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요이 1:9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 149:4
‘그리스도의 교훈’ 즉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나쳐’ 사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모르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러려니’ 하다 그러거나, 스스로 너무 애써 ‘지나치게 수고’하는 탓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못한다. 이는 모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으로’인한 것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래서 지혜서는 말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 7:16-18).
그러려니 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로 여겨 ‘농담’으로나 듣기 때문이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평소 롯의 품행이 어떠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겠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하고 오늘 말씀은 단언한다. 즉 우리가 “교훈 안에 거하는” 것은 뚜렷하여서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곧 그의 안에, 그의 삶에서 나타는 뚜렷한 일이다(요이 1:9). 이는 감출 수 없는 문신 같고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 같다. 말씀이 즉 주의 영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은 서로의 문안-교제로 가늠할 수도 있다. 성도의 교제는 역사가 크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어제 주일은 모처럼 ‘줌’으로나마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말썽이 좀 따랐다. 40분 무료 시간이 초과되자 가차 없이 튕겨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전 주일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잘 이어지던 것이 어제따라 유난히 극성을 부려, 앞서 누구와 연습하듯 먼저 대화를 나누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세 번은 그렇게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들 모이는 바람에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고 말씀은 두서없이 서둘게 되어 속상하였다.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월정액을 내면서 사용해야 하지 않겠나싶다. 주일에 한 번 쓰는 것을, 가뜩이나 나의 노트북은 아들 필리핀 공부하러 갈 때 사주었던 중고라 화면에 비치는 내 모습이 반 토막 나는 것이기도 해서 그냥저냥 사용하려 했는데…. 보면 모든 게 다 사는 데 따른 부대비용이 따른다. 그러니 돈돈거리며 사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평소 같이 예배를 못 드리던 누구도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어 좋았고, 누구는 돈이 치여 일 때문에 그 시간 일터에 있었다며 그 사연을 단톡방에 올렸다. 그래도 마음이 좋았던 것은, 온전함이란 완벽함이나 실력이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다. 신령과 진정이란 주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심과 그에 따른 마음을 같이 함이다. 가령 누구와는 늘 멀리 떨어져 지내지만 서로의 묵상글을 나누고, 자주 통화하고, 저의 형편대로 교회를 후원하여 헌금하면서 교회를 시작하고 오늘까지 함께 한다. 그러기가 쉬운가? 사람 마음이야 오락가락 한다지만 돈이 따르는 데는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자고로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하신 말씀과 같이 이는 그 형편과 사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따른 보물의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말이 나온 김에 누구의 경우 저는 이번에 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앞서 병원비에서부터 수천만 원의 돈이 든 걸로 알고 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아파트 문제까지 겹쳐 저의 이름으로 일억을 대출받았다고도 들었다. 그런저런 형편과 사정을 고려하면 줄이거나 끊어야 하는 게 옳은데 저는 오히려 더 평소보다 높여 매월 얼마의 헌금을 보내온다. 그게 어찌 날 보고 또는 단지 무슨 일을 후원하는 데 따른 것이겠나?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이 놀라운 역설을 나는 교회를 지키면서 매번 경험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특히 돈 문제로 애쓰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신다. 나는 한 번도 누구에게 후원을 부탁하거나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를 의도적으로 한 적이 없다. 워낙 규모도 적지만 우리 가정의 형편과 사정에 대하여는 그야말로 내려놓은 지 오래다.
신학을 할 때 학부 때도 그러했고, 신대원을 하는 동안 매 학기의 등록금도 그렇고 그때마다 하나님이 붙이는 손길이 있었는데 이는 그냥 한두 번 우연한 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나는 이제 모세의 간증을 공감한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똑같이 광야를 걸었고 오히려 지도자로서 저가 느꼈을 부담은 더욱 컸을 텐데, 남들은 그때마다 고기나 부추 따위를 놓고 신세한탄을 하였고, 물이 없어 원망과 한탄을 일삼을 때도 모세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는 것 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이를 저들에게 전하여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어떤 일’이 같이 따르는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이와 같은 체험이 은사다. 확신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다. 그때마다 일어나는 실제다. 그런데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렘 5:24).” 성도란 이를 알아야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다. 남이 말하면 그런가? 하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닭 쫓는 개처럼 헛되이 짖을 뿐이어서는, 그런 이의 신앙이란 게 얼마나 고약하겠나? 그때마다 흔들리는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요동친다. 그러니 그 신세가 또 얼마나 처량한가? 시달리듯 끌어당기는 뿌리박힌 줄기 때문에 이게 복인지, 저주인지 분간할 길이 없을 정도이니….
다시 돌아와, 어제는 예배가 부산하고 그로 인해 속상하기도 하였는데, 오히려 같이들 기도 제목을 나누고 누구는 예배에 함께 하지 못한 이유를 일터에서 그 와중에 뭐라 적어 올린 말이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다시 되새기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곧 우리 안에 두시는 겸손이라 내가 어찌 행색을 갖추어 그러려고 하는 겸손의 모양과는 다른 것이다. 이에 나타나는 현상은 뚜렷하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5-6).
이를 바울 사도의 증언으로 확대해보면,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이 놀라운 증언 앞에 나도 합류한다. 비록 누추하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것이나 나의 나 됨으로 내가 주 안에서 기뻐하게 하심이 때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로다. 남들보다 가진 게 있나? 자랑하여 나은 게 있나? 그저 근심하는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이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쩔쩔매는 자 같으나 그것으로 살아 있고, 기뻐하고, 오히려 남을 부요하게 하고, 감사로 넘치게 하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 여기에 오늘 사도 요한의 증거를 더하면 우리가 취해야 할 경계자세가 어떠한지 선명해진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 1:10).”
서로의 사고가 다르다. 이미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우리에게 저는 곧 섞여 나온 무리이며 잡족이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예배 후에 아내와 오후께 그런 내용으로 말을 더 나누었다. 평소 아내는 유튜브로 어느 여성 강사의 강의를 즐겨듣는다. 저의 성에 대한 이론이나 삶에 대한 지론을 지지한다. 어느 상담가의 놀라운 성공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공감적 경청’ 즉 이것이 다른 교훈을 따를 때 빚어지는 현상에 대해 아내는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 한때 나도 도올 김용옥을 좋아라했다. 저의 박식함에 매료되어 저의 종교적인 견해에도 일정부분 동조했다. 또는 이어령 박사의 영성에 대한 지론에도 공감했었다. 그러다 지금은 단호히 말하건대 우리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듣지 못하게 하는 지나침은 바로 저들처럼 ‘옳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섞여 나온 무리들의 소요가 어디 틀린 말이 있나? 한데 오늘 사도 요한의 증언은 확실하고 단호하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 1:11).” 인사조차 건넴으로 그의 악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그야말로 아차, 하는 순간이다. 나로 기뻐하게 하는 내 안의 영은 넘치는 무엇이 아니라,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러하려 하는 저의 마음이었다. 이런저런 지금의 사정으로 인하여 같이 예배를 드리지는 못했지만 이를 두고 죄송스러워하고 사과하는 마음이 어디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겠나? 함께 예배드림을 감사히 여기며 기도제목을 알려오는 누구의 경우 저가 나를 보고 하는 일이겠나? 아니라, 우리 안의 ‘신령과 진정’이란 차고 넘치는 이의 덜어주는 손길이 아니라, 마게도냐의 교회들처럼 자신들도 환난과 가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넘치는 그 이상을 연보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었으니, 이를 두고 내 안에 두시는 기쁨은 이상한 것이었다. 곧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4).”
서로의 작은 순종과 행함이 서로의 기쁨이 되고 격려가 되는 것이 복이다. 어쩌면 큰 교회, 넘치는 형편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기쁨으로 이 기쁨은 천국의 기쁨을 모형으로 예행하게 하시는 것이겠다. 그러므로 사도는 당부한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8).” 이게 어디 이 땅에서의 일로 그치는 것일 텐가? 고작 남들처럼 잘 되고 남부럽지 않은 삶으로 족한 따위의 정도이겠나? 그러므로 당부한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9).
이와 같은 증거가 우리로 가는 길을 더욱 든든히 붙드시는 일이다. 그저 남들처럼 그 육신을 잘 건사하여 10년 20년 더 무병장수하여 산다고 한들? 복에 복을 받아 돈에 돈이 넘쳐 사업이 번성하여 주를 외면하고 살기에도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한들? 그래서 서너 채 그 이상의 가옥과 가옥을 잇고 살았다고 한들? 오히려 그 일이 저주인 것을….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0).
오늘 사도 요한은 한 장의 서신을 덧붙이며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2).” 우리의 기쁨이 그 이상으로 충만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서로의 문안함이 은혜였다.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13).” 고로,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 149:1, 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