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6-7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죄를 없이 하며 살 수는 없겠으나, 죄가 더할 때 주는 경고하신다. 이를 마음에 두고 주의 뜻을 따르느냐, 기어이 자신의 감정-의지대로 행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럼 우리에게 죄가 더함을 어찌 알 수 있을까? 감정은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얼굴에 비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 우울하거나 낙심이 될 때, 우리의 얼굴은 이를 숨길 수 없다. 밖으로 드러난 자신의 낯빛으로 가늠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의 얼굴을 자신만 못 본다. 하여 하나님은 이르시기를,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곧 우리의 양심은 얼굴을 드는 기운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처럼 어두운 얼굴이 있고 환한 얼굴이 있다.
이어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우리는 결코 선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하면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창 4:6-7). 그럼에도 기어이 죄를 짓고 저는 주 앞에서 쫓겨나며 말하였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13).” 곧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4).”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말, 이는 믿는 자들에게 뿐 아니라 안 믿는 자들에게도 익히 잘 아는 바이다. 죄라는 것은 주의 얼굴을 피하게 하고, 주의 얼굴을 떠나서는 어느 영혼도 살 수가 없다.
단적인 예로 저가 얻은 라멕의 악의적인 죄의 모습이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23).” 저는 마치 자신의 죄를 자랑처럼 여겨 객기를 부리듯 하나, 저는 잘 알고 있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24).” 이는 자신이 한 말로 그리 알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에겹고 처량하고 한심하여, 이를 또 역으로 더욱 악하게 굴며 극에 달한 괴로움으로 생을 다 채웠을까?
이와 같이 말씀을 가만히 음미하다 보면, 어찌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주 앞에 오라 하셨는지… 그 은혜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요즘은 자주 드는 생각이, 내 안에 두시는 믿음이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 안의 죄악 됨을 가만히 돌아볼 때 그런 나인데도 주가 사랑하시니 그 사랑 놀랍고 귀하기만하다. 나는 가인보다, 라멕보다 악하였다. 또한 죄를 우습게 여겼으며 함부로 대하였다. 이에 가만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하는 오늘 시편을 읊조리다보면 저절로 목이 멘다. 그럼에도 여전하여 죄가 내 앞에 엎드렸으니 언제 또 불쑥 일어나 나를 이끌려고 할지, 나는 주 없이 살 수 없음을 고백하며 이와 같은 믿음의 은총으로 감사히 주를 바란다. 누구를 생각하고 또는 교회로 보내시는 한 영혼을 두고, 우리는 같이 서로의 상한 심령을 주께 아뢴다.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내 안에 가시를 그대로 두시는 것이려니…. 때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의 슬픔을 두고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일일이 누구에게 나의 사정을 드러내고 알려 말한다 한들, 하여 오늘 시편은 또 하나의 자세를 일깨운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14).
묵묵히 주를 바라는 일이란,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겠으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하면 내게 주신 은혜는 무엇인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가령 명절을 앞두고 어떤 두려움이 또는 불안이 나를 엄습한다. 이는 속수무책이라 어찌할 길이 없다. 누구의 어려움을 두고 더는 믿음으로 이겨내라,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 또한 하나님이 두신 것이겠거니.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삼하 16:13).” 때로는 가소롭고 한심한 일이지만 다윗은 인정하고 있었다.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11).” 주가 아신다. 그리 두시는 일이다. 하면 ‘버려두라.’ 그러려니 하고 나의 나 된 것까지도 주께 맡겨드려야지 내가 어찌 이 문제를 극복하고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는 순응이지 자포자기가 아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12).”
오늘 이 어려움으로 주께서 선히 갚아 주실 것을 믿고 바라는 것. 누구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듣고 내 안에 덩달아 힘에 겨워하는 것을 두고도 나는 그리 여긴다. 하여 내가 나서서 감히 무엇을 어찌 하려 하지 않음으로 가인이 익히지 못한 순응으로 기어이 죄에게 내어준 자신을 돌아보며, 다윗이 더욱 농익어 주께로만 순응함으로 자신 앞에 놓인 죄를 다스리는 마음을 배운다. 실제 다윗은 압살롬에게 당한 분풀이로 시므이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저의 순응은 그와 같은 가소로움까지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내 코가 석 자라 해도 내게 오는 이를 막지 않고, 가는 이를 붙들지 않는다. 저가 설마 나를 보고 오겠나? 주께로 나아오는 것이겠다. 오늘도 누가 온다고 하여 그리 알고 준비하고 마음에 담고 있었는데, 피곤하여 집에서 쉬고 싶다며 어제 카톡을 하였다. 더는 억지로 무엇을 하려 하지 않는 것. 이는 자식의 일에 대하여도 설령 내 맘 같지 않을 때, 그저 주께 맡겨버리는 일. '내버려두라.' 곧 나의 권리를 주께 양도하고, 주께 내어드리는 일은,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 27:3).
이러한 마음이라 해서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한 주먹도 안 되는 시므이 같은 이가 쫓아오며 조롱할 때에 저는 정말 저를 상대하여 이길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또는 실의에 빠져 우울감으로 옴짝달싹 못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나를 못 견뎌하며 연거푸 안정제를 먹는다. 이상하지? 주일이면 더욱 시달려서 평소보다 더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여 어디론가 멀리 도망치고도 싶고, 그만두고도 싶고, 이제 그만 쉬고 싶기도 하고… 이러한 마음은 모두 사탄의 공격인 것을 잘 안다. 저는 어떻게든 나의 약함을 공격한다.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당해낼 수 없게 만든다. 가장 황당할 때는 설교 중인데 훅, 하고 끼쳐오는 어떤 불안이 또는 숨을 몰아쉬게 하는 고통이 나로 어렵게 할 때이다. 예배에 앞서 화장실에 들러 안정제를 한 번 더 먹는다. 설교 중에 마음이 흔들릴 때 눈을 질끈 감고 여기까지만 하고 죽자, 하는 심정으로 선다. 기껏 예배가 다 끝나고 밀려드는 어떤 공허함을 두고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그래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여서) 나는 또 숨을 고르며 안정제를 삼킨다. 모르겠다. 모두가 그런지, 나만 그런 것인지… 그러나 나는 이제 나의 처량함과 나의 감사함과 같이 공존한다. 모두가 주의 것이다.
그래도 계속 할래? 하고 은밀하게 묻는 소리가 있고, 가만히 어루만지시는 주의 손길도 있다. 어제는 공연히 시무룩하고 있는데, ‘아픈 아이’는 연거푸 성경을 필사하여 올리고 또 올리고 하였다. 분명히 그 마음이 어려워-엄마와의 갈등과 일가친척이 모였을 때의 불안과 어떤 불편함이 저로 자꾸 성경만을 쓰게 하는 것임을 잘 안다. 나는 뭐라 묻고 답을 할까 하다 우스꽝스런 이모티콘을 여러 장 날리면서 저를 응원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오후께는 초딩 6학년 아이가 잠언 19장 8절을 적어 보내고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다. 매일 하루에 한 장씩 읽고 그 가운데 한 구절을 마음에 두고 생각하여 생활과 연관 지어 글을 쓰라는 말에 그리 순응하는 것이었다. 비록 올린 글의 내용은 짧고 연관도 없고 어색하였으나 나는 그것으로 위로의 손길을 느끼었다.
내가 바라는 한 가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 영혼 한 영혼을 보내심일 테고, 나는 ‘아픈 아이’의 성경쓰기와 초딩 아이의 잠언으로 글쓰기로 주가 나의 상한 심령을 어루만지시는 것을 느낀다. '사모'는 그래서 우울증 약과 심장두근거림을 위해 먹는 약이 효과는 있는지. 가족 중에서 언니에게만 말을 했다는데 어찌, 이해는 해주던지. 같이 사는 신랑 목사에게도 숨기고, 친정부모에게도 알리지 못하는 그 심정은 어떠한지. 누구, 보이스피싱으로 수천만 원을 날리고 돈에 궁하여 닥치는대로 일하고 있는 저는 좀 어떤지. 어찌, 물어라도 봐야 하는지, 그래도 정신과 약은 잘 먹고 있는지. 그냥 모르는 체 하고 기다려야 하는지, 연락이라도 해야 하는지. 누구는 이번 추석에 시댁을 어찌 견디고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친정엄마의 일은 또 어떤지. 그런 그에게 누가 자살을 할까, 기도를 부탁하였던 누구는 또 좀 어떤지. 어제 주일에는 그의 안사람이 교회는 나왔는지. 생각이 생각을 끌어들여 시달리게 할 때에, 주의 위로란 가만히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에서 주가 더하시고 빼시고 막으시고 여시는 것을 신뢰하는. 헉헉, 숨을 몰아쉬다 가슴에 돌덩이를 서너 개는 얹은 것처럼 답답하여 안정제를 얼른 입에 털어 넣고도 주의 이름을 되뇌게 하시는,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남이라.’
이번 명절에는 당일에들 모여 예배 드리고 식사나 하기로 한 것인데, 것도 막상 날짜가 다가오니 마음은 어렵고 몸은 질퍽거린다. 그러니 이런 나의 심정을 곁의 가족이라고 알아주겠나? 딸애는 자꾸 이겨내라며, 새벽에 출발해서 가면 된다고 재촉을 하듯 몰아세우고, 아들은 냉정한 표정으로 한심하다는 듯 말도 안 걸고, 아내는 늘 또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상대도 않는 것을 두고… 서러워하는 내가 바보일 거였다. 저들이 어찌 알겠나? 누가 내 마음을 알겠나? 이 사정을 이해하겠나? 그래서도 주밖에 없다는 것! 사람 감정이란 오만 가지가 한데 뒤섞여 저 혼자 지랄염병을 떠는 것이어서, 자신을 짓누르는 짓거리를 어찌 내가 또 내 자신인들 이겨낼까. 어쩌겠나? 나는 멍하니 TV 앞에 누워, 졸다 자다 하며 무기력하게 시선을 잃고 있을 뿐이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저들 각자의 어려움이 득시글거리는 꼴이었으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6-27).
가만히 이 아침, 말씀 앞에 시선을 둔다. 가족에게조차 면이 안서고 뭐라 변명할 수도 없는 일에 대하여, 자신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서러움과 답답함에 나는 어제 불쑥 아내에게 물었다. 내 생에 이제 더는 안 되는 것일까? 감히 돌아보지만 내 맘대로 내 멋대로 살 때는 당당한 줄 알았다. 내가 가장 즐기던 것은 불쑥, 차를 몰고 나가 막히는 길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듣고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정처 없이 운전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요즘 오던 녀석이 자신의 유일한 즐거움이 운전하고 아무 데나 싸돌아다니는 것이라 할 때 내 안에도 어떤 그리움이 부러움처럼 일기도 했었다. 정말이지 나는 누구라도 만나 객쩍은 소리를 찍찍 내뱉으며 허물없이 지내는 것으로 서로의 사이를 가늠하곤 하였다. 늘 연애를 꿈꾸고 낭만을 바라며 아무 때나 휙, 하고 저수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으로 생의 즐거움이 전부였을 정도인데….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그러니 오늘의 내가 싫은가? 그건 또 아니다. 옛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것도 아니다. 그때에 좋았다는 것이 때론 낭만적으로 기억되나 나의 지긋지긋함은 그 길 위에 있었다. 오늘의 무력함과 내가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지금의 이 상황이 그럼 좋으냐?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다. 한데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그것으로 누구를 이해하고 저의 아픔을 위로하고 안 됐고 불쌍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으로 나는 이제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며,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될 줄이야! 이래저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가며 시므이란 같잖은 이에게 조롱을 당하면서도 주의 섭리를 인정학고 순응하였던 다윗처럼, 자신의 약함으로 도리어 주가 더하시는 은혜임을 고백하였던 바울처럼, 불안하고 어려운 마음을 성경을 필사함으로 이겨가는 ‘아픈 아이’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해보려 하는 새로 보내신 ‘초딩 아이’의 순응처럼, 우리는 다만 주를 바라볼 뿐이라. 하여,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1).
다윗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그리 되게 하시려고,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2).
주가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는 고통의 자리였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말을 한들 알아줄 리 없는 외로움의 자리에서, 지나가는데 흙을 발길질하며 조롱하는 시무이가 따르는 길 위에서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삼하 16:13).” 오직 주만 바란다는 건,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4).
어떠하든지 주를 의뢰함이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5).” 주가 나를 숨기시고 어루시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곧 천국에서의 삶을 예행하는 것이려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8).
순응이란 먼저 그리 행하는 일로 때로는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확률이 떨어지고 이치에도 맞지가 않는 일이기도 하다. 당연히 우리 안에도 의심이 들고 의구심으로 더욱 옥죈다. 할 때에 주께 아뢰기를,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9).
우리가 대체 누구에게 이와 같은 부탁을 그것도 대놓고 할 수 있겠나?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10).” 사람 다 거기서 거기일 때 주가 나를 영접하시리니,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3).
믿음이란 참으로 기인한 것이어서 내가 어찌 이를 믿는가? 알 수도 없고, 또한 말도 안 되는 것을 두고 내 입술로 주를 바람이었으니,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