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 22:24
맡기지 못하면 맡아서 살아야 한다. 내려놓지 못하면 지고 살아야 한다. 사람만 보면 미친다. 세상만 보면 마귀가 된다. 힘들어하는 누구에게 들려주면서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우리가 믿음의 영웅들을 부러워하거나 저들을 본받으려고 하지만 성경은 그리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어디에 모세를 배우고 아브라함을 따르고 바울을 닮으라고 하였나? 결국 저들처럼 살라는 소리도 아니고, 저들이 할 수 없는 중에도 믿음으로 맡기고 내려놓았던 것을 일깨운다. 어떻게 아브라함 같이 말씀만 의뢰하며 살 수 있을까? 앞서 노아는 그 믿음이 어찌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120년이나 방주를 지을 수 있었을까? 모세는? 다윗은? 바울은 어찌 그 모든 고난 중에도 주를 바라며 말씀으로 말씀에 더욱 굳건하였던 것일까? 저들의 영웅적인 삶을 따르라는 게 아니다. 그럼 그럴수록 그럴 수 없는 나 자신과 비교만 되어 의욕을 상실하기 십상이다.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믿음의 영웅들은 그 행적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 주를 바라고 주께 모두 맡긴 바, 주만 의탁한 것이다. 성경은 한 술 더 떠서 우리더러 하나님처럼 되라 이르신다. 예수님을 닮으라 한다. 그의 제자가 되어 그 길을 따르라 한다. 단적으로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십계명에 위배되는 것이 없는 삶이고, 예수를 닮은 삶이란 산상수훈에 걸맞은 삶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좌절한다.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어 실망이다. 그래서 고안하는 것이 하나님처럼 되려하기보다 하나님이 되는 것이 쉽다. 예수님을 닮고 그 길을 따르는 것보다 예수가 되어 사는 것이다. 스스로의 숭배로 자신을 우상화한다. 내가 곧 판단하고 결단하여 스스로의 생각대로, 그 의지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쉽다.
하나님은 이를 모두 물리치셨고 그리하여 모세가 모세다움을 거둘 때까지 40년간 미디안 광야에 두셨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될 때까지 25년간 저에게서 난 자를 없이 하셨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까지 험악한 세월을 살게 하셨다. 그리하여 저들로 하여금 기어이 여수룬이 되기까지, 그 영광의 이름을 얻기까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사 44:1-2).
누구와의 만남에서 저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다 그의 말을 멈추게 하고 나는 이와 같이 전하였다. 우리의 만남, 성도들의 교제는 서로의 기호나 성향, 뜻이 맞고 생각이 서로 맞는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아니다. 나는 저에게 이와 같은 사실도 고백하였다. 저와의 만남이 힘들다. 저의 이야기와 그에 얽힌 사연과 그로 인한 고달픔이 마음 아프다. 못마땅하고 싫다. 그럼에도 우리의 만남은 성령에게 주도권이 있다. 누가 말하길 넌 왜 꼭 그런 사람만 곁에 있냐? 할 때에 나는 이제 그와 같은 말을 훈장으로 삼는다. 주의 영광이 우리의 취향이나 선택보다 우위에 있다. 누구는 그런 나를 염려하지만 성령은 딱 그만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허락하신다. 또한 감당할 수 없을 때는 피할 길도 여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 뒤의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 곧 오늘의 이런저런 일이, 우리의 만남이, 어떤 어려움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로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되게 하심으로 ‘여수룬’이 되기까지… 곧 우리의 영원한 이름으로 불릴 그날까지 주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와의 만남이 어렵고 또는 어떤 이의 사연이 내게 너무 벅찬 가운데서 나는 녹아난다. 그때에 비로소 알게 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곧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지나갈 뿐이다. 그러할 때에 우리의 영광은 어떠할까? 그날이 되면,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이와 같은 다름을 두고 우리는 달려갈 길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에 오늘 시편의 손길이 나를 어루만지신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 22:24).
누구에게도 일러 그처럼 내 앞에서 울고, 하소연해봐야 다 같이 비루하고 내가 더 못난 것을 알게 될 뿐이다. 주님이 기다리시는 골방으로 가자. 그리고 주께 아뢰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반드시 주가 갚아주실 것이다. 이루시고 능히 다 해결하실 것이다. 가만히 그저 묵묵히 우리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인생이 어두울 때는 말을 할 때가 아니라 기다릴 때이다. 우리의 기도는 들어야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사야는 목청껏 소리친다.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사 5:30).”
신랑만 바라보고, 자식만 건사하며 이런저런 어려움과 서러움으로 누구에게 백날 하소연한들? 우리는 그럴 게 아니다. 그래봐야 소용도 없고 아무런 해결도 안 난다. 속이라도 후련할 것 같지만 그 신세만 더 처량해서 서러울 뿐, 누가 나를 알아줄까? 오늘 시인은 이를 두고 주께 아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6-8).
우리 스스로 저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그렇다 치고 그것으로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짐을 받게 될 것이니,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사 50:10).
우리에게 소망은 이것뿐이다. 곧 우리 인생의 어두운 시간은 오히려 주를 더욱 갈급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나는 누구에게 우리에게 맡기신 바, 이 귀한 사명을 되새기자고 하였다. 남들처럼 그저 남들 사는 것처럼 사는 자로는 사명자로 살 수 없지 않겠나? 자고로 주의 부르심에 대한 소명으로 이 길을 가고 있다면, 부디 지금의 슬픔을 뒤로 하고 조용히, 가만히, 잠잠히 주님만을 신뢰할 수 있기를.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우리는 어떠한가?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고 자기 주장대로 한다. 하여 그리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고 자기 나름의 수단을 동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우리의 처지는 전보다 더 어려워질 따름이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사 30:15-17).” 이거야 도무지 산 너머 산이고 엎친 데 덮친 격이며 설상가상일 따름이다.
누구와 누구의 이야기에서 나는 그 예를 잘 안다. 그래서 저들의 오늘이 어떠한지를, 누구는 결국 목회를 접고 정육점에서 고기 근이나 지어 나르며 당장의 생계를 꾸려가다 대장암에 걸려 투병중이다. 누구는 아내의 등살에 못 이겨 보험이니 다단계에 열을 올리느라 목회는 뒷전으로 미루다 지금은 어디 경비자리라도 찾아 헤매는 신세로 생의 뒷방을 삼았다. 주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러니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오나니, 부디 주만 바라자. 때론 광야 같아서 길은 없고 소리만 가득하여 조그만 풀벌레소리에도 길을 잃지 십상이라, ‘가장 달콤한 노래가 가장 슬픈 가사를 띈다’는 사실은 인생의 함의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우리는 무모하고 철딱서니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묵묵히 주만 바라야 한다. 주께 맡기고, 죽이시든 살리시든 오직 주만을 바라며, 오늘 내게 두시는 사명을 다하자. 저에게 일러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고 또 말할 때면 그게 다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 되어 돌아왔다. 또 누구 소식에 저의 말은 시적이었다. ‘마치 벼랑 끝의 사람들이 잡는 마지막 생명줄 같아!’ 나는 누구의 표현이 부디 나에게 붙이시는 이 한 영혼의 빛줄기가 될 수 있기를. 내가 아니라, 나 또한 같은 부류의 어쩔 수 없는 위인인 것을 알고, 우리가 함께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어제는 누가 돌아가고 오후께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의 취향이나 선호에 따라 친구를 사귀거나 누구를 만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좋아하고 편애하는 사람들과는 저들에게 ‘어디 두고 보자.’ 하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그야말로 내 앞가림도 못하고 사는 주제인데,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 22:6-8).” 하는 관계에 대하여 이 또한 누구에게 말한들? 저가 내 원수인가? 아니라, 나의 벗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하나님은 나의 선호나 취향 따위로 사람을 사귀는 일에 대하여는 ‘이제 그만!’ 하고 엄히 선을 그으시는 것 같다. 그리고 늘 ‘저런 친구’라. 나는 어제 누구에게 그와 같은 고백을 하며 허허 웃었다.
저로서도 듣기 민망하겠으나, 오죽하니 나 같은 걸 찾아와서 이런저런 소릴 하소연하는 저의 신세나 나나… 우리는 모두 주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로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 121:1).
자꾸 허튼 데 눈을 두고 마음을 기울이며 어떻게 위로를 좀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걸신들린 듯 기웃거려봐야…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2).
이와 같은 진리 앞에 이제는 안도한다. 예레미야도 이를 알았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렘 2:23).
그러니 백날 기웃거려봐야 소용없다. 주신 바 그 자리에서, 맡기신 바, 그 지긋지긋한 인간들과 씨름하며 저들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며 주의 권능으로 마주하고 대하며 주의 사랑으로 다하는 수밖에! 아니면? 정말이지 이혼이라도 할 텐가? 그런들? 그럼 좀 나아질 것 같나? 다들 그러느라 잠깐 정육점으로 누구는 보험이나 다단계로 눈을 돌려 처음 받은 바 그 사명은 뒤로 하였을 때 저들 인생의 말로가 참으로 처량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지나고 나서야 아차, 싶을 때는 후회뿐이라. 통회와 자복만이 남는 게 없다. 살자, 부디 제발 이제라도 남은 생을 바르게 살아서 주를 따르자. 죽으나 사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전 4:17).” 위기가 기회라고, 우리에게는 그때마다 곁에 보내시는 ‘신실한 아들 디모데’가 있다. 아니, 누구에게 우리는 디모데가 돼야 한다. 보냄을 받아야 한다.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가정에, 꼴도 보기 싫은 남편에게 또는 아내에게? 자식에게? 이 신물나는 직장에, 저런 인간 앞에.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노력의 결과로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게 아니었다. 모세를 봐도 그렇다. 가장 고학력에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끌어내리신 것은 하나님이시다. 저를 가장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자로 광야에 남겨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결국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그러는 저에게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2).” 하는데도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13).” 하는 것이었으니. 결국 하나님은 우리 안의 기름을 다 빼신다. 빈털터리로 세우신다. 자랑스러워하던 자신을 꺾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3:10).”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2).
할 때에, 우리의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욜 2:25-26).” 이를 오늘 본문으로 확신을 더한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
이와 같은 말씀을 오늘의 사명을 끝까지 잃지 않기를 원하는 우리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고로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23).” 아, 이 영광의 날을 고대하며.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7).” 이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시 21:23).
하면,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4).
이 모든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