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4:11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시 5:12
방패로 함 같이 나를 은혜로 호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처럼 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모습으로도 그러하기를 바라신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이를 위하여 오늘도 모두를 위해 해와 비를 고루 내려주신다. ‘이와 같이 한즉’ 곧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 원수를 사랑하고 특히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그리하고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라 하실 리 없다.
마태복음 5, 6, 7장에 이어서 나오는 산상수훈의 말씀도 그렇고 특히 우리가 팔복이라 알고 있는 5장 초반의 여덟 가지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할 때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긍휼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로 사는 일이란 그럴듯하나 실상은 예수님의 모습이고 성품이지 우리로서는 그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리하라 하시는 데는 때로 난감하나 때로 흉내라도 내는 것으로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곧 아버지처럼 되라 하시는 것이다. 돼도 않는 것을 되라 하시며 자신을 과신하시기 위해 이와 같은 말씀을 더하시는 게 아닐 거였다. 어찌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겠나?
문득 떠오르는 이가 손양원 목사시다. 1902년 함양에서 태어나 평양신학교를 하고 목사 된 저는 전남 여수 애양원이라는 나환자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당시에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고, 한 청년이 예수 믿고 의로운 척 하는 이들을 부정하며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였다. 두 아들의 장례를 치르며 손양원 목사는 열 가지의 감사를 적어 교인들 앞에서 기도하듯 읽어 내려갔는데, 두 아들을 순교자로 세우심에 감사하였다. 한 아들은 곧 미국 유학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천국으로 먼저 데려가 천국백성을 삼으심에 감사하였다. 그러다 두 아들을 죽이고 감옥에 갇힌 이를 용서하고 저를 자신의 양자로 삼게 해주실 것에 감사하였다. 말로 용서하고 억지로라도 주의 은혜로 마음을 줄 수는 있어도 이를 양자로 삼은 것은 모두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여수 애양원 교회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반 년 가까이 입원해 있던 병원이 애양원 안에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이어서 더 잘 안다.
뜬금없지만 나는 하나님처럼 된다, 되라 하실 때면 손양원 목사가 보이신 아가페적인 사랑을 생각한다. 어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겠나? 그리 여길 수는 있어도 이를 실천하여 저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 앞에서는 언제나 난감하다. 당연히 나는 못한다. 나로서는 못한다는 데서 첫 발을 떼는 것이 마땅하지, 할 수 있어! 하고 그 믿음을 자처하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실제 ‘하나님이 된 사람’은 숱하게 많이 본다. 스스로의 신념과 아집으로 자신이 하나님이다. 그리 자부하고 확신하여 이를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 말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하시는 말씀을 교묘하게 풀어다 자신에 짜 맞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었다. 저들은 들었고 이를 행하기는 하였으나 ‘네 자신 같이’ 하지는 않았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곧 우리는 나름 의를 행한다. 그러나 자신 같이 저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누구를 용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를 위해 기도까지 하지는 않는다. 손양원 목사가 그냥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그리 말하고 말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그의 딸 동희를 불러 이를 신신당부하며 옥에 갇혀 즉결 심판을 받고 있던 당시의 옥사로 보내 그 뜻을 전하고 저를 양아들로 삼았다. 곧 우리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리 행하는 것이다. 미친 척 하고 흉내라도 내려는 의지다. 우리의 약함은 주가 더 잘 아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원리는 간단하다. 나는 하려 할 뿐이고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표현이 그렇지만 나는 의지만 있고 흉내만 내듯 첫 발을 내딛을 뿐이지, 정작 요단강을 마르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어제 아침에도 그러한 나로 힘들게 시작하였다. 누가 오기로 하고 새로 누구를 만나야 하는 일은 부담스럽다. 연신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약속된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의 마음은 저 혼자 어지러워서 기진할 지경이다. 신대원 3년을 다니는 동안 매 수업 시간마다 그랬다. 이를 누구는 병적이라 하고, 그것으로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먹고 나름 준비하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 나는 그리 삼아 받아낸다. 주께서 만나게 하시고, 그리 계획하신 데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마음은 더 극성이듯 못하겠어서 어려운데, 막상 발을 딛을 때 요단강이 마른 땅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그러니 여호수아는 먼저 강을 마르게 하시면 딛고 건너겠다고 하고, 하나님은 먼저 딛으면 요단강을 마른 땅이 되게 하시겠다고 한다.
아이엄마와 아이가 오기 전까지,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그러한 시달림으로 마음이 어려웠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일은 그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함으로 순종의 자리로 이끄시려는 데 있다. 누군들 감히 하나님처럼 되겠나? 그리 여겨주시니 의인인 것이지, 정말로 스스로 의인이 되는 경우가 누구이겠나? 어제도 새삼 왜 우리의 만남을 이루셨는지 알았다. 마음으로는 믿어요, 하는 아이엄마에게 곁에 있는 아들을 마음으로만 사랑할 수 있겠나? 하고 물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됐다 하는 게 어디 사랑이겠나? 보고 또 보고, 만지고 또 만져도 더 그러고 싶은 게 사랑일 텐데 하물며 주일도 없이 살고, 예배도 멈춘 지 오래고, 그러면서도 주를 믿는다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우선은 아이엄마에게 이를 당부하였고 당장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회복하는 것으로, 아이에게도 그리 하자고 권하며 ‘아이의 수업’을 맡겠다고 하였다. 이제는 뭐 돈벌이로 하는 일이 아니니, 이상한 배짱도 생긴 셈이다. 싫음 말고! 나는 믿음으로 같이 신앙 안에서 하던가 아니면 다른 글짓기나 논술학원으로 다니던가, 아이에게도 다짐하였다.
하기 전에 쩔쩔매던 나는 어디 가고 너무나 태연하게 또한 의연하게, 저들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주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려주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의 본질은 ‘아버지처럼’ 온전하여지는 것이다. 우리의 온전함이란 주를 인정하고 주를 섬기듯 서로를 섬기며 따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죽어서 하늘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온전하여지는 곳 그 이전의 일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나는 이를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 그 지긋지긋한 나의 불안과의 싸움에서 실감하였다. 여호수아의 갈등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곧 죽는다. 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 이를 어찌 감당할까? 주어진 날을 두고, 어떤 말썽 앞에서, 자식의 일로,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암담하고 두렵기만 할 때 우리는 무슨 힘으로 감당할까? 손양원 목사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식 둘 죽은 것을 두고 슬픔도 괴로움도 없이 그리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기껏 말년에 주신 이삭을 이제 좀 키웠다 싶을 때에 제물로 바리치라고 하실 때, 룰루랄라 그냥 죽일 마음이 저절로 생겼을까? 미치지 않고서야!!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신 31:6).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곧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저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다. 이를 이제 믿음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따로 불러 그대로 말하였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7).
우리는 그렇게 하시는 말씀으로만 말씀을 전하고, 살고, 사랑하고, 기다리며 의지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물론 내가 지겹다. 그럼 좀 의연하고 아무렇지도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병적으로 나를 묶어버리신 것 같다. 서너 번도 넘게 똥을 싸고, 그리고도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마음이 어려워지는 동안… 그럼에도 그리 행한다는 것. 좀 더럽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신대원을 들어가서 한동안은 아주 똥구멍이 헐어터질 정도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수업 시간을 앞두고는 지긋지긋하게 속이 불편하고 금방이라도 배가 아파서 못할 것 같은 날들로 이어졌다. 그냥 말끔하게, 당당히… 다들 잘만 하는데 나만 그런 것인지, 모두가 그러면서 나와 같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인지. 어떠하든지 우리는 본래 우리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7-28).
이와 같은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데, 죄로 인하여 우리의 형상은 와해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졌다. 이를 복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다. 십자가에 달려 그 값을 지불하셨다. 그럼에도 여전히 뒤틀린 영혼으로 쩔쩔매는 일이었으니, 못할 것 같지만 하게 하신다. 하게 하시는 이의 그리스도의 권능을 알게 하시려고 나로 하여금 더더욱 지겨운 나로 씨름하게 하신다. 나는 이제 이것까지도 기꺼이 말할 수 있었다. 아이엄마와 아이에게 나는 마치 수다쟁이처럼 말하였다. 그리고 당당히 요구하였다. 안 믿는다 하면 모를까, 믿는다고 하는 이가 그러시면 되겠는가? 우리의 만남이 단지 여느 학원을 알아보고 수업방식과 수업료를 흥정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내가 전과 다른 점은 오고 안 오고, 하고 안 하고, 나는 이제 그 일에 관하여는 홀가분하다. 이처럼 오게 하신 이가 또한 이루실 것이고, 어찌 이루어 가실까 하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같이 기대하는 바이다. 이를 오늘 아침, 말씀에서 읽으면….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계 4:11).
앞서 어려운 내용을 애써 검색을 해보고, 네 동물의 의미를 찾아보고 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말씀으로 귀결되었다. 다른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주께서 더하시는 이에게 더하시고,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에게 착한 일을 끝까지 행하심은 당연하였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내가 하는 게 아님을 알면 알수록 연신 똥을 싸대면서도 해야 하는 일이면 하는 수밖에! 주가 붙이시고 함께 하게 하시는 영혼이면 죽어도 그리하실 것임을 이제는 안다. 내가 아무리 기를 쓰고 도망치고 안 한다고 발버둥 쳐도, 하실 이가 행하신다. 그러는 동안 나는 주를 바라는 의지로 강하여진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 무슨 대단한 깨우침이 있었겠나만 죽이려면 죽이시라, 하는 어깃장은 있었다. 이젠 뭐, 내가 사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8).
그러니 나는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산다. 살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부디 우리 안의 주가 사시는 것으로 산다. 아니면 내가 무슨 수로 하나님처럼 살겠나? 어찌 원수를 사랑하겠으며, 나의 원수는 나로 못하게 하는 모든 질병과 나약함과 주저함과 억눌린 감정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이런저런 사연으로 쩔쩔매는 일일 것이나….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시 5:12).
오늘 시편의 말씀을 붙든다. 저는 나를 돕는 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나의 이 허접한 묵상글을 보낸다. 작가로 성공하여 지금은 나름 주목 받고 있는 신예 작가그룹에 있는 아이가 있다. 아이라 표현하는 것은 친구 딸아이로 어릴 때도 몇 번 봐왔다. 저 애가 글쓰기를 할 때 당돌하게도 자신의 수필을 곁에 아는 사람들로부터 모르는 이들에게도 강매하듯 주간, 월간으로 무작정 보냈다. 그리고 얼마씩을 받았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그런 이도 있는데 하물며 주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어제 나는 아이엄마에게 원하시면 아침마다 묵상글을 쓰는데 보내드릴까? 하고 물었고, 그런 물음 앞에 누가 싫다고 하겠나만 그러라고 하여 그러겠다고 하였다. 저가 다시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하고 그 가정이 주를 바라는 가족으로 다시 세워질 수만 있다면….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 하는 말이 어느 훗날 나의 고백이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히 13:6).
그야말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흉내라도 내면서, 나는 그저 하나님만 드러날 수 있다면, 똥꼬가 헐고 마음이 짓물러도 좋겠다. 목사 고시 때 두 번째 낙방을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어느 원로 목사님이 물었다. ‘다음에 또 도전하실 겁니까?’ 그때 나는 피식, 웃으며 ‘네, 아니면 할 게 없어서요!’ 하고 이듬해에 다시 고사장으로 갔다. 그때도 그런 심정이었다. 안 돼도, 평생 안 돼도, 그러면서 남은 생을 다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아니면 할 게 없다! 아이엄마가 아이와 오고 안 오고가 아니라, 그리 열어가시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나의 자세는 오직 하나뿐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3).
결국은 하나님이 하실 것임을 나는 이제 안다. 고로,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 5: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