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7-8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 20:4
나름의 것을 준비하고, 의지하며 산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하시는 말씀 앞에서 오래 머문다. 저마다의 사연과 말 못할 괴로움을 안고 씨름한다. 여기서의 씨름은 둘이다. 하나는 자신과 혹은 그 상대와의 씨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씨름이다. 스스로 싸우는 씨름은 헛되며 결과는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하는 식으로 자신을 높인다. 하나 또 다른 씨름은 결국 절름발이가 되어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하는 삶이겠으나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사는 대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곧 우리의 ‘성화구원’이란 하나님과의 씨름이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4-25).” 우리는 기어이 하나님과 대면해야 한다. 이는 저가 홀로 남았을 때에 일어난 일이다. 의지할 사람이 없다.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외로움과 낭패 가운데 비로소 우린 하나님과 마주한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0).” 하지만 그 결과는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1).”
절름발이로 산다는 것은 이 땅을 온전히 활개 치며 사는 생을 포기하였다. 정치판에서만 그렇겠나만 연일 진실공방이 이루어지고, 이에 다툼은 끝이 없고 무력이 행사되고 전쟁에 휘말리는 나라가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개인과 개인이 진영과 진영이 나라가 나라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끝이 나지 않는 싸움이다. 내가 죽거나, 예수 재림이 이루어지거나 하기 전까지는 오늘에 이르러 이러한 날의 시작이 아니다. 예수님의 때부터, 그 이전에도 거듭되었던 일들이다. 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의 엄연한 약속이다. 어제는 새삼 ‘구원론’의 교리를 가지고 아버지의 설교를 들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하신 말씀과 같이 거저 주신 바, 이 구원을 얻은 데서는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다.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을 부모의 손에 맡긴 것처럼 순종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그러다 차츰 장성하여 성장하여 간다는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눈여겨 볼 수 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7-8).”
곧 우리의 옳은 행실, 순종의 삶으로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어 자신의 두 발을 의지하기보다 지팡이, 주의 말씀을 의지함으로 바르게 서는 일과 같다. 남들이 보기에는 불구이고 비루하겠으나 우리의 즐거움은 하나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4).” 좀 더 들여다보면 내 마음의 소원을 주께 아뢰는 게 먼저다. 그 계획을 주가 아신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이는 성경에 오롯이 나타나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3).” 하시는 말씀을 지팡이로 붙들고 선다. 이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이를 확신하는 것,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는 오늘 계시록의 말씀과 이어져 우리가 이루어가는 성화구원의 결과다. 이에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 ‘여수룬’이 되기까지의 영화의 과정을 이룬다.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사 44:1-2).
이 구원의 과정이 ‘어쩌다 어른’이 된 것처럼 어쩌다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엄연히 이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이 모든 우주, 삼라만상이 이루어지기 전에 성부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의한 계획이다. 이를 성자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7-12).
이를 행과 연으로 나누어 다시 읽고 묵상하는 것은 같은 교리, 신학적인 신앙의 믿음의 바탕이 바르지 못할 때 허튼 길로 끌려 다니기 십상이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면 목사 고시를 두 번째 낙방하고 ‘내 길이 맞나?’ 하고 깊은 우울에 빠져 있을 때, 누구의 임종을 지키며 저와 보낸 50일의 시간 동안에 ‘흔들리는 저의 구원의 확신’을 두고 주의 성령이 나로 하여금 들려주게 하신 말씀이 이 부분이었다. 우리는 같이 읽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을 살고 죽는 일이 이 놀라운 구원사역으로 비추어볼 때 얼마나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가를 새삼 알게 되면서 이를 주께 감사하며 같이 손을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나는 저이와 함께 할 수 있었던 50일간의 여정이 다시 또 떨어지고 떨어지다 끝내 목사가 되지 못해도 어떻겠나? 하는, 더 나은 것을 사모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곧 성령하나님은 이 구원을 적용하여 완성하신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3-14).
이를 바울은 연거푸 증거함으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8-30).
연거푸 사용되는 ‘미리’라는 부사는 ‘어떤 일이 생기기 전에, 또는 그 일에 앞서’ 이루는 일을 의미한다. 곧 오늘의 나, 이 몰골? 비루한 형편과 사정?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시달림?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이는 성령하나님의 일이시다. 막연한 우리의 결의나 목적으로가 아니라, 반드시 이룰 ‘하나님의 목표’다. 곧 우리의 구원은 허투루 그리 되어지다 보니 그리 된, 그렇고 그런 결과가 아니다. 아주 치밀하고 은밀하게, 낯설고 요란하게, 엉뚱하고 해괴하게 벌어지는 소요와 사태는 그 어느 것도 ‘어쩌다’ 그리 된 것이 아니다. 천사의 타락과 사탄의 존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어쩌다 실수로 넘어간 사소한 유혹으로의 죄? 그리고 궁여지책으로 부랴부랴 수정을 거듭하며 거덜이 난 구원 역사? …이는 모두 우리 이해의 한계다.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세계다.
실제 나의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다. 오늘에 불리는 이름에 앞서 두 개의 이름이 더 있다. 모두 그 이름의 의미로 삶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어느 점쟁이의 용한 수환이다. 어릴 때의 일이다. 것도 한자어로 손으로 기입하던 이의 뜻하지 않은 실수로 받들 봉(奉)자가 봉우리 봉(峰)자가 된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누가 아이의 이런저런 우려를 이름을 바꿔 어찌 좀 모면해볼까 하여 새로 지었다는 이름을 들려줄 때 나는 가만히 웃었다. 사람의 궁여지책과 그 어리석음이라니. 내 곁에 몇몇은 실제 이름을 계명하여 알려 오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저들의 이름이 낯설어서 예전의 이름을 저장해둔다.
야곱은 누구인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는 이름의 뜻이다. 이를 이스라엘이라 하심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음을 뜻한다. 그리고 먼 훗날 저의 영화로운 이름으로 여수룬이라 불린다.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사 44:1-2).” 그 이름은 ‘올바르다’는 히브리어 축소형이다. 명예로운 호칭이다. 장차 우리가 모두 본향에 들어갈 때 우리 이름이 새겨진 돌을 받고 주의 심판대에 설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장차 나의 이름이 어찌 불릴지는 알 수 없으나 천국에서 그 이름이 호명될 때 우리는 각각 자신의 알아듣고 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누구의 글이 카페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아이의 일기와 또 누구의 성경쓰기와 함께 저의 ‘시달림에 따른 글’은 마음을 어렵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노트북을 펼치고 말씀을 읽으며, 우리의 구원 사역을 되새기며, 누구의 임종에서 저와 나누었던 영광스러운 말씀을 떠올리며 부디 오늘의 저의 글쓰기가 곧 우리의 만남이 주의 영광을 바로 볼 수 있는 복된 경고, 참 심판의 재해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 65:10).
본래 우리의 밭고랑은 척박하고 메마르다. 이는 일상도 저주를 받은 까닭으로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겼던 이가 날마다 내 등골을 휘게 한다. 저로 인해 몸도 마음도 골병이 든다. 이는 처음 사람 이후 모든 인류가 짊어지고 사는 숙명이다. 남보다 못한 사이로 죽지 못해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이 때문에요…’ 하는 저의 눈물어린 고백이 가슴 아프다. 한데 이를 바꾸어 그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시고,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고 단비를 내리실 것이다. 비로소 우리들로 하여금 이 고달픈 시간을 다하며 견디는 것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시려고, 감사로 곧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저가 더하실 신앙의 꽃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시 65:11-13).
우리의 결론은 모두 하나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삼하 22:50).” 그리하여 바울 사도의 아름다운 진술과 같이,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2:15-17).
왜 우리가 말씀을 바로 알고 교리를 온전히 공부해야 하는지가 드러난다. 왜 믿는다고 하면서 이리 쓸리고 저리 끌려다니는지 알겠다. 성경은 엄히 일갈하셨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그런데 허튼 데 마음이 팔려 ‘저를 내 뼈 중의 뼈로 살 중의 살로’ 좋아라하는 결과로 주를 거역하였다. 이는 아담의 실수가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에 우리의 할 일은 분명하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 1:19-23).
새삼 구원의 경로와 그 과정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7-8).
말씀을 되새기며, 오늘 우리를 두룬 주의 군대를 상상한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14).”저는 결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실 것이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시 20:1-3).” 그리하여,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