하고 반문하게 된다.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8).” 의인이 악인들의 무리에서 살면 저들의 불법한 행실로 심령이 상한다. ‘상한 심령’으로는 그 의를 발휘할 수 없다. 그런데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찾고 기다리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이를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그러니 나의 속됨은 내가 탕자였으면서 누구 탕자를 보며 정죄하는 일이다. 나의 예배가 온전히 예배가 되지 못하는 것은 누구를 단정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데 있었다. 나야말로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시 2:7).” 하는 오늘 시편의 화자가 아닌가? 나의 영혼을 옥에서 끌어내지 않으셨더라면 나는 지금 어찌 살아가고 있었을까?
한참 주를 멀리하며 함께 어울리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입만 열면 누구를 비난하고 헐뜯으며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어울렸더랬다. 한 번은 밤새 저들 집에서 포커를 치고 놀 때 가까이 사는 무슨 공무원 친구를 불렀다. 개인병원을 하는 저들도 그와 알아두면 도움이 될까 하여 서로 좋다고 그리 한 것이다. 새로 음식을 주문하고 뒤늦게 온 친구는 같이 둘러앉아 카드를 치며 시시덕거리며 놀았다. 며칠 뒤 친구를 만났을 때 저는 그날 일을 떠올리며 마치 지구 종말 하루 전에 모여서 놀면 그럴까? 싶을 정도로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렇게 말하는 저를 샌님처럼 치부하고 말았다.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나의 영혼을 옥에서 끌어내지 않으셨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이제 더는 ‘저들과 다른 것’에 안도한다. 내 안의 바리새인이다. 나는 죄 많은 세리와 다른 것이다. 주를 멀리하고 사는 저들보다는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세상을 단정하고 저들을 비난한다. 저들 한 영혼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아,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5-6).
어제는 아버지가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시는 주일이었다. 평소에 이어가는 기독교 교리 강해를 잠시 멈추고,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부탁드렸다. 전 주일에 동생이 섬기는 교회에서 증거하신 동영상을 가족들 방과 교회 단톡방에 올렸는데 아무래도 안 봤을 것 같아 그리한 것이다. 곧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실제적으로 ‘나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이다. 그저 일상적으로 일요일이 되었고, 습관에 따라 교회를 가고 한 시간 예배를 참여하는 것으로 다가 아니다. 이어 사도는 당부하기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곧 구약시대의 예배는 죽은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다.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 나오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5대 제사-예배는 신약에 와서 오늘에도 여전히 드려져야 할 영적인 교훈이 있다. 먼저 번제는 ‘올라간다’는 의미로 불에 태워 그 냄새와 연기를 피와 함께 올려드리는 행위다. 여기에는 소나 염소 새-비둘기가 드려졌다. 곧 저들의 제단에는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였을 테고 이로써 자신들의 죄를 양이나 염소에게 전가하였다. 이를 신약에 사는 우리로서는 예수의 공로로 대신하게 된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이에 세례요한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하며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을 본다. 곧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두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곧 저의 피로 나의 더러웠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신 것이다. 다음은 소제로 이는 ‘선물’이라는 의미다. 곡물로 드려지는 제사다. 이를 찧고 빻아 ‘고운 가루로 뭉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놓아 태워서 드리는 향기의 제사다.’ “…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2:1-2).” 곧 우리 삶이 교회라는 방앗간에서 자신이 고운가루가 될 때까지, 자신을 깨뜨리고 부수고 가루를 내어 성령의 기름을 부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올려 드리는 성도의 냄새로서의 삶이 곧 우리가 날마다 드려지는 영적인 예배다. 이를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그러므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로,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5-16).” 과연 그러한가? 우리 삶이 화덕에 구워지듯 고달프고(레 2:4), 번철에 부친 것 같이 시달리고(5), 가마솥에 삶아지듯 익어가며(7), 소금을 뿌린 것 같이 그 맛을 더한다(13). 곧 우리의 삶이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그 맛을 더하기까지 익어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이에 어제 아침에 묵상했던 바,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 이와 같이 이어지는 말씀마다 귀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드려지는 화목제는 ‘온전하다, 끝내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감사제나 서원제로 자원하는 마음이다(레 3장). 곧 오늘을 살며 잠깐씩 맛보는 천국의 화평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10).”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 살아가는 날들로써의 예배다. 이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더는 예전의 나로 살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이를 위한 제사로 네 번째, 속죄제다(레 4장). 이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로 자신을 알고 돌아보아 회개하고 돌이켜 깨끗하게 하심이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 이를 약속하시고 보장이 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럼에도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그리고 다섯 번째의 속건제는(레 5-7장)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로 저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대인 대물에 대한 배상과 속전을 일컬으며 우리의 행실을 올바르게 한다.
이와 같은 말씀으로, 아버지의 설교를 다시 또 들으며 메모하였고 이를 좋고 귀한 줄 알고 이처럼 다시 묵상하면서 아직 이를 알지 못하는 가족들과 누구누구를 마음에 두고 긴 한숨과 함께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전에도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그릇 행하며 함부로 살 때, 아버지는 당시의 설교 내용을 녹음하여 테이프로 주시고는 하였다. 하다못해 운전하고 다니면서 틈틈이 들으라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대답만 하고 받아두었다가 어디 낚시를 가서 한꺼번에 버리고 오곤 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나를 아찔하게 여기며 안타까워진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가족이 그렇다. 아내는 물론 딸, 아들 아무도 나의 이 묵상글에 관심이 없다. 특히 아내는 무슨 활자거부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읽는 걸 싫어한다. 연애 땐 그게 귀여워서 내가 쓴 연애편지도 만나서 읽어주곤 하였는데, 그래서라도 날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성경을 같이 읽는다. 처음엔 속상하고 답답하다가 이제는 나를 돌아보며 다 때가 있으려니 하고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란다.
‘악마도 병이 들면 수도사가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닥치기 전까지는 모른다. 시련이 그치면 신앙도 간절함을 잃고, 절박한 상황이 도리어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었으니… 우리의 우리 됨이 참으로 야박할 때가 있다. 이것도 지금에나 이러한 묵상으로 주께 송구함을 느끼지, 예전에는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가 않던 것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바닥이 있어야 그 위로 올라서는 돋움도 가능한 것을. 자기의 필요를 구하는 정도로 주께 부르짖고 애원하는 신앙을 어찌 뭐라 나무라겠나? 그러한 필요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은혜였다. 이에 조금 더 그 은혜의 가치가 자라나면 주를 섬기고 더욱 주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도 드려지는 선물처럼 올려지는 것일 테니, 나아가 주의 긍휼하심과 은총을 찬탄하고 찬송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의심하지 않는다. 어쩌겠나? 바닥이 있어야 또한 이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기회도 생기는 것을. 이제 더는 누구를 탓하기보다 열 배 백 배,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의 긍휼하심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어쩌겠나? 누구는 그러느니 자연에서 배우는 게 더 많다며 산으로 바다로 떠나 자연에서 배운다고 하니, 자연을 스승으로 삼는 저들의 영혼이 오죽하겠나? 동물을 사랑함으로 반려동물과 밀접한 애정을 느끼며 사는 오늘날의 황폐함에 대하여, 달리 말해 비인격적인 것에서 유대감을 느끼고 호소하는 지경에 이른 영혼들에 대하여, 그리 내버려두심도 은혜였으니…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그리 행하게 남기시는 일에 대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12)” 그러한 삶을 보며 각성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15).” 마주하게 될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복이겠으니.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17).”
주를 바로 알자. 복음을 바로 알자. 말씀으로 바로 서자. 누구 일로 속 끓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명이라고는 하나, 그것으로 나는 더욱 주를 바람이었으니.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19).” 줘도 받지 못함은 저주이었다. 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은 롯과 같이 나는 저보다 좀 나은가? 더욱 두려운 것은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21).” 하여 자신이 전한 후에 버림을 당할까 경계하였던 바울의 경각심도 그런 이유였겠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리하여 날마다 자신을 고운 가루를 내어 성령의 기름을 붓고 그리스도의 향기로 올려지는 삶이 매시로 필요하였다.
자칫 우리의 그릇됨을 두고 사도는 일갈한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행여 내가 주를 멀리할까 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중략)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편 142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