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다 먹어 버리라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계 10:9-10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 11:3
가끔은 길을 걷다가 양버즘나무를 보면 애처롭다. 나무에게 지상낙원이라면 숲속 깊은 산골일 터인데, 양버즘나무는 인간들의 도시로 끌려와 생의 최전방을 사수한다. 쩍쩍 갈라진 줄기에서 새순이 돋고 가느다란 줄기가 새로 뻗었다. 어느 것은 시멘트로 벌어진 틈새를 메운 것도 있다. 봄철에 가지치기를 한답시고 인간들은 아무런 지식도 배려도 예의도 없이 가지를 갈라치기 하여 한여름 내내 잘린 팔을 벌려 빈손으로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것도 있다. 버스정류장 한 편에 서서 묵묵히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매연을 마시면서도 맡겨주신 생을 다하는, 산 것들의 수고로움이 나는 경이롭다.
목사가 되고, 나는 복이 참 많다고 느낄 때는 이제 세상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된 것이다. 더는 안 믿는 사람들과 저들의 문화와 특성에 맞추어 이리 치이고 저리 볶이고 살지 않아도 된다. 유혹하는 것들도 많이 줄었다. 싫든 좋든 안 믿는 자들의 형편과 사정은 나름 인생의 낙이 없으니 술잔을 기울이며 또는 적당히 오가는 어떤 불의에 눈감으며, 어쩔 수 없이 또는 악의적으로 이를 기틀로 하여 관계와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 나는 종종 생각하기를 생의 최전방에서 서있기는 양버즘나무나 안 믿는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나 그 사정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믿음으로 사는 친구 몇이 있는데 저들은 직장에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어려워한다. 그렇다고 생을 모두 접고 산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가끔 누구와 통화할 때 나는 저의 생활에 대해 가타부타 뭐라 하기가 참 안쓰러울 때가 있다.
새벽 같이 출근하여 하루 내내 이 일 저 일로 치이다가 퇴근 후에도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그러느라 성경 한 줄, 기도 한 모금 제대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겨를이 없다. 그런 저에게 주말이란 지친 몸을 뉘어 그야말로 재충전을 해야 하니까, ‘코로나 시대가 낫다.’는 누구의 말이 뼈를 때린다. 전에 같으면 주일학교부터 오후 찬양집회까지 주일에 마저 몸은 고달픈데, 교회는 교회대로 숱한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니 믿는 자로서 마다할 수도 없고… 그러니 오늘의 비대면예배와 온라인 참여가 고단한 육신에게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 된 것이다. 뭐라 이르다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목사가 되고 매일 나는 교회로 간다. 종일 성전에 머물며 말씀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설교원고를 작성하거나 누구의 사연을 듣고 위하여 기도를 한다. 그러니 남은 생으로는 꿀을 빠는 셈이다.
여기서 오늘 말씀을 되새기면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9-10).” 하시는 말씀을 단순하게 받으면 이렇다. 꿀 같이 단 말씀을 글씨로 써서 여러 번 되새기기도 하며 누구에게 선물처럼 건네기도 한다. 가령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6).” 하는 말씀을 누가 싫어하겠나?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 하시는 말씀은 꿀 같이 달다. 여느 식당에도 걸려있는 액자 문구로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하는 욥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의 권면이 걸려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씀들이 ‘입에서는 단데 배에는 쓰다.’ 삶으로 살아서 이를 누리고 건사하기란 쓰디 쓴 그 어떤 경고의 말씀과도 같다. 그러니 오늘 시편의 말씀을 덧붙여 보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 우리가 뿌리내린 삶의 터전을 살펴야 한다. 복에 복을 더하시고, 들어오나 나가나 복을 더하시는 이가 감찰하신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 그렇게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5).” 이를 의식하고 굳게 서서 온전히 신앙을 지키며 산다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마음이 쓰이고 자주 염려가 앞서는 게 아들 때문이다. 10여 년 넘게 떨어져 필리핀에서 혼자 생활하다 들어와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또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느라 혼자가 된 셈이니, 얼마나 힘들고 외롭겠나… 생각하면 안쓰러워 목이 멘다. 나는 염려하기를 회계사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법무법인 몇 대로 손꼽히는 곳에 취직을 했다고 하자. 그야말로 늘 돈을 다루며 재무제표나 회계업무를 담당해야 할 텐데, 어느 믿음 좋은 회계사가 간증처럼 어디에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저의 삶이란 날마다 전쟁이었다. 그것은 일이 많아서 고단한 업무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여기는 선’의 기준 때문이다. 어쩔 때는 대놓고 이중장부를 은밀히 요구하기도 하고, 세무감사만 피하면 되는 요령을 터득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구조라는 것이다. 늘 이런저런 유혹이 따르고 그럴 때마다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될 수도 없고, 어디 깊은 산속으로 은둔하여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는 친구도 전에 말하길, 아이 하나하나 그 한 영혼을 두고 기도하며 돌본다는 것은 낭만적인 소리다. 교사의 사명은 접어두고 그저 하루하루 ‘오늘도 무사히’ 별 일 없는 날이 가장 복된 것이다. 아이를 마음으로 대하고 위한다는 일은 서로에게 불필요하고 학교당국에서도 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들 요령껏 대충 업무고가에 흠이 잡히지 않는 수준에서 적당히… 이제 점점 ‘선생님’은 사라지고 일개의 직업군으로서 교사직만 남은 셈이다. 그러니 나는 아들을 보며 또는 믿음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마음이 조마조마할 뿐이다.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될 소리지만 나는 아들이 보란 듯이 우수한 회계사로 합격하여 좋은 회계법인에 취업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가 없다. 다만 오바댜나 다니엘, 요셉과 같이 생의 최전방에서도 꿋꿋하게 주를 경외하는 사람으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위해서 기도한다.
특히 오바댜는 별로 알려진 게 없으나 다소 기이한 믿음의 사람이다. 당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단된 때였다. 저는 북이스라엘에 속한 인물로 7대왕 아합이 다스리던 때의 사람이다.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왕상 8:3-4).” 오늘날로 하면 행자부장관 정도였을까? 저는 왕궁 맡은 자로 가장 줏대 없고 악랄하며 마누라 치마폭에 놀아났던 악한 왕 아합이 다스리던 행정부에서였다. 아합의 처 이세벨이야말로 악하기로는 소문나서 믿음을 지키려는 선지자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이는 일을 하였다. 이는 자신이 들여온 다산의 신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신으로 섬기느라, 여러 곳곳에 산당을 짓고 백성들로 이를 하나님 대신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내각에서 오바댜는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신앙을 잃지 않았는지. 더욱이 선지자들을 몰살할 때에 저가 백 명의 선지자를 갈멜 지역 동굴에 몰래 숨겨주고 각각 오십 명씩을 어떻게 얼마 동안이나 먹여 살렸는지. 성경은 상세하게 기록해주지는 않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요셉만 봐도 이방 땅 애굽에 노예로 팔려와 총리가 되어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될 때에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믿음을 잃지 않았다.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도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서 고위직을 수행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악함과 불의와 우상숭배에 맞서야 했다. 그때에 저들의 마음을 한 마디로 찾아본다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곧 ‘뜻을 정하여’라는 데 있지 않을까? 주를 경외함이란 절대적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신앙이 아니면 지킬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신앙이다. 가끔 믿음의 친구들과 통화하며 요즘 어떤지, 하고 묻고 듣고 하다 나는 저들이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신앙을 지키고 산다는 것에 자랑스러워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복이 귀하다. 귀하게 여기는 만큼 아들도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누구는 목회를 단연 그 어떤 일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지만 ‘저쪽’에도 있어봤던 나로서는 안 믿는 자들과 생을 나란히 하며 살아야 하는 생의 최전방의 평신도의 삶도 어마무지하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를 지배하는 구조는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절대 선은 없다. 절대 악도 없다. 그땐 옳았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은 옳지만 그땐 틀리다. 완전히 성경을 무시하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한다. 선은 죽어도 선이고 악은 죽어도 악이다. 선과 악은 혼용될 수 없다. 하지만 요즘은 다들 믿는 사람들의 입에서도 ‘때가 어느 땐데’ 하는 식으로 ‘요즘 애들은 다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옅어지고 있는 듯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단일종교의 국가가 아니다. 다원주의신앙을 존중하는 나라다. 그러니 내가 기독교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해서 다른 종교나 문화를 공격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이러자니 그렇고 저러자니 그렇다. 이래도 옳고 저래도 옳다. 그런 가운데 진리를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니엘과 요셉과 오바댜와 같이 안 믿는 이방나라 내각에서 행정을 보고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겠나? 모르긴 몰라도 누구보다 철저하게 자기관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뜻을 정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을 것이다. 안 믿는 자들보다 두 배 세 배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을, 그러고 사는 나의 믿음의 친구들에게 나는 찬사를 보낸다. 저들은 가끔 나를 위로하며 목사로 그 사명을 다하는 일에 대해 높이 평가해주곤 하는데 마음고생이니, 누구로 인한 어떤 시달림이니,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있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저들과 견주어 상대가 안 된다.
목사가 되고 크게 유혹이 줄었다. 이제 안 믿는 친구들과 어울릴 일이 없으니까 저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연락을 피하기도 한다. 전에 같으면 술자리며, 피할 수 없는 여러 유혹의 손길들이 득실거렸을 텐데 더는 그런 시달림을 당하지는 않는다. 오늘 말씀에서 이를 묵상하고 있다면 너무 얕은 감상일까? 말씀은 입에 달 수 있으나 배에는 쓰다. 이를 갖다 먹으라고 하신다. 이는 목사여서가 아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바라시는 일이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신 4:32).”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날을 살아야 한다. 목사로 세우셨으면 목사로, 일반 사회생활을 하며 사는 사람으로 세우셨으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심겨진 자리에서 묵묵히 그 생을 다하는 양버즘나무와 같이 수령을 다하는 그 날까지 묵묵히 견디고 또 인내하며 생을 다해야 한다.
나는 가끔 산책을 하다 길가에 심기어진 나무들을 물끄러미 본다. 나무의 터전으로는 첩첩 산중 깊은 골짜기가 최고의 자리일 텐데, 베드로는 ‘이곳이 좋사오니’ 하며 아예 초막 셋을 짓고 거기에 눌러 살기를 바랐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그러나 이내 주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변화산을 내려오셨다. 그리고 저들을 현실 한복판에 두시며 지긋지긋한 일상으로의 소명을 주셨다.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14-15).” 것도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일이 턱하니 기다리고 있는 현장이었다.
어쩔 수 없는 악이 있고 우리로 도전하는 악이 있다. 구조적인 악이란 그 바닥이, 그 일이, 그런 데가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다. 정치권에서 무슨 올곧은 양심과 신앙과 정직을 바랄 수 있겠나? 오늘에도 보면 환멸이 끊이지 않는다. 연예계는 또 어떤가? 겉으로야 화려하지만 그 문화란 게 온갖 유혹으로 늪지대와 같다. 우리 막내네 조카아이 둘이 춤추고 노래하며 은근 연예계를 꿈꾸는데, 잊을만하면 성 스캔들에 마약과 환각과 온갖 잡문화가 난무하여 언제 어디서 누가 걸려들지 모른다. 장사를 하는 일은 또 안 그런가? 조금만 눈 감으면 적당한 식재료나 자재를 둔갑시킬 수 있고, 눈 먼 돈이 뒷구멍으로 암암리에 오고가는 게 서로 일을 더 수월하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희한하지만 관공서 앞에 퇴폐업소가 즐비하고,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며 눈 가리고 야옹하듯 시늉만 내기 일쑤다. 들춰보면 구역질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더 많은 믿음의 신자들이 연예계에 들어가야 하고, 정치판에 끼어야 하고, 관행으로 어두운 거래가 판치는 사회 곳곳에 사명감을 가지고 침투해야 한다. 저들마다 오바댜가 돼야 하고 다니엘이 요셉이 되어서 이방민족, 우상의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양버즘나무는 도로의 공기를 정화하는 사명을 다한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10).” 우리의 사명도 하나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시 11:2).” 이와 같은 생의 최전장에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3).” 우리로 주를 바라고 주를 경외함으로 맡기신 바 그 생을 다할 수 있기를,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 그리하여,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5-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