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인생은 길고도 짧다. 어디서 생을 다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뜻밖의 소식에 우리는 놀란다.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떠나는 이도 있다. 누구의 죽음을 두고 호상(好喪)이라고도 한다. 복을 누리며 오래 장수한 사람의 상사(喪事)를 일컫는 말이다. 생(生)의 입장에서 상(喪)을 두고 좋다(好)하는 게 가당치않아 보인다.
오늘 본문과 같이 계보를 접할 때면 숙연한 마음이 든다. 그 가운데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았을 므두셀라의 생애도 고작 몇 줄이면 정리가 된다.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 5:25-27).” 너무 간단한 이력 앞에 생의 허망함이 느껴진다. 저의 이름에는 ‘인류의 심판을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이를 그의 부친 에녹은 듣고 계시를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24).” 저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데려가심을 받은 인물이다.
인생을 고해(苦海)라 하여 쓴 물, 괴로운 바다로 비유함이 옳은 듯하다. 누구라도 고난을 좋아할 리 없다. 한데 성경은 의외의 진리를 전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고난을 즐거워하라니! 대체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엇이기에 우리로 그의 영광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라 하는 것일까? 바울은 한 술 더 떠서 자기 몸에 고난을 채운다고 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돌아보면 주의 부르심은 때로 엉뚱한 고난으로 설명할 길 없다. 왜 굳이 이와 같은 고난까지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수록 설명되지 않는 고난을 겪기도 한다. 어느 것은 가까운 훗날에 곧 알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생을 다하기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때 우리의 길은 에녹과 같이 하나님께로 집중하게 된다. 고단에는 장점이 있다고 하면 어폐(語弊)가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고난으로 인하여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니…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일은 사람의 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생을 믿음의 여정이라 함은,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28-30).” 역경을 통해 무엇이라도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을 쌓는 것이라 하면, 예수님의 생애도 어찌하여 하나님의 시험으로 점철되었는가를 알겠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고로 오늘 우리의 어려움을 모르실 리 없다. 이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17).” 거기에는 목적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거룩하시게 하시려는 자와 거룩함을 입어야 하는 자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고단한 현실이 따르기도 한다. 그렇게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11).” 나 같은 죄인을 일컬어 형제라고 하시니 이 얼마나 감지덕지한 일인가. 그럴 때면 사탄도 덩달아서 나름의 지름길을 제시하며 당장의 어려움을 모면할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진다는 일은 반드시 각오해야 할 일이 기다린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유혹을 마다할 수가 없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사람의 계보를 보며 나는 문득 사람이 살 길을 돌아보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눅 4:4).” 이 간단한 진리 앞에 누구라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다들 나름의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산다지만 들추고 또 들추어 보면 결국 다 먹고 사는 일이다. 결국은 돈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의 역사를 통해 증거 되고 증명된다. 에녹에게 심판을 알리는 예언의 계시가 없었다면 그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을까? 노아의 방주는 홍수로 멸망할 땅에서의 예비하는 삶을 보여준다. 결국 므두셀라가 죽던 날 하늘과 땅이 열리고 모든 지면이 물에 잠기었다. 그의 생이 969년이었으니, 그러는 동안에 참고 또 참으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다 떠난 에녹은 365세를 살았다. 인생은 짧든지 길든지, 그 생을 다함으로 드디어 시작이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이 땅의 생을 다하기까지 이를 간직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복이다. 주의 부르심에 따른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알았다. 대부분의 일은 명쾌한 답이 없다. 나름은 열심을 다해 산다고 살았는데 허망하고, 어떤 일은 뜻하지도 않았는데 기쁨과 즐거움을 더한다. 그러니 소망을 갖고 산다는 게 얼마나 귀한 은혜인지.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우리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추석 명절에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의외이기는 하다. 어제는 늘 하던 대로 다음 본문을 찾아 설교원고 초안이랄 수 있는 뒷받침 성구들을 살펴보았다. 언제부턴가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하루에서 나는 중심을 잡는다. 필리핀 동생네 식구들이 온통 댕기열로 질병 가운데 있다는 소식에 마음을 졸인다. 추석날 평소의 동선을 벗어나 어디를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마음이 어려웠다. 어제는 또 누가 오기로 했다가 그만두어 준비해두었던 마음이 싱겁게 되었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이리 어려운가, 마음이 저 혼자 짓눌릴 때면 정신을 못 차리겠다. 덩달아 몸까지 아플 때면 서러움은 가중된다. 한데 이와 같은 어려움으로 주의 이름을 찾는다. 그리고 참 쉼을 꿈꾼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말씀을 앞에 두고 이미 이룬 줄 아는 것이 믿음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7:14).” 이러니저러니 해도 말씀을 앞에 두고 살 수 있는 삶이어서 복되다. 참 쉼은 늘어져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참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익히는 일이다. 천국에서의 생이다. 이를 맛보아 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땅에서의 어려움으로이다. 그만큼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비틀어놓았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려면 고개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뒤를 돌아보아야 알 수 있는, 기이한 일이 되었다. 좋을 땐 내남없이 주의 뜻을 상관하려 하지 않는다. 희한하지? 나 또한 이런저런 어려움에서 주를 부른다. 좀 괜찮다 싶을 때는 게으름이 엄습한다. 이에 성경은 우리 생의 연마를 강조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고전 1:30-31).
나는 한참 마음이 어지러워 수동적으로라도 말씀을 뒤적거리며 본문을 읽고 그에 따른 설교원고를 메모하였다. 시편 66장,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1).
이 시는 작가 미상이다. 그런데 8절에서 12절을 보면,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여기서 이사야 43장의 배경을 연상하게 한다.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 이는 앞서 2절의 약속이 성취됨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2-3).” 이사야가 활동하던 당시 남유다는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괴로움을 겪던 히스기야의 때이다.
여기까지 살펴보다 다시 66편의 시 첫 구절을 음미하였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1).” 우리의 즐거운 소리를 찬송이라 한다. 성경은 일러,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50:6).
살았다는 건 아직 그 숨이 남았다는 소리고 숨을 쉰다는 것은 호흡이 있다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찬송으로다. 어렵다. 힘들고 지친다. 때론 육신의 질병으로 또는 마음의 어려움으로 짓눌리고 까부라지기 일쑤다. 한데 그 어려움으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으니,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2:23).
이스라엘의 자손, 또는 야곱은 모든 믿는 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두려움이 우리로 주를 찬송하게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두려움은 엄연히 사탄의 역사다. 저의 간계다. 나의 고통이 99% 예기불안으로 인한 것임을 안다. 불안의 특성상 그걸 안다고 그걸 없이 할 수는 없다. 하면 그것으로 움츠러들고 죄와 타협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라며 주를 찬송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불안증을 싫어하고 이겨내려 하지만 굳이 또 그것을 목적으로 기를 쓰지는 않는다. 때론 그저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는 심정은 그래서 주를 바란다. 필리핀 동생과 그 가족을 생각하며, 그 나라의 특수하고 이상한(?) 체계를 싫어하면서 다만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구하는 것뿐.
결국 나는 추석에 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약에 취해 일찍 잠이 들었는데, 나 때문에도 아내와 딸애도 가족들 모임에 가지 않아도 되게 된 모양이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안 됐다고 해야 할지. 불행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의 이와 같은 덤덤함은 어느 순간부터 받아들임에 차츰 훈련이 되는 것이겠다. 애써 무얼 어떻게 하려 하지 않는다. 가령 어지간하면 병 낫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슬프고 어려운 일을 이겨내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 어히려 그것으로 주의 뜻을 살피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에녹은 어떤 특별한 위인이었나? 노아는 통뼈였나? 아브라함은 남다른 인간이었나? 어떻게 저들은 당대의 사람들과 다를 수 있었을까? 한 마디로 하면 주를 경외함이었다. 심판의 계시를 흘겨듣지 않았다. 떠나라, 하시는데도 먹고 살 궁리로 아브라함은 미적거리지 않았다. 노아는 일생을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갔다. 여기에서 인생이 짧고 길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나는 오늘의 계보와 같은 말씀을 접할 때면 숱하게 불리는 이름과 그 끝에 붙는 ‘죽었더라.’ 하는 끝맺음이 이상하게 명쾌하다. 이 땅이 주는 최소한의 위로는 끝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알면 알수록,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시 66:2).
설교원고를 준비하는 일이 이제 나의 생에 가장 유익한 시간이 된 것은 감사할 따름이다. 그야말로 감지덕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위인으로 이와 같은 호사,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복되다. 다른 그 무엇이 이보다 다 복될까? 뜻하지 않은 횡재? 그래서 뒤따른 재물운? 생명의 연장으로 몇 년을 더 즐겁고 복되게 살았다는 호상(好喪)? 풋, 그래봐야 모든 게 끝난다. 끝이 있다는 게 난 참 좋다. 그리고 영원히 끝이 없는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이를 에녹은 예비하고 남은 생을 주와 동행하며 살았던 것이 아닐까? 단지 이 땅의 멸망으로는 아닐 것이다. 어차피 몇 세를 살든 죽는다. 그걸 두고 씨름하는 일보다 허무한 것도 없겠다. 다만 두렵고 떨리고 설렘으로 다가오는 죽음, 멸망 그 너머의 영생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렘 20:13).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죽어라 해도 가난하다. 우리나라 제일의 갑부? 저도 세상 누구 앞에 서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재벌일 뿐이다. 설령 또 가장 갑부로 부유한 삶을 산다고 한들? 무엇이 더 중한지 알지 못하면 저의 부(富)가 다 무슨 소용이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이게 진정한 부유함이다. 그 입술에 찬송이 떠나지 않는, 몸은 죽겠고 마음은 어려워서 짓눌리고 현실은 팍팍하기 이를 데 없으나…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계 7:12).”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결론이다.
코로나 때문에도 그렇고 나의 모자란 연약함으로도 그렇고, 함께 모여 즐거운 한 날이 되지는 못한다 해도 이미 족하였다. 내 안의 족한 마음이 그 어떤 결핍보다 크고 더 강하다. 점점 더 그러하기를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시 28:1).
주 없이 살 생각을 하면 그 어떤 모든 끔찍한 연상을 더하고 더해도 그보다 더 끔찍하다. 하여 나는,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2).
주가 함께 하심을.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 이 얼마나 통쾌하고 유쾌하고 즐거운 일인가?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7).
남은 나의 생이 온통 그러하기를, 뿐만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 이르러서도 비로소 끝이 없는 날들 가운데서 주를 찬송하며 살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며.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