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4편 / 내가 주를 자랑하리라
210905 주일
시편 64편
내가 주를 자랑하리라
시 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시 64:10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들어가는 말
오늘 시편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내용이다. 우리에게 악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악은 악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한다. 곧 우리의 비극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구하게 한다. 이에 ‘악인들의 악한 꾀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 정당한 보응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의 권리이고 의무다. 천국 백성으로 악한 세상에 살려니까 이 땅이 지옥 같다. 지옥은 우리로 천국을 더욱 사모하게 하는 것이다.
본문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1-2절에서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여 주시기를 간구한다. 3-6절에서는 악인들의 사악함에 대하여 주께 호소한다. 7-10절에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 모든 악으로부터 피하여 즐거워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1. 우리의 근심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어서야 한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시 64:1).”
늘 성경은 우리로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세상에서 저들과 같이 근심하면 저들처럼 ‘악한 방책’을 마련하려 하기 때문이다. 악이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으로 하는 근심도 있다. 고린도후서 7장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고 바울은 근심의 정의를 명확히 구분하고 시작하였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자, 그렇다면 엄연히 우리가 하는 근심과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게 되는 근심은 다르다. 그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의 특징을 바로 알면, 우리의 근심-세상적인 근심을 줄이거나 피하거나 경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여덟 가지의 특징으로 정리된다.
① 우리로 간절하게 한다. 무엇에 대한 간절함인가? 주를 더욱 바라고 간구함으로의 간절함이다. 우리로 심령을 가난하게, 온유하게… 주님이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살고자 하는 간절함,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간절함, 그리하여 천국 백성다운 삶을 꿈꾸고 바라게 하는 감절함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하시는 말씀 앞에 우리는 애가 탄다.
② 변증하게 한다. 이를 위해 앞선 믿음의 사람들이 일구어온 교회의 교리와 이 정통을 어디 함부로 무시할 수 있겠나? 어거스틴이 평생을 걸쳐 싸우고 칼빈과 루터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하였던 이 복음의 체계를 위해 바울은 또 얼마나 복음의 진리를 변증하였나를 살펴보라. 그저 안이하게 [줌]으로, [유튜브]로, [밴드]로 드리는 예배라고 해서 가벼운가? 주일을 헛되이 지켜도 대수롭지 않은가? 오늘 우리 신앙의 해이함이 극에 달했다. 설교는 축소되고 이벤트는 늘어가는 교회! 과연 온전할까?
③ 분하게 한다. 정령 우리는 분개할 줄 아는가? 모세는 자신에게 더하신 하나님의 십계명의 돌 판을 집어던질 정도로 분해하였다. 어찌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를 하나님이라 할 수 있나? 모세는 진노하여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출 32:19).” 예수님은 어떠하셨나? 우리의 거룩한 분노는 지켜져야 한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2-13).”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들에 대하여 분노해야 한다.
④ 두렵게 한다. 성경은 누누이 우리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진정 천국 백성이라면 이 땅에 현재 돌아가고 있는 모든 실정을 보며 근신하고 깨어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덩달아 스스로를 위하고 섬기는데 휩쓸려서는 안 될 일이다.
⑤ 사모하게 한다. 말씀을 사모하고 주의 인자하심을 사모하는 일은 우리의 당연한 권세이고 특권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이런 말을 누가 감히 당당하게 만유의 주, 창조자, 심판자 우리 하나님께 아뢸 수 있겠나?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119:81).”
⑥ 우리로 열심 있게 한다. 그 열심은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천국을 사모함으로 그 나라의 특징과 문화를 바로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당연한 반응이다. 소망이 있는데 열심은 없다? 말이 안 된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그러므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⑦ 벌하게 한다. 이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자신을 자학하고, 굶주리고, 괴롭히면서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들도 있었다. 수도원을 짓고 평생을 금욕과 금식을 일삼으며… 그러나 성경의 관점은 그런 게 아니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육신의 약함에 대한 역설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에 우리는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고 예수님을 닮고자 하여 스스로를 복종케 하는 것이다.
⑧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낸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란 서로를 돌아보는 일이다. 성경에서 ‘서로 문안하라.’ 함은 저를 살펴 주의 길 바로 가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그래서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0:7).” 그렇게 시늉이라도 내면서, 우리의 ‘근심하는 소리’를 주께 아뢰는 것이다.
2. 악을 상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시 64:2).”
악을 상대함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곧 우리는 그래서 주의 품에 숨는다. ‘나를 감추어 주소서.’ 이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하는 마음으로,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는 굳건한 믿음으로,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시 27:1-2).” 하고 주께 의뢰한다. 고로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3. 우리의 연약함을 주께 호소하는 것이 지혜다.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시 64:3-4).”
저들뿐이겠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악의 표적이다. 사탄의 공격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9-10).” 곧 우리의 모순된 점을 주께 아뢰며,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11).” 그럴 수 없음을 주께 아뢰며 절규하는 것이다.
4. 악의 속성을 바로 알 때 주께 피한다.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시 64:5-8).”
흔히 요즘 말로 괜찮아, 다 그렇지 뭐! 하는 따위로 자신을 둘러싼 악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저희는 굶주린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여기서 악의 속성은 ①서로의 격려에 악한 목적이 있다. 격려란 서로 용기를 주고 의욕이 솟아나게 북돋우는 일인데, 거기에 악한 목적이 있다? ②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한다. 올무는 남을 유인하려는 잔꾀다. 사냥을 할 때 동물을 잡는 올가미다. 한 번 시작하면 포기하기 어려운 게 악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술 한 잔 권하고, 담배 한 대 나눠 피면서 ‘인생 다 그렇지 뭐…’ 하며 그릇된 길로 이끈다. 그러면서 ③서로 말하길,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한다. 다시 말하면, ‘다들 그래!’ 하고 눈감아준다. ④이를 서로가 ‘묘책’이라 여긴다. 묘책이란 남다르게 교묘한 꾀다. 적당히 탈세와 절세를 혼용하고, 사랑과 연애를 뒤섞어, 남자와 여자가 구분이 없고, 아주 교묘하고 약삭빠른 재주가 묘책이다. 종교적 화합이니, 성소수자니, 심리적정서적 미약자니 하면서 죄를 희화한다. 부디 악에 속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5.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9-10).”
인생은 불합리하다. 이를 해결하려 종교를 찾고 그 중에 기독교를 믿기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예수를 따랐다. 명색이 저들도 제자라, 그런데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요 6:60).” 저들이 원하는 복음이 아니다. 의인 ‘욥의 신조’는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거였다. 이는 보기좋게 무너졌다. 예수 앞에 나오던 ‘제자들이’ 말씀은 듣기 어려워했다. 이적과 기사와 뭔가 이벤트를 바랐다. 그런데 생각하고 다른 것이다. 그러자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결국 우리 자신은 어떤가? 하나님만 바라고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과연 오늘 시편의 고백이 내 것인가?
나오는 말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지난주일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63:3).” 하는 고백으로 한 주간을 살았다. 정말 나의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귀한가? 욥의 고백처럼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신뢰하겠나?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이에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여 ‘내가 주를 자랑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