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은 순결함이여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계 11:12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
주가 지키시는 사람, 영역과 그 대상에 대하여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시 12:7).” 오늘을 살며 말세를 눈치 채지 못하고 주의 날이 가까움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아둔하거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일 것이다. 보면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8).” 어디를 들추어도 두려움과 경계할 것뿐이다. 이를 누구는 너무 병적으로 예민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 하겠으나, 과연 자신들이 보기에도 그저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말 정도인가?
오늘 계시록 11장은 어렵다. 그저 단순히 다시 읽어도, 성전은 하나님의 특별한 영역이다. 이를 측량하신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1).” 측량하시는 목적은 이를 보존하시고 지키시기 위함이다. 다만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2).” 그러니 성전을 지척에 두고도 이를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는 뭐라 이를 말이 없다. 마흔 두 달은 칠년 대환난의 절반이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능가하신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때마다 두 명의 증인이 있었다. 비록 고난의 베옷을 입고 견뎌야 하나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한다(3). 이는 마치 주 앞에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같고(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슥 4:14).” 그가 누구인지 어떤 자인지 명확히 지칭할 수는 있으나 그 중 하나는 언제나 ‘나’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떠하든지 주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계 11:5).” 곧 우리는 말씀으로 대적할 뿐이다. 반드시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11).” 우리로 주의 일을 담당하며 저들 한 영혼을 돌아보게 하심이겠다.
토요일에 오는 아이는 생각보다 성실하였고 나름은 책임감이 있었다. 아직 서로가 어려운 처지라, 나도 저도 서로를 어색해하지만 주께서 어찌 인도하셨는가를 알 것 같다. 다른 건 차치하고 약속대로 주일에 유튜브 라이브로 섬기는 교회의 예배를 보았다고 하는 소리에 반가움이 더했다. 하려고 하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였고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가 어떠한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서둘지 않았고 그리 하려 하는 것만으로도 주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었다. 엄마는 어떠했냐고 묻자 같이 드리지는 않았지만 엄마도 유튜브 방송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 같다고 하였다. 저만치 손바닥만 한 구름 한 장이 보이는가 싶더니 삼년반 동안의 기근을 해갈하는 비가 내렸던 엘리야의 때처럼, 또한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슥 10:1).”
나는 저 가족이 잃었던 믿음을 회복하고 신앙을 복원하시기 위해 먼저는 아이를 세우실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반드시 회복 불가능한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점령될 것이다. 이에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12).” 모두가 보게 될 것이다. 주의 영광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에 넘쳐나게 되는 것을,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고작 ‘이런’ 곳에서 ‘이런’ 일로 날품팔이를 하는 것 같으나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가령 남들은 어찌 이해를 할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 교회의 위치도 참 그 자체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선명하다. 우리 형편에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오게 하셨고, 그 와중에 창이 없어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 석 달만에 창이 가장 많은 방으로 옮기게 하셨다. 그리고 사년여 동안 서너 번의 공사가 진행되었고, 그때마다 교회의 일체는 아무 것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다. 특히 이번에도 대대적인 공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그리 보호하셨다. 내가 임대인이면 여기를 더 잘 활용하고 쪼개어서 서너 개의 방을 더 만들었어도 좋았을 텐데… 오히려 나는 미안하여 자리를 내주어야 하나 물었을 정도이다. 저들의 마음을 그리 붙드신 이도, 여기가 주의 성전임을 알게 하려 하심일 터.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모든 재앙의 때에도 주의 특별한 보호하심이 우리 안에 있다. 그러니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계 11:13).”
이를 현실적으로 어찌 이해해야 하나 싶은 것처럼, 이를 문자적으로 어찌 설명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성경의 주석을, 어디 검색을 통해 내용의 구체적인 의미를 뒤져보다 접은 까닭도 이를 억지로 푸느니 내게 주시는 바, 주의 이해 한 장이면 족할 거였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16-17).” 곧 우리는 두 명이거나 이십사 명이거나 주의 성전 뜰에 심겨진 감람나무와 같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그것으로 되었고, 아이를 돌려보낸 후 안도하였다. 하려하고 하게 하실 때에 나는 다만 나에게 맡기신 자리에서 묵묵하면 된다. 남들이 뭐라 하든, 형편이 어떠하든, 마치 노예와 같이 몇 날 며칠 몇 해가 흘러 무슨 일이 어찌 이루어질지 알 수 없으나 저는 다만 묵묵함으로 구원의 방주를 지었다. 늘 답답하고 불안할 때 하던 일을 멈추고 노아를 생각한다. 모세를 더듬어 보기도 한다. 막연하여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찬송과 영광을 잃지 않았던 다윗을 떠올리고 밧모섬에 갇혀 이 글을 쓰고 있을 사도 요한을 생각한다. 오늘 하루가 어떠할지, 앞으로의 남은 생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나? 나는 억지로 붙들려와 목사가 되고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주가 이루시는 일들을 생생히 목격한다.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아니 그러한 게 없었는데, 지금도 이래저래 누군가의 배려와 나름의 손길을 통해 이루어가는 일이었으니. 미미하고 미약하다 해도 더는 얕잡아보지 않는다.
예수님도 기도하시기를,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우리로 우리에게 맡기신 자리를 지키며 ‘다만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하시기를’ 위하셨다. 어제도 묵상하며 든 마음이지만 이 시대의 요셉과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오바댜가 더욱 더 맡기신 자리에서 묵묵히 여호와를 경외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고 할 때 저에게 세리 일을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셨다. 세리는 로마법에 위해 자기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면 삭개오는 더는 예전의 세리로 그 자리를 착복하고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 오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짐작컨대 저는 양심 바른 세리가 되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의 것은 주의 것으로' 돌리며 맡은 바 그 책무를 다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일로 저가 어느 특정한 사역을 염두에 두고 또는 인위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고심할 때 ‘있는 그대로’ 주가 쓰시는 일을 보라고 말해준다. 그러니 그 일이 어디 쉬운가? 믿는 자로 안 믿는 자 또는 믿음을 상실하고 자신의 완고함으로 사는 자들을 상대한다는 일은 더욱 무던히, 더욱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수밖에…. 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노아를 한심하고 우습게 여겼을까? 눈만 뜨면 이 좋은 날씨에 무슨 심판을 대비한다며 방주를 짓겠다고 날마다 저 고생인지! 노예로 팔려와 무슨 일을 저리 성실히 행하며 무슨 꿍꿍이로 책임을 다한다고 저러는지, 요셉을 볼 때마다 같은 노예끼리도 수군거리지 않았을까?
이처럼 묵상글을 쓰고 또 이것을 몇 번 되뇌어 읽고 다듬고 되새기며, 주가 더하시는 하루하루의 일이 참으로 기이하다. 때론 속상하고 때론 제풀에 시들하여 시무룩할 때도 있지만, 실은 엊그제 누구 다녀가고 괜히 자꾸 속상하고 마음이 안 좋아서 머리를 반삭을 하듯 잘라버렸다. 애도 아니고, 어떤 녀석은 그래서 몸에 문신을 하고 그때마다 피어싱을 하여 몸을 뚫는다는데, 그 심정도 이해가 갔다. 노아는 회의하지 않았을까? 모세는 지치지 않았을까? 다윗이라고 마냥 멀쩡했을까? 그때마다 저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나와 같지 않았을까? 나에게 묵상글이란 하루하루를 버티는 원동력이 된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고후 11:1).” 나는 바울 사도의 번민과 고뇌를 사랑한다. 이는 매우 인간적이고 솔직한 고백으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성경 안에서 주 앞에 토로하였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29).” 저는 자신의 약함을 숨길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 이는 세상과 다른, 매우 이례적인 일로 다들 자신의 열등감을 돈으로, 허세로, 우쭐하는 무엇으로 숨기려 하나 우리는 더는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 되었다. 곧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왜 그리스도의 능력은 나의 강함에서가 아니라 약한 데서 배양되고 자라서 나로 그의 능력으로 살게 하시는 것일까? 가끔은 그래서 처량한 저들의 신세를 묵상하기도 한다.
결국은 가족끼리 120년에 걸려 배를 만들고 있는 노아를, 돼도 않을 사람들을 이끌고 40년을 배회하듯 광야를 떠도는 모세를, 온통 그 세월이 광야에 숨어 사는 날로 점철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다윗을……. 그때에 저들이라고 마음이 녹록하니 좋기만 하였겠나? 실은 어제 토요일 모두가 집을 비우고 나 혼자 오후 내내 있으면서 조금은 서럽고 서운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시무룩하기도 하였다. 기껏 오전에 아이 수업을 하고, 하나님의 소망을 보고 기뻐한 것도 잠시뿐, 어디라도 좀 훌쩍 나갔으면 싶은데 아내는 동대문 집 일로 매주 토요일마다 서둘러 서울에 가고, 딸애는 이래저래 용무가 많고, 그럼 누구라도 연락을 할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도 시답잖은 말로 시시덕거리는 게 귀찮아서, 떠오르는 사람도 마땅히 없었고, 그러니 몸이라도 좀 성하면 시적시적 산책이나 다녀오겠구만. 멀뚱히 베란다 내 책상에 앉아 창밖으로 뛰어노는 아이들 소리와 선선한 가을바람에 시름을 달래기도 하면서.
누구에게는 처량하고 서럽기만 한 시간이겠으나 그것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욥 4:3-5).” 욥의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일깨우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게, 누구에게 일러 말하기는 쉬우나 내가 감당하고 지켜가야 하는 날은 생각처럼 녹록한 게 아니었다. 가끔 혼자 있는 친구에게 혼자 있는 훈련을 하란 말이 얼마나 잔인하였는가를 생각하였다. 외로움에 치를 더는 저에게 말로 위로하던 일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었나? 말로야 누군들 훈수 두기는 어려운 게 아니겠으나 이를 삶으로 살아서 자신을 무던히 걸어가게 하는 일은 어려웠다.
고로,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시 12:1).” 그러느니 사람들처럼 사람답게 사는 길로 가려는 이들이 늘고 있었으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4).” 말로야 청산유수라. 누구를 권면하고 위로하는 데 있어 주께서는 나로 하여금 직접 느끼고 행함으로 실천하게 하시려고 오늘도 다윗의 광야 굴로, 모세의 끝도 없는 광야 길로, 노아의 해도 해도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반복적인 노동으로 나를 놓아두시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5).
하는 말씀이 더욱 또렷하게 들릴 수 있도록. 아,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6).
이 귀한 말씀 앞에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것도 복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7).”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여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8).” 더는 희망이 없는 것 같다가도 주의 영역, 주의 사람, 그 성전 안에 있는 것으로 주께서 보호하심이었으니.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3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