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계 15:4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시 16:1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하지 못한다. 자신을 위하지 못할 때 남을 위할 수 없다. 그 영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부모도 자식도 부부도 모두는 남남이다. 우리가 주 앞에 설 때는 혼자 서야 한다. 물론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 16:3).” 하는 오늘 시인의 시선을 따른다. 우리는 무엇으로 즐거워할까? 자신을 위할 때의 만족보다 ‘땅에 있는 성도들’ 곧 나의 부모, 형제, 가족들의 존귀함으로 즐거워한다. 나아가 같이 주를 바라고 섬기는 ‘너’는 모두 성도다. 이에 ‘죄의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
누구를 보며 저의 오늘의 일이 결코 오늘에 일어난 일이 아님을 알았다. 저의 오늘은 어제로 인한 것이고, 어제는 그 어제의 어제로 이어져 저의 부모의 어제이고 그 부모의 부모의 어제였다. 가령 어릴 때 아버지의 폭력적인 성정과 그에 따른 어머니의 고달픈 ‘여자의 일생’을 지켜보며 자신은 절대 그런 삶을 살지 말아야지 했는데, 오늘의 자기 일생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데 슬픔이 더했다. 이는 끔찍하게 친정 엄마의 엄마가 겪은 일생과도 닮은 것이어서, 나는 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의 ‘죄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나의 아이도 또 그 아이의 아이도 다를 게 없는 생의 굴레를 살아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나’를 온전히 떼어서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한다. 실은 이 문제가 나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를 지나 창세기 3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 결국은 ‘하나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억울함에까지 다다른다. 친정 부모의 부모 역시 이혼인지 별거인지 하는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좀 더 들추어보지는 않았으나 오늘의 ‘나의 사연’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고달픔의 연속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를 어찌 해결해야 할까? 그와 같은 ‘죄의 고리’를 나의 세대에서 끊어야 한다. 결국 내가 주 앞에 온전하여야 한다. 이는 참으로 모질고 냉혹한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 앞에 ‘나’로 서야 하는 일이다.
언제가 누구 그랬듯이 저이는 신앙을 가졌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사랑하는 이였다. 한데 안 믿는 신랑과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랑하는 두 자녀를 두고, 만약에 저들이 모두 지옥에 가야 하고 자신만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면 자신은 매우 슬플 것 같다고, 그러느니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지옥에 가는 게 더 낫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결국 천국도 지옥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도 오해한 것이다. 나는 어제 누구와 대화하다 예전에 있었던 누구를 생각하였고, 그와 같은 우리의 미련이 결국은 죄의 고리로 이어지고 연결되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와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4).” 이 땅에서의 되풀이 되는 일생이… 참으로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하는 질문 앞에 던져진 느낌이다(3).
우리의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일 수 있다. 실제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저의 가정에 두 형제가 있었다. 어느 날 큰 아들이 자기 방에서 총으로 자살을 했다.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모는 남은 둘째에게 사랑을 더하며 슬픔을 달래려 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결국 자살충동을 이기지 못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오랜 침묵 끝에 아이는 상담사에게 입을 열었다. 어느 날 부모가 형이 쓰던 방을 자신에게 주었다. 물론 형이 쓰던 방이 훨씬 크고 전망이 좋아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부모는 둘째 아들에게 준 것이다. 한데 이 아이는 그 방에서 자살한 형을 떨쳐낼 수 없었다. 아이의 의문점은 왜 그 방을 자신에게 준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생일 날 저의 아버지는 멋진 상자에 든 총을 둘째에게 주었다. 이는 형의 것이었다. 물론 그 아버지 입장에서는 값이 제법 나가는 좋은 물건으로 성년이 된 아들을 축하하며 그 나이 때 남자라면 총 한 자루 가지고 싶을 것이란 순수한(?) 마음에서 선물한 것이다. 한데 아이는 자살한 형의 방에서 형이 사용한 총을 선물로 받고 ‘어떤 충동’에 날마다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하였던 어릴 때 자신의 소망이 보기 좋게 오늘의 결혼 생활에서 고스란히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누구는 장탄식을 하였다. 신랑의 폭언과 무책임함과 비인격적인 언사에도 묵묵히 살아야 하는, ‘아들만 없었으면’ 하는 탄식이 환영처럼 어릴 때 엄마가 ‘너희들만 아니었으면’ 하는 소리와 중첩되면서 저는 눈물을 쏟았다. 우리는 서로의 결명로 소망을 잃어버린다. 시인의 고백도 같다.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시 31:11-13).
나의 대적이 이웃이고 친구고 가족이다. 가까운 이에게 심히 당한다. 나는 잊어버린 바 되어 깨진 그릇 같이 되었다. 저들의 비방이 사방 두려움으로 나를 감쌌다. 나를 치고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 것 같다.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인데, 저를 사랑하면 할수록 더 큰 상처가 또는 고달픔이 나의 인격을, 영혼의 목을 조르는 것 같다. 아,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102:6-11).
그러니 누가 오자마자 운다. 자신의 외로움이 사무쳐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부엉이 같이 밤을 새운다.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은 신세로 종일 ‘나’를 비방하는 자들의 괴롭힘에 ‘재를 양식 같이 먹고 눈물 섞인 물을 마신다.’ 이는 모두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다.’ 오늘을 돌아보면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신 것 같다.’ 아, 자신의 날은 기울어진 그림자 같고 풀의 시들어짐 같이 더는 소망이 없다. 이와 같은 시편의 탄식을 우리에게 두신 것은 그 연결 고리가 오늘에도 여전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 싶다가도 자식을 생각하면 또 하루를 견뎌야 할 것 같고, 문득 돌아보면 자신의 친정 엄마가 살아온 일생이 그러했고, 엄마의 엄마가 오늘도 그와 같은 외로움으로 아직도 살아계시다는 데 시선이 가닿아 슬프다. 자신들은 벌레 같고 사람 같지가 않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22:6-8).
나는 저의 말을 듣다 숨이 막혀서 더는 참지 못하고 안정제를 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 어찌 사니, 하는 심정은 돌덩이를 가슴에 얹는 것처럼 무겁고 숨 가쁜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죄의 고리’다. 나는 문득 나의 부모가 짊어지셨을, 악의 업보를 생각하였다. 나의 부모의 부모 세대도 다를 게 없었다. 적당한 부유함이 나의 조부의 일생을 갉아먹었다. 실제 저는 평생을 술로 탕진하다 죽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생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많은데 악의 연결고리 역시 단단하여서, 조부는 일찍이 일제감정기와 남북전쟁을 겪으면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부역을 해야 했고, 그것이 저의 일생을 짓눌렀을까? 첩을 두고 본처와 자식들을 팽개친 채 평생을 술로 시름을 달래다가 죽었다.
하나님의 은총은 나의 부친의 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악의 끈을 끊으셨다. 아니었으면 오늘에도 여전하였을 숱한 미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자신을 위하는 듯 헛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전투적으로 모든 끈을 놓았고 오직 주만을 바람으로 오늘에 이르러 우리 자손들로 모두 주의 품에 살게 하였다. 요즘 우리는 가정예배 때 열왕기서를 읽고 있는데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뉜 저들의 계보는 악의 연속으로 고스란히 답습을 이어간다. 악에 악을 더함으로 기어이 하나님이 독생자로 이 땅에 오사 스스로 그 죄를 담당하시기까지 거듭된다. 하면 오늘에 이르러서도 저희나 여러 가정의 가정사에서 드러나는 악의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주를 부인함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못함으로다.
두 내외가 다 사역을 담당하면서도 그 부모로부터의 경멸과 수치로 잃어버린 소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명을 감당하고 있으니, 주의 은총으로밖에는 해결할 길이 없다. 아무리 이혼을 운운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지만 그러지도 못할 위인이라. 결국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들춰보면 어느 가정인들 이런저런 사연이 없겠나? 그나마 그 친정부모의 옅은 신앙이 저로 주의 사랑을 갈급하게 하였고, 어릴 때 그와 같은 눈물과 호소로 오늘에 이 사명의 길을 가고는 있는데, 그 길이 자꾸 부모 세대의 불신앙의 길과 중첩된다. 이게 아닌데 싶어 돌아보면 친정 엄마가 그러고 살았다. 신랑인들 다르겠나? 저 또한 불쌍한 영혼이라. 그 부모로부터의 믿음과 신앙의 계승이 없었으니 일찍 부친의 외도와 부재는 어린 마음에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기제를 작동하였다.
자신의 건강을 챙기느라 자신의 ‘아로나민 골드’는 살 줄 알면서 아내의 영양제나 자식의 지금 사정은 고려할 여력이 없다. 스스로를 위해서는 수십만 원하는 피규어 ‘건담’을 사서 조립하고 진열하고, 더욱 원활한 휴식을 위해 게임용 키보드를 무리한 값에 지불하고 살줄은 알면서 자식의 발단문제나 교육에는 돈을 쓰지 못한다. 그건 다 아내 탓이다. 무리하고 병적인 관여로 자식이 점점 더 나약해지기 때문이라며, 아버지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자식에게 따뜻한 시선을 건넬 줄 모른다. 말 그대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는 모르는 것이다. 기껏 안달에 못 이겨 아들과 같이 하는 시간이면 열에 열이면 역정을 내고 아이를 윽박지르며 끝이 난다.
함께 어디 외출이라도 한답시고 나서면 용산에 가서 자신이 좋아하는 ‘건담’을 고르거나 새로운 키보드나 더욱 향상된 마우스를 고가에 구입한다. 미안한 마음에 아들에게도 ‘건담’ 작은 것 하나를 사서 건넨다. 문제는 아들의 들뜬 마음이다. 돌아와 아빠와 함께 아빠가 사준 건담을 조립하고 싶은데, 저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당장 자신의 것으로 산 것을 조립하거나 자신을 위한 키보드로 게임을 실행해봐야 해서 문을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아들과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럴 시간도 없다. 하도 안달을 부려 같이 하면 짜증부터난다. 자신도 아버지로부터 받아본 적이 없다. 받아본 적이 없는 부재의 사랑은 줄줄도 모르는 빈손의 사랑이다.
듣다보면 모두 우리의 공통된 화두라. 나름은 잘해준다고 하는 일인데 저마다 자신의 ‘건담’과 ‘키보드’와 ‘아로나민 골드’가 우선인 것이다. 약한 아내가 왜 그 좋은 걸 챙겨 먹을 줄 모르는지, 저는 오히려 그게 답답하고 화가 난다. 그러면서 자신 앞으로 온 택배와 그 즐거운 ‘언박싱’에 기대에 차 퇴근하고 돌아온다. 집 안 꼴이 짜증난다. 하나부터 열까지 거슬리지 않는 게 없다. 밤 열두 시고 한 시고, 배고픈 자신을 위해 그 시간에 삼겹살을 구우라 하고 라면을 내오라 하고 자신은 흐뭇하고 즐거움으로 택배 상자를 어루만진다. 이 모든 이야기가 괴기스럽다. 실은 저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보고 배운 게 없고 익숙한 기억이 없어서 모른다. 누가 뭐라 하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일찍이 자신을 위하는 법 외에는 본능적으로 아는 게 없다. 자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폭식을 하고, 저녁 늦게까지 자기 방에서 자기만의 시간으로 만족하다, 문 밖은 짜증스러운 몰골뿐이다. 그 시간까지 아내가 어찌 집안 일에, 친정 일에, 아이 일에 얼마쯤 시달렸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늦게까지 아빠를 기다리다 뒤늦게 잠이든, 자식의 잠든 모습만 만족스러울 뿐 그 마음에 쌓여가는 경멸과 수치와 파멸과 능욕은 아랑곳도 않는다. 아이와 건담을 같이 조립해야 하는 일은 아내의 몫으로 서툴고 더디고 늘 미완성인 꼴에 자식도 엄마를 무시하기만 한다. 서로가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여전히 없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시 44:13-16).
우리 안에 수치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영혼 깊이 박힌다. 스스로도 발견하기조차 어렵다. 언제 난 상처인지, 누구 때문인지 기억에도 없다. 그런데 생인손처럼, 손끝의 거스러미처럼 자꾸 아프기만 하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74:10).” 누가 나의 원수인가? 그건 바로 ‘너’로다. 내가 사랑하는 ‘너’로 인하여 결국은 다 ‘나’ 때문이다. 그러니 입만 열면 나도 모르게 험담뿐이라.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9).” 그게 모두 ‘나’이었다. 그러니 우리로 두려워하고 경계하게 하는 것은,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2:20-21).”
그러니 언제쯤 숨을 크게 쉴 수 있을까? 나는 오늘 계시록의 말씀에서 이 한 구절의 말씀을 붙들고 희망을 바란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4).” 결국은 나의 문제고 내가 짊어져야 하는 자기 십자가인데,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 하나님 앞에 나를 세워야 한다. 누구에 대한 원망과 절규와 탄식으로 하나님 앞을 흐리지 말고,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나의 구주, 나의 사랑으로 그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한다. 자식도 신랑도 아내도 부모도 모두 뒤로하고… 아니면 이는 계속 악순환이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잠 18:7).” 남 얘기 하느라 정작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돌아가기를 되풀이 하고 있다.
그러니 어쩐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6:25).” 나는 누구에게 말하길, 백날 그 얘기를 되풀이 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모질게 끊어야 한다. 때론 잔혹하다 싶을 정도로 과감히 주만 바라야 한다. 이혼을 하란 소리가 아니라, 자식 일을 등한히 여기란 소리가 아니라, 언제까지 거기에 얽매여 끌려가듯 그 일생을 허비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단언하건대 부디 나처럼 살지 않기를, 하고 바라는 마음 그 이상으로 가까운 훗날 아들이 또한 그와 같은 아빠로, 나와 같은 심약함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은 불을 본 듯 뻔하다. 자신의 오늘이 친정엄마와 닮았듯이, 신랑의 오늘이 집 나간 부친의 그 삶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듯이… 말이 같은 집에 살지, 집 나간 저의 부친과 다를 게 뭐 있나? 나는 저이에게 숙제처럼 친정에 대한 글 한 편, 시댁에 대한 글 한 편 곧 그 부모들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해보라 하였다. 할지 안 할지, 안하고 못했다 할지, 처음부터 못한다고 안할지, 나는 솔직히 모른다.
다만 확신하건대 오늘 자신의 이야기에서 끊어내지 않으면 이 이야기는 자식에 자식의 이야기로 계속 이어져 내려갈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계 15:8).” 나는 이 말씀을 한참 동안 입에 머금고 생각이 많다. 주의 긍휼하심과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당해낼 수 없는 ‘죄의 고리’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1-2).
부디 저의 고백과 찬송이 우리의 것이기를. 그리하여,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중략)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3-6).
아, 이 고백이 나의 것이라면.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오늘의 이런저런 사연이, 그 참혹하고 모질기만 한 현실이 교훈이 되고 훈계가 되어 주를 송축하는 것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8-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