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전봉석 2021. 9. 26. 05:34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창 10:32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시 33:1

 

 

‘코로나19’ 확진자가 3천명대 중반으로 올라섰다. 사람간의 접촉이나 이동, 사적인 모임을 자제해달라고 아무리 설득하고 당부해도 소용이 없다. 경기도 어디, 한 공무원은 하루 종일 민원과 잡무에 시달리다 야근까지 하고 퇴근길에 술집마다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앉은 것을 보고 허탈하였다. 언제부턴가 저의 업무는 종일 코로나 확산을 막는 캠페인과 단속이 주가 되었다. 저녁 아홉시께 자신의 동네에 내려서도 보니 술집이나 가게마다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뭐라 해도 소용이 없는 일로 설마, 하는 방심과 나 하나쯤이야, 하는 이기심은 공무집행 따로 사람들의 관심 따로여서 더는 어찌할 수 없음에 기가 찼다.

 

일기 글 같은 어느 기사를 읽으며 나 역시 오늘의 아이러니한 현상 앞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의 과감함이 노아의 때를 연상하게 하였다.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을 나열하고 있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오늘과 같은 과거는 거듭되었음을 알겠다. 모든 시대마다 그러하였을 것을. 하여,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8-19).

 

이는 인류 역사가 다하는 그날까지 우리 믿는 자의 바람이요, 소원이겠다. 그 와중에도 대중들을 끌어 모아 세를 과시하며 어쨌든 자신의 지지를 호소하는 정치인이나 하다못해 좀이 쑤신 듯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 대하여,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하는 데서 우리 안의 그림자를 연상하게 된다.

 

아이 누가 또 글쓰기를 했으면 해서 토요일 오전으로 우선 시간을 모았다. 누구 일로는 마음을 쓰다 내 일 같지 않아 접었다. 보면 다들 이런저런 사연을 품고 있는데 듣다보면 대부분이 ‘변명과 꾀병’이다. 나도 저럴 텐데, 하는 생각으로 식겁할 때도 있다. 더는 가망이 없어 보인다. 어제는 토요일에 오는 아이에게 짜장면을 사주고, 나름 성실하게 잠언을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데 격려하였다. 누구 일로 여기저기 검색을 대신 해주고, 어디에 좋은 것을 찾아 권하였는데 그 반응이 시큰둥하여 싱거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와의 긴 통화, 또는 누구를 생각하며 안부를 묻는 일에 대해서도… 평소 내가 날 위해서는 잘 안하는 것을 하고 있을 때면 어리둥절하다. 자주 느끼는 일이지만 언제부턴가는 내가 선호하고 내 취향에 맞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평소 귀찮아 하고 날 위해서는 하지 않았을 일을 누구 대신에 하게 되는 걸 본다. 공통적으로 저들의 특징을 정의하라면 ‘변명과 꾀병’ 같다.

 

그렇게 더는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심정이 들 때 다음의 말씀이 영양제처럼 다가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 더는 그래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은 일에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신다. 아니, 예수님은 그러한 곳으로 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요 5:2-4).”

 

죄의 만성적인 특징은 그럼에도 늘 같은 데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다시 또 그런다는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신체적인 질병은 죄와 무관하지 않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5).” 인생의 반 이상을 병자로 그리 허망하게 기대를 품고 있는 저에게,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시는 질문은 조금 엉뚱하기까지 하다(6). 정말 나을 마음이 있는가? 하는, 가장 원론적인 물음을 우리는 모두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렇게 누가 자신의 문제로 울다 웃다 정신과 약까지 먹으면서도 다시 또 그 일을 반복한다. 누군(그게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보다 자신의 문제를 잘 아는 것처럼 떠벌이면서도 그 더러운 델 도로 가서 눕는 돼지와 토한 것을 도로 주워 삼키는 개와 같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우리의 학습된 변명은 자신을 두둔하느라 말씀을 헤아려 알려 하지를 않는다. 나는 요즘 들어 저들을 보면서(거울삼아 나를 보게 되는데) 같은 일의 반복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새삼 알게 된다. 들어보면 다들 할 말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들도 억울하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병 낫기를 원하냐? 하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저도 평생을 그리 살아온 터라,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어렵다. 누가 말하길,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든다고 하며 자신의 고질적인 문제를 한사코 외면하려 든다. 그렇게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그러니 나는 요즘 가장 두려운 말씀을 꼽으라면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막 4:24).” 하는 말씀이다. 인색함으로 인색함을 당한다. 외면함으로 외로움을 겪는다. 누구를 비판함으로 비난을 듣는다. 그러니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그래서 나는 자꾸 누구 일에 나의 생각을 더하지 않으려고, 비우고 또 비우려는데 그게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어느 오래된 병자에게 예수님의 두 번째 황당한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 저는 앞서 자신이 낫고자 하는 의사표현도 못할 정도로 학습된 무기력으로 변명만 가득하였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아무도 나를 돕지 않습니다, 남들처럼 내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좋겠는데 나에게까지 기회가 오질 않습니다. 운이 좀 따라주면 좋겠는데… 하는 식으로 저의 변명은 수만 가지 이유로 갈래를 친다. 누구 말이 아니라 죄다 내가 자주하는 말이고 자주 듣는 말들이다. 예수님도 다 아신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6).” 하고 물으시는데 저의 길어지는 말은 끝도 없다.

 

우리는 종종 어떤 한 사연을 두고 열 마디 백 마디의 말을 허비하게 된다. 그러다 주제와 상관없는 말로 정작 하고자 했던 말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한심한 노릇이나 몸에 밴 변명은 억울함을 조성할 뿐이다. 여기에서도 ‘~하였더라면’ 하는 식의 논리가 성립된다. 아니 그렇게 길들여진 세월을 살고 있다. 나는 이제 누구와의 대화에서 왜? 하는 질문을 가급적이면 피한다. 물어봐야 들을 말은 장황한 변명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다. 믿는 자로서는 더더욱 그러하여,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5).” 그럼에도 애써 늘어놓고는 하는 말의 대부분은 변명이고, 변명은 ‘~때문이고’ 이는 모두 ‘탓’이다.

 

심지어 오래된 병자의 변명에서처럼 고착된 꾀병도 느낄 수 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5:7).”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신의 병자 됨을 치적처럼 들고 사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지만 내 안에 있는 이와 같은 요소를 나는 인정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연민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남과 다른, 어떤 억울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탓이다. 하나님이 그리하신 일에 대하여 양 갈래로 나뉜다. 이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과 그래서 무의도식 하듯 하루하루 세월만 깔고 있다. 꾀병이란 적당하여 이겨낼 수 있는 것인데도 이를 핑계 삼아 고착화하는 탄식이다. 자꾸 누구 이야기로 돌리는 것 같은데 내 곁의 어려운 처지를 보면 실제 문제의식도 있고 위기감도 느끼면서 정작은 고칠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고 말한들 그 안에 의지가 없다는 것은 확연하다. 신기하지?

 

예수님은 이를 다 아시고 거두절미하여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 다음은 저의 몫이다. 여기서 두 가지를 꼽게 된다. 여태 서른여덟 해를 의존하였던 자리를 자신이 정리하여 들고 서야 한다. 다음은 걷지도 못하는 저의 빤한 상태(고착된 습관, 학습된 무기력 등)인 것을 스스로 과감히 깨고 걸어가야 한다. 다들 알겠지만 이게 결코 쉽지 않다. 이게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어떤, 몸에 밴, 익숙하고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게 나은 것 같은 죄의 본질을 떨쳐내야 한다. 다행히도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저는 그래도 말씀에 순종하였다. 이어지는 “이 날은 안식일이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예외로 치고(9). 그래서 나는 누가 하려고 하는 의지로만이 아니라 실제 허술하기 짝이 없더라도 그리 행하는 것에 높이 경이를 표한다.

 

글쓰기로 예를 들면 ‘어른아이’들의 경우 저들의 푸석푸석한 영혼 만큼이나 들을 때는 흥건하여 물이 가득 고이는 것 같은데, 이는 고비사막과 같아서 언제 또 다 말라, 열에 아홉은 하나둘 쓰다 만다. 아니 아예 시도도 않는다. 고질적인 병폐란 이런 것이다. 시도도 않고 스스로 물러난다. 그러니 서른여덟 해 병자로 살던 이의 순종은 그 자체로 가히 기적이다. 다들 거기에는 여러 변명이 따르고 ‘~때문에’와 ‘~하였다면’ 하는 변명으로 자리를 깔고 누웠다. 다시 또 같은 말을 늘어놓기를 좋아할 뿐 전혀 나을 생각은 없는 것이다. 얼마쯤 지나 무슨 일로 괴로워하다, 들어보면 전에 했던 이야기가 그대로다. 조금도 진척이 없다. 여전히 그 자리로 자리보존을 하고 누운지 '서른여덟 해'다. 평생을 학습한 방기다. 그 시간은 가히 위협적이다. 스스로도 어떻게 고칠지, 고치길 원하기는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고착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주님은 거두절미하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다. 

 

아이 문제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지만 실은 저도 안다. 신랑 문제로, 시댁과 친정 일로 어려움을 토로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묻지만 저도 다 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런데 늘 걸림돌은 ‘~ 때문에’ 하는 자기안의 오래된 변명과 ‘~이었다면’ 하는 몸에 밴 꾀병이 우리 영혼을 깔아뭉개고 있는 것이다. 조금은 가혹한 말이지만 자식이 뭐? 가정이 뭐? 사랑하는 사람이 뭐? 뭐가 그리 중한데? 저들이 나의 영혼을 구원해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저들을 믿게 할 수 있겠나? 어림없는 소리다. 나로 걷게 하는 것은, '너나 잘 사시라!' 여태 살아오고도 모르겠나? 서른여덟 해를 걷지도 못하는 자로 누워 있던 저로서는 저를 매일 그 자리로 데려다놓고 가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누군가도 마찬가지로 '그러려니' 하는 굳어진 마음으로 자포자기상태다. 아니겠나? 그런들? 설마, 물이 동하여 저가 진짜 제일 먼저 물에 들어갈 거로 여기며 기대하고 그러했을까? 찬만에!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변명과 꾀병에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간단하고 명백한 명령이 답이다.

 

오늘 본문에서, 다시 사람들이 늘어나고 흩어지고 모여 살고 저마다의 삶으로 분주하게 번창하여 가는 것을 본다.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창 10:32).” 그러니 어쩔 것인가? 사람들의 모임을 막을 수가 없다. 수천 명으로 늘어나는 전염병의 창궐이 하루하루 턱 밑까지 밀려와 위협을 가하는데도, 다들 학습된 불감증과 몸에 밴 문화에 젖어 설마설마하며, 오늘도 자리를 편다. 그리고 돼도 않을 마비된 영혼으로 자리보존하고 눕는다. 계절을 지나고 나이는 들고 하나둘 노인이 되어간다. 어느새 친구 입에서도 '슬슬 죽을 준비를 해야지' 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그러게, 어쩌겠나? 그렇다면 그리 살다가 죽어야지. 죽고 난 뒤에 저마다의 탄식은 '혹시나' 했더랬노라,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하면서. 

 

이를 우려하여 참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의 때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말씀은,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사 35:3-4).

 

말로만 그런 게 아니다. 실제 우리의 달라지는 영혼은,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5-6).

 

이와 같은 실감이 우리 삶에 나타날 것이다. 예수님은 그저 단순히 불가능한 일을 명하심으로 으쓱, 하신 게 아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실 땐 할 수 있으니까 그리 명하신 것이다. 이를 마치,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사 35:7-8).

 

이는 극소수의 일로 헤아리는 자가 헤아림을 받듯이 말씀을 의뢰하고 신뢰함으로 ‘미친 척하고’ 진짜로 벌떡 일어선 병자처럼,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요 5:9). 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할 있고, 눈여겨보면 우리 곁에도 그와 같은 이를 두셨다. 그러나 여전히 뭉개고 미루고 설마, 하면서 ‘탓’에 ‘~하였더라면’ 하고 신세한탄만 하고 있으면,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사 35:8).

 

별 수 없는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어쩌겠나? 죽은 자가 살아나 이와 같은 사실을 아무리 목청껏 주장한다 한들 믿음으로가 아니면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이에 이사야의 희망한 설교를 더 들어보자.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9-10).

 

이를 온전히 누릴 날이 다가오고 있지만 오늘도 더러는 맛보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였다. 더는 청산해야 할 빚이 없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바 되었다. 이를 백날 떠들어 알려준들… 사는 데 적당하였다. 오늘도 누가 이끌어 그곳에 자리를 펴고 누워 혹시나, 하고 주식장세를 살피고 어디 신도시분양권을 노리면서 노후타령이 어떻고 하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 같다. 그러니 어쩐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시 33:1).

 

주일 아침, 가장 단순하고 명료하게 주의 말씀으로 아멘, 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6, 8).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12, 20-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