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전봉석 2021. 8. 24. 05:01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시편 마지막 편을 마주할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셈인데 얼마쯤 나의 영혼은 깊어졌을까? 하는 단순한 기대에서부터 ‘미래의 추억’을 꿈꾸게 된다. 어느 훗날 주의 앞에서 숨 가쁘게 지내오는 나의 ‘150일 간의 여정’은 어떻게 포개어져 있을까? 365일인 1년을 단위로 얼추 두 번의 여정을 마치는 동안 가을이 오고 다시 봄을 지나고는 한다. 나는 반드시 어느 가까운 미래에 주 앞에 서서 아뢰어야 할 것이다. 지나온 나의 시간이 어떠하였는지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돌아보며 이야기 나눌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미래의 추억은 두렵기도 하면서 설레기도 한다. 주의 긍휼하심 앞에서 면구스러워 머리를 긁적거리며 송구스러워하고 있는 나를 상상한다. 나의 허물과 죄악들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을 때,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1).

 

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스럽고 안전한 일인지. 그래서 그랬나? 어제는 문득 유진 피터슨 목사의 책들 가운데 사도 요한의 설교들을 찾아놓아 다시 읽기를 시작하였다. 방금 인용한 성경에서도 요한은 우리에게 ‘나의 자녀들아’ 하고 표현하고 있다. 여느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저는 그 사랑으로 남은여생을 주의 말씀 가운데서 말씀으로 사고하고 말씀으로 실천하며 말씀으로 꿈꾸었던 것 같다. 내일부터 묵상하게 되는 요한계시록은 404개의 구절로 이루어졌는데, 성경 곧 주의 말씀에 대해 518번이나 언급하고 다루었다고 한다. 그만큼 모든 문장으로 말씀에 몰입하고 말씀으로 자기의 생을 무장하였던 삶이라는 것을 짐하게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하는 저의 글의 시작과 함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하는 진리 앞에 우리를 세워놓는 것을 보면, 말씀으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실감나게 한다. 그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 말씀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과연 이를 우리는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시편의 마지막 시편 150편을 되뇌어 읽다보면 도돌이표 앞에 서는 일처럼 다시 숨고르기를 하고, 새로 시작하는 출발선에서의 사람처럼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그야말로 말씀을 보고 싶어지게 한다. 사도 요한도 그러하였다.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요한계시록 1:12).

 

다시 나는 몸을 돌려 말씀의 음성을, 본다. 말씀으로 오신 이의 모습을 마주 보고 살고자 한다. 우리가 살았다는 것은, 가까운 미래에 내남없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을 증언해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에 과연 우리는 얼마나 말씀으로 충만하였는지, 살면서 사는 동안에 어떤 맛을 맛보아 알며 살았는지, 즐거움으로 재미나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이와 같은 고백을 내 것으로 아뢸 수 있을까? 과연 오늘 나의 하루하루가 <미래의 추억>에서 말씀에서 말씀으로 뛰고 걷고 즐거이 행하다 왔는지를 아뢸 수 있을까?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32).

 

오늘 시편의 고백으로 나의 것을 삼을 수 있을까? 그렇게 시편 150편까지를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에 한 장씩 더하여 150일 간의 여정은 5개월 동안의 나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시편 119편의 구절이 너무 길어서 늘 3일로 나누어 50구절씩을 묵상하였으니 정확히는 152일 간의 여정이 된다. 그러면 시편을 두 번 묵상하고 나면 두 번씩의 계절이 바뀌면서 곧 한 해가 가거나 새 해가 넘어와 겨울이거나 다시 봄이다. 그때마다 묻게 되는 질문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는 과연 ‘그 말씀을 받아 먹으라’ 하시는 데서 얼마나 골몰하였던가? 하고, 오늘도 사도 요한은 주의 곁에서 물으시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가까운 미래에 모두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중앙 보좌에 좌정하시고 인자하신 미소를 머금으시며 물어보실 것 같다.

 

내가 또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요한 계시록 10:1-2, 8-10).

 

‘갖다 먹어버리라’ 하신 말씀을 나는 과연 얼마나 꼭꼭 씹어 삼키며 먹고, 그것으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살아오게 하였는지를… 시편 150편이 끝날 때마다 문득, 주춤거리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미래의 추억에서 나는 하나님과 요한 사도와 바울와 다윗 왕과 아브라함과 야곱 앞에서 나의 달려온 날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야기하며, 서로들 즐거워할까? 주의 말씀을 보고 이를 얼마나 어떻게 삼키고 먹으며 달려왔는지를… 나의 느린 걸음걸음마다 호흡을 같이 하고 다들 모여앉아 숨죽여 지켜보았을, 저들의 이구동성과 웃음과 격려를 들으며 그때마다 주의 영광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완전한 자로 거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얼마나 충만하게 서로들 증언하며 기뻐하고 찬송하고 있을까?

 

어제는 아침 일찍 시편 63편을 펴고 ‘설교원고’ 초안을 준비하였다. 나에게 있어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이 나의 한 주간의 일과이면서 일상의 원점이기도 하다. 내 일이면서 내가 맡은 사명이기도 하다. 어제는 일이 있어서 막내 동생이 인천으로 왔다가 들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저를 보면 할 일은 많은데 그것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늘 아쉬움이 큰 것 같다. 다방면으로 주신 달란트가 많다. 그러니 나더러도 ‘글방’을 이렇게 해서 노인 분들에게 저렇게 하고, 요즘은 이런 일이 필요한데 저런 데 관심을 두면 어떨 것 같고… 하면서 한참 이어지는 저의 말을 나는 늘 듣다가 만다. 그러게, 나는 주 앞에 얼마큼의 달란트를 내어드리며 얼마를 가지고 얼마의 이문을 남겼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으로 조바심을 느끼기도 한 것 같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지은 시라고 하니, 아마도 아들 압살롬에게서 도망쳐서 요단강 동편 마하나임 어디 광야쯤에서 지은 시인 것 같다. 나는 퍼뜩,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라 제목을 정하고 시편을 읽다, 동생을 마주하고 돌려보낸 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하는 부분에서 한참을 되뇌고 머물러야 했다. 전에 누가 쓴 글에서 휠체어를 타는 저에게 계단 하나는 절벽과도 같다는 표현을 읽고 가슴을 저몄던 기억이 있다. 누구나 저마다의 가슴에는 말 못할 광야가 있다. 그 마른 사막에서 우린 무엇을 하고 이를 어떻게 이겨내며 살고 있는 것일까? 또 다른 시편에서 다윗은 같은 심정을 노래하였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143:6).” 곧 영혼의 허기짐과 목마름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게 복일 터인데.

 

어제도 무슨 이야기 끝에 ‘나는 누구의 이야기로든, 어느 대회에서라도, 상금을 받을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하고 동생에게 우쭐하듯 말하였다. 저마다의 광야에서 굶주림과 타는 목마름을 들려주면 된다. 이는 괜한 소리가 아니라, 우리는 저마다의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고백적인 사연에 감동한다. 실제 글방을 인천으로 옮기고 몇 명 안 되는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아이나 짧은 시간에 꽤 큰 대회에서 입상을 하였다. 그 중 한 아이는 무려 60만원의 상금과 30만원의 상금을 연달아 탄 적도 있다. 어언 고3이 되었을 저 아이는 그때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쓸 때면, ‘글방에만 오면 불행해지는 것 같아요!’ 하는 뼈있는 소릴 했었다. 그것이 가까운 미래에 불행이 아니었다는 것을 저는 증명하였다. 이혼을 한 부모인데 저들이 같이 사는 어색한 동거 생활의 이야기는 슬프면서도 여러 사연을 안고 있었다. 이를 글로 쓰게 하는 일은 마치 씨를 뿌리고 아무런 기척도 없는 밭작물을 기대하며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대는 농부의 기다림 같이 막연하면서도 설렌다. 같이 울기를 몇 번…. 큰 상금을 두 번씩이나 타본 아이는 자기 이야기가 더는 불행한 게 아닌 것을 알았다.

 

동생은 그런 이야기를 듣다가 노인들을 상대로 그 일을 하면 어떨까? 노인 분들 교육을 하다보면 열에 아홉은 자신들의 인생을 글로 쓰고 싶어 하고, 그 사연을 나누고들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게 어디 노인들뿐이겠나? 사람은 누구나 공감과 지지를 갈망하고 산다. 가장 가까이 하는 가족하고는 더 멀게 느껴지는 이유가 너무 잘 안다는 선입견과 오해 때문에 서로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시작하면서이다. 어쨌든 스스로가 불행이라 여기는 그 모든 이야기의 의도에는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보물이 있다. 나는 그런 확신이 있다. 누가 나더러 나의 이야기를 쓰지 그러냐고 묻곤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나의 한 주간이 ‘설교원고’ 한 편으로도 벅차다! 실은 병적으로 매달리며 타는 목마름으로 광야를 지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 아이의 말마따나 나의 불행은 차고 넘친다. 숱한 사연으로 여기저기에서 상금을 곧잘 타먹기도 했었다. 그 요령은 간단하다. 나의 슬픔-불행을 형상화하기. 그럼 모두의 것이 된다. 마치 변기를 뜯어다 전시장에 내어다 걸기. 그럼 더 이상 저 변기는 더러운 게 아니라 모두에게 전시되어 공감을 얻는 작품이 된다. 실제 1917년 마르셀 뒤샹은 <샘>이라는 가명으로 변기를 전시한 바 있다.

 

나는 마른 사막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누구의 사랑을 희구하며 살았고, 누구에게라도 ‘주목 받는 생이고 싶었다.’ 그처럼 간절히 찾아 헤매던 나의 위로는 더욱 더 타는 목마름으로 조여 왔을 뿐 친구도 꿈도 낭만도 사랑도 모두 허사인 것을, 너무 먼 길을 돌아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서야 알았다. 이제는,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 63:2).

 

모르겠다, 나는. 더는 다른 데 기웃거리며 새삼 위로와 격려를 바랄 것이 없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아파트 한 채, 지상의 집 한 칸을 장만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는데, 나는 저러는 저들의 열심이 그저 같잖다. 그러느니 티끌도 안 될 보잘것없는 나의 영혼이나 이것으로 내가 들어갈 영원한 나라, 미래의 추억을 단 얼마라도 사모으겠다. 오직 나의 그 한 가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하시는 말씀 앞에 ‘올인’한다. 값도 없이 버려져야 마땅할 몫이지만 이를 주께서 그처럼 사랑하셨으니, 그 값을 전부 투자하여 나는 이제 <지상의 방 한 칸>이 아니라, <영생의 단칸방> 하나라도 마련할 수 있다면, 나의 남은 모든 생을 걸겠다. 그리하여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하시는 말씀에 전부를 건다. 그래서 가까운 미래에 나는 주님 앞에서, 주의 말씀이 나에게 꿀송이처럼 달더이다! 하고 고백하는 추억을 꿈꾼다. 그런 나의 미래의 추억은 오직 하나,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아, 이것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한다. 지나온 나의 날들을 나는 일찍이 너무 자주, 많이 우려먹었다. 연애를 할 때도, 어디 글의 소재로도, 오늘을 살면서 추억하는 일로도… 어느 아이의 말처럼 그때는 그게 그렇게 불행스럽기만 하더니 이제는 주를 바라는 나의 발판이다. 더는 더러운 변기가 아닌 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얼마 전까지는 똥이나 오줌을 비워내는 더러운 변기에서 이제는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샘이 되었다고 하시니, 내 안의 추하고 더러웠던 한탄과 원망과 불평과 서러움이 찬송이 되었다. 누구보다 주의 사랑을 곁에서 더 가까이 느낀 요한은 성경에서 성경으로 그처럼 목말라하며 말씀에서 말씀으로 그처럼 말씀에만 집중하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나도 이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낫다!’ 하고 거침없이 아뢰고 고하고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요한은 날 위해 이를 기록하고, 오늘도 이를 두고 날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이에 시편 150편 마지막 시편은 선언한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부디 그러하여서 나의 남은 광야에서의 노래가 찬양과 찬송으로만 가득하기를.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