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 11:9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서로가 너무 가까이 밀착할 때 사달이 난다. 우리의 책임은 주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가로막는 것 중의 하나가 너다. 너와 나의 사이는 적당하여야 하고, 이는 존중과 배려를 통해 여백을 둔다. 그리 여기는 까닭은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9).
우리로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한다. 서로의 일로 마음이 상할 때 비로소 주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믿음으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바라고 보지 못한 것을 이미 얻은 것으로 보고 걷는 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할 때 어찌 사람으로서 그 마음이 상할 때가 없겠나? 하여,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8).
돌이켜 자신을 주 앞에 내어놓으며 당최 감당할 수 없는 나의 나 됨에 대하여 주께 아뢰고 통회하는 일, 나는 문득 ‘의인은 고난이 많다’는 말씀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19).
내가 나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것도 기껏 말씀을 전하고 돌아설 때, 누구 일로 저를 위로하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난 뒤, 순간순간 밀려드는 ‘어떤 힘’에 좌충우돌할 때가 있다. 그래서 가끔은 아주 가끔은 손으로 만져보고 싶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때도 있다. 그런데 말씀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은 때로 외롭다. 이를 서로가 위로하려 하고 서로에게서 위로를 받으려고 할 때, 이런 사달이 나는 것이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3-4).”
서로 말한다. 같이 애써 수고한다. 탑을 높이 쌓아서 그것을 보고 중심으로 하여 ‘흩어짐을 면하자.’ 한다. 언뜻 보면 참 좋은 발상인 것 같은데,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6).” 하나님은 이를 막으신다. 이는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우리의 중심이 주를 중심으로 해야 하는 것을 알리신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45:5).” 누누이 강조하시기를,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18).”
누구보다 나는 내 자신의 의존형인 것을 잘 안다. 누구를 생각하는 데 있어 늘 도를 넘을 때가 그래서이다. 은연중에 사랑받고자 한다. 관심을 얻기 위해 참 많이 애를 쓰며 살았던 것 같다. 어릴 때, 아마도 초등학교 2, 3학년 때일까? 마을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각 가정에 수도가 놓이면서 쓸모없는 우물은 버려진 듯 널빤지로 막아두기는 했으나 가끔은 나만의 놀이터였다. 어린 나는 늘 그 속이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까만 어둠이 무서웠고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가 섬뜩하였다. 또는 마을 어귀에 산당이 있었는데 죽은 이의 혼백을 기린다며 주렁주렁 천을 널어놓은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 아이들은 멀찍이 돌아가 학교로 등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 열심히 뒤따르곤 하였지만 가끔은 한참씩 그 앞에 서서 검고 음습한 집안이 궁금하였다. 무슨 일로 마음이 상하면 우물 속을 들여다보거나 산당 곁을 떠나지 못하고 궁금해 하였던 기억이 난다.
두려움의 역설은 긍정적이면서 부정적인 면을 동전의 양면처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주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찬양하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문득 내 속의 우물을 생각하였다. 두려워할 줄 알 때 경외함도 깃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시 66:16).
어릴 적 아마도 그때 다니던 시골 학교에는 교문을 기점으로 교실까지 이어지는 길에 동물들을 기르는 축사가 있었다. 오리며 닭, 토끼, 염소 등이 있었는데 저만치 외따로이 단봉낙타도 한 마리 있었다. 등하교 길에 우리들의 과제는 동물들에게 줄 채소나 풀 따위를 들고 오는 것이었다. 더러는 과일도 들고 오곤 하였는데, 나는 가끔씩 단봉낙타 앞에서 저가 살았을 저기 어디 머나먼 사막을 상상하곤 하였다. 덩치는 커다란 단봉낙타는 커다란 눈만 끔뻑끔뻑 하면서 나를 쳐다보곤 하였다. 어린 나는 차마 무서워서 한 번도 손을 내밀어 저에게 먹이를 준 적이 없던 것 같다. 연신 입을 슴벅슴벅하며 침을 흘리고, 커다란 콧구멍으로는 마른 숨을 내쉬면서 킁, 하고 한참씩 먼 곳을 바라보곤 하던 저의 시선을 따라보기도 하였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에덴을 쫓겨나면서부터 어떤 그리움을 숙명처럼 안고 사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 가끔씩 다가가면서도 한 번도 가까이 하지 못하였던 우물과 산당나무 아래와 단봉낙타가 가끔은 그리움 같이 떠오르곤 한다. 마치 저것들은 우리가 서로 같이 있으나 서로 외따로이 외로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도 같다. 실은 나도 누구를 가까이 하는데 어려움을 겪곤 한다. 수더분하니, 특히 목사 되고 사람 좋은 것 같이 속 좋은 듯하나, 엊그제도 누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고는 상당히 친한 척 웃옷 주머니에 넣고 있던 핸드폰을 가리키며 전자파가 어떻고 심장에 좋고 안 좋고 하고 떠들어대는데, 사람들이 새로 타고 내일 때마다 나는 저를 모른 체 하고 싶었다.
우리 안의 어떤 외로움, 그 상실의 공간은 늘 채워도 채워도 채울 길이 없는 허기지는 마음과도 같다. 누구는 명품으로 허영을 채워 자신을 위하고, 온갖 동호회니 모임을 모아 어떤 소속감으로 이를 대신하려하지만 그런 게 다 그때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잘 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공허한 관계에 대해 나는 신물이 나기도 한다.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하고 저들과 같이 하려고 어쩜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며 살았던지. 누구라도 내게 말을 걸고 손짓을 해주면 그게 그렇게 큰 의미로 다가오곤 하였다. 지금도 그 버릇은 여전하여서, 나는 그래서 애완동물도 키우지 못한다. 정 주는 게 무섭다. 정들면 지옥이라, 나에게 인연이란 어제나 억제할 수 없는 집착이고 애착을 보였다. 그렇게 누구를 사랑하고 연애를 꿈꾸며 살았던 시간도 있었다.
오늘 창세기의 바벨은 그런 나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어떻게든 밀착하여 떨어지지 않으려고,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였던 사람들의 가까이 함을 하나님은 선하게 보지 못하셨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창 11:7-8).” 본질상 우리 안에 죄가 들어오고, 에덴으로부터의 추방은 왜곡된 관계를 선호하게 하였다. 서로를 의지하고 위하고 바라는 마음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였고 없이 하였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9).”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양 무리로 비유하시는데 혼자 있어도 위험하지만 같이 몰려 있으면 더 위험하여서, 그 안에 염소 새끼를 같이 끼워 넣으신다. 양의 특성은 가만히 있으면서 서로 압사당하는 것도 모르고 뒤엉겨 붙어 있기를 좋아하고, 염소의 특성은 내닿고 그 뿔로 치받기를 좋아한다. 양은 순진하나 미련하고 순수하나 어리석다. 그렇게 약삭빠르지 못하고 순덕하다. 하나님은 엄히 이르시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겔 34:8).” 하여 주님은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 하시며,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뿐만 아니라, 두 번 세 번 연거푸 다짐을 받으신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21:16).”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의 양을 먹이고 치는 일이다.
이를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17).” 나로 근심하게 하실 정도로 다짐을 받으신다. 누구의 어떤 일에 나서서 무엇을 도우려 할 때 나는 선한 의도였다가 나의 고질적인 외로움이 뒤섞이면서 괜한 집착을 보이거나 공연한 수고로 지레 지쳐 나자빠질 때가 있다. 늘 그런 나의 속성을 잘 알기 때문에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짐을 하고 또 주의를 하는데도 공연한 실망과 어떤 서운함에 저 혼자 몸서리치는 단봉낙타 같다. 가만히 고여 있는 우물 속의 어둠 같이 고요하다. 가끔씩 나는 지금도 내 안의 우물 입구를 막아둔 널빤지를 조금 밀치고, 야아-- 하고 소리치고 얼른 주저앉아 귀를 모아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
그렇게 누구에 대해 혼자 뭘 해보기도 전에 나는 나를 좌절을 느끼고는 하는데, 가족에게도 이는 동일한 것 같다. 다들 장성한 자식들이나 갱년기를 지나면서 호르몬의 과다분비로 남성화되는 아내의 성격으로 나는 종종 외따로이 이곳에 와 있는 단봉낙타 같이 뻘쭘할 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예전 같으면 차를 몰고 어디 멀리까지 무작정 운전을 하고 돌아다녔을 텐데 언제부터는 그것까지도 막으신지라, 웃기는 소리지만 그래서 설교원고를 쓰고 책을 읽고 누구의 글을 메모하면서 한 자리를 지킨다. 누구 일로 저에게 말은 안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나는 자꾸 주께 아뢴다. 이르기도 하고 푸념하기도 한다. 때론 이런 게 기도인가? 싶을 정도로 멀쩡하게 저에 대해 고한다.
그러는 동안 오늘 말씀의 샘의 족보와 같이 누가 낳고 누가 죽고 그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 같다. 그렇게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 11:31-32).” 아브라함이 역사 속에 등장하였다. 단 한두 줄의 생으로 축약되는 앞선 사람들도 저마다의 삶이 있었을 터인데, 모든 이야기는 모두를 언급할 수는 없다. 저가 어떤지, 어떠했는지는 하나의 이야기로 집약되어 우리에게 들려진다. 마치 오늘 시편처럼, 그 내용에 앞서 저에 따른 설명의 무게가 더 진지하게 다가온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죽고 싶을 정도의 모멸감 또는 수치심을 우리는 돌려 말해 외로움으로 또는 외따롭게 표현하고 느낌으로 순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치욕의 순간에 저의 외마디 비명 같은 시의 첫 구절에 나는 가슴이 저민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34:1).
어떻게 저는 자신의 그 끔찍하였을 순간을 주를 송축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일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0-41).” 숨겨진 키워드는 믿음이었고 그에 따른 증거는 순종이었다. 말도 안 되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어찌 그 말씀을 이행할 수 있을까? 다윗의 고백은 설마, 위선적인 것은 아닐까? 이어지는 주님의 기도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
수천키로 떨어진 사막 어디에서 온 단봉낙타는 나의 기억 속에 여전하여서 눈만 꿈뻑꿈뻑하며 입을 연신 슴벅슴벅하고 있다. 수천 시간의 거리를 두고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와 미친 척 하고 비루하게 목숨을 건지고 나와 숨을 고르며 기도문, 시를 쓰고 있는 다윗의 마음은 하나가 아니었을까?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시 34:3-4).
오늘 아침, 가끔은 입을 삐쭉 내밀고 울고 싶은 아이 같은 심정일 때, 어릴 적 저만치에 있는 어떤 기억들 한두 가지에서 나는 몸서리치며 외로움의 실체를 알지 못하나 똑같이 경험한다. 그러면서 주를 바라기를,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5, 8-9).
말도 안 되는 극한 마음의 상태에서 이처럼 평온하게 나의 영혼에게 들려주는 다윗의 고요한 음성이 단봉낙타의 순한 눈빛처럼 다가오는 것 같다. 곧,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