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요일 5:21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 148:13
어떻게 이러실 수 있지? 하고 의문을 갖게 될 때가 있다. 나름 열심을 다해 주께 구하고 바라고 성실히 주를 섬긴다고 섬기는데 그에 비해 주님은 별로 내 일에 관심이 없으신 것 같다. 오히려 어려움은 가중되고 원치 않는 상황은 계속된다. 그럴 때 우리의 감정은 상한다. 주를 향한 의심도 생긴다. 누구와 견주어 억울한 마음도 든다. 이에 따른 대표적인 시편이 73편이다. 누구를 돌아보다 오히려 내가 넘어질 뻔한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마음에 회의가 일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
인격과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의욕과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좀 나을까, 했던 감정들도 여전할 따름이다. 줄어들거나 적어지는 게 아니다. 그러한 감정의 역기능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닌 게, 그래서도 하나님이 나의 주 되심을 더욱 바라고 목말라하게 한다. 세상을 덜 갈망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날을 더욱 고대하며 그 나라의 영광을 소망하게 된다. 우리의 욕구와 욕망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은 불교의 사상이다. 그럴 수 있을 거라 여겨 속세의 미련을 버려야 한다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의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더하시는 어려움이, 갖은 욕구와 스스로도 억제하기 어려운 감정들로 인하여 씨름하듯 주를 더욱 바라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69:9).” 하는 데에 이른다. 물론 시편 73편의 아삽은 하나님을 포기할 뻔도 하였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73:12-13).
그러니 상대적으로 드는 박탈감이 크다. 세상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친구의 모친은 벌써 10년 가까이 요양원에 계신다. 자녀들을 자유로이 보지 못하고 산 것도 억울한데, 점점 더 기력은 쇠하여 몸져누워 거동도 못하고 누가 주는 밥과 누가 치워주는 손길에 의해 생활한지도 4년째다. 가뜩이나 ‘코로나19’ 이후 자녀들의 방문도 차단당하였다. 이 땅에서의 생을 그만 놓아주셨으면, 하고 주께 구하고 또 아뢰기도 하신다. 그러니 산다는 게 얼마나 고단하고 어려운 일인가.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4-15).
그 마음에 안 믿는 자와 다를 게 없이 서러움과 원망만 가득하다면 어찌 오늘을 더 견딜 수 있을까? 우리 안의 억울함, 어떤 분노, 슬픔과 좌절 따위에 대해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길이 없다. 자녀들 가운데 막내인 나의 친구는 그렇게 요양원에서 생의 마감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컥, 마음이 어렵다. 그러니 또 어쩔 것인가? 나는 아무 말도 거들지 못하고 가만히 듣다 당달아 속상하였다. 덩달아 어려운 마음으로 오후 내내 아팠다. 우리의 이와 같은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속상하심뿐이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나 1:2-3).
자리를 보존하고 누운 어머니를 상상하였다. 정신은 온전하여져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견디신다. 가끔 영상통화를 할 때 눈물을 글썽이는 자식을 두고 오히려 위로한다. 오늘까지도 자신의 목숨을 놓아두시는 까닭은 저들을 위한 기도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라 여기신다. 나는 친구에게 그리 말해주고 싶었는데 차마 그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간혹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한다. 친구의 이런저런 말을 듣다보면 안 믿는 자보다 더 큰 반감을 가지고 주를 생각하는 게 당연하게도 여겨진다. 우리 속에는 적잖이 그런 반감이 들 때가 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시 10:4-6).
그러니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보다 훨씬 활발하고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 같다. 하나님은 막연하고 무심하여 때론 있는 듯 없는 듯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나는 저의 의심을 설득할 수 없었고, 처한 저의 모친의 모진 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실의에 찬 저의 말들은 하나님이 차라리 없는 게 더 낫다는 듯 굳이 바라고 구할 게 없다는 식이었다. 그렇게 아삽도 미끄러져 넘어질 뻔하였다가 주를 찾았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73:25).” 이와 같은 고백이 얼마나 더 자신의 바닥을 마주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22-26).
이런저런 어려움이 또는 불안과 염려가 우리를 휩쓸고 지나갈 때에 비로소 자신의 바닥을 보고 더는 소망이 없는 것을 고백한다. 주가 아니시면 아무 쓸모가 없음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게 된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6:8).
이렇듯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주를 바랄 때가 온다. 아니 신부로 우리를 맞아주시는 주님과의 혼인의 날을 기다린다. 그때를 기다리며 묵묵하라 하시는 것 같다. 우리 안에 원망이 또 슬픔과 우울이 휘감아 나락으로 던져버리는 것 같을 때도, 주는 거기 계시면서 가만히 곁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신다. 시편 가운데 특히 88편의 시만큼은 우울하고 슬프고 난감하여 묵상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이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88:1-5)
나는 친구의 모친을 생각하다 고라 자손 에스라인의 절규를 생각하였다. 요양원에서 노년을 맞으며 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심정은 어떠할까? 더는 운신조차 할 수 없어 그 몸을 남의 손에 맡기고 꼼짝도 못하는 가운데 주를 바라는 마음은 어떨까? 평생을 주를 섬기며 남편을 장로로, 두 아들을 목사로, 다른 아들을 장로로 세우심을 곁에서 같이 하고… 나름은 그 주신 날을 다하며 주를 온전히 섬겼다고 섬긴 셈인데. 대학 때 저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가난에 찌든 생활에서도 막내아들의 친구이면서 명색이 내가 목사 아들이라는 이유로 나를 선대함이 가히 여느 부모와는 달랐다. 돌아가신 부친은 일부러 새벽 일찍 어디 장에 가서 고기 근을 떼와 국밥에 편육까지 얹어 한 상을 차려주시고, 무심히 리어카를 끌고 두 내외분이 고물을 주우러 나가시곤 하였다. 심지어 나의 결혼 때도 아들 친구일 뿐인데 직접 인천까지 오셨던 것도 기억난다. 이북에서 넘어와 평생을 찌든 가난으로 고물상을 하면서도 장로로 교회를 섬기며 주를 바라듯 맡기신 자식들을 모두 주 안에서 바로 키우며 주만 바라고 사신 생이었는데….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6-9).
때로는 주의 살아계심을, 그가 행하시는 일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알 길이 없다. 어찌 이러시는가, 차오르는 난감함은 물론 너무하고 야속하실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차라리 주를 모르고 사는 게 훨씬 홀가분했을까? 하는 마음마저 들면서, 생은 무겁고 모질기만 하다. 그러니,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0-11).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지 모르겠다. 아는 사람,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다 떠나가게 하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가증한 자로 만드시는 저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쇠하여 더는 기력도 없는데, 그것으로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9).” 하고 승복하기까지,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2-13).
우리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심이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힘에 겹기만하다. 아,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14).” 우리의 절규를 들으시기나 하는 것일까?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16-18).
이것으로 인생이 끝이라면, 그러다 마는 게 신앙이고 아무에게도 증명할 수 없는 공수래공수거로 마치는 게 이 땅의 생으로서는 전부라고 하면… 우리는 무엇으로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더 나은 본향을 소망할 수 있을까? 종일 오락가락하는 가을 장맛비 때문에도 몸은 녹초가 되었고, 누구의 이런저런 소식에도 새삼 나의 남은 생도 무섭게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가소로울 뿐이어서… 점심으로 먹은 게 체했는지, 며칠째 계속 먹은 진통제 때문인지, 백신부작용인지, 누구의 소식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것 같아 가만히 누워서 ‘주일 지나고 아파도 아파야 하는데…’ 하는 마음으로 저녁도 거르고 속을 비운 채 일찍 잠을 청하였다.
수만 가지의 마음이 동시에 꿈틀거리며 한데 뒤엉켜버릴 때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다. 나의 불안과 두려움과 우울한 마음을 어찌 주체할 길이 없다. 덩달아 마음이 어렵다가도, ‘그래도 주일에 예배를 인도하고 실려 가도 실려 가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우습기도하고 가소롭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기도하게도 하였다. 그러다 문득, 나는 친구 모친이 홀로 요양원 병실에 누워 사투를 벌이는 그 남은 생의 고독을 생각하였고 다시금 주의 마음을 헤아리려 헤아리다 알 길이 없어 어려웠다. 그러할 때,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6:8).
아, 이 아름다운 주의 손길을 묵상함으로,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5-6).
주의 사랑이 얼마나 나를 붙드시는지. 하여 오늘 말씀을 마음에 다시금 되새기게 하심인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 이는 내가 어찌 이해하고 바라고 나름 해보려고 하는 모든 우상으로부터 멀리하기 위해, 오직 나로 하여금 바라게 하심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시 148:13).” 오직 주의 이름만으로,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5:2).” 고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4, 12).
그리하여,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시 148: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