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도우소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창 21:1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시 44:25-26
말씀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창 21:2).” 모든 일이 되어지는 것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를 마음에 두고 귀를 기울여 그 뜻을 구하는 일에 일심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 분명한 진리 하나를 꼽으라면, 우리가 아무리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넓고 길고 높고 크시다. 그러므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그것, 그것은 말씀으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와 같이 나는 말씀 앞에 앉고 말씀을 끌어당겨 그 의미를 새기며 묵상하고 글로 쓸 수 있는 일이 복되다. 어제는 유난히 가슴이 짓눌리는 듯 숨이 차고 답답하여 힘든 하루였다. 어디가 좀 괜찮은가, 하면 도로 다른 데가 그렇고… 나의 몸의 연약함을 두고 일일이 열거하자면 그것으로도 한심할 정도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래서 더 열심으로 설교원고를 작성하였고, 아이를 오게 하여 같이 점심을 먹었다. 다니는 일터에서 사람과 어울리는 게 어려운가, 무슨 일로 녀석은 계속 횡설수설하였다. 점심을 먹고 같이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동안 무슨 일 때문인지 설명을 해주는데도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돌아가고 올라와서 잠깐 잠이 든 것이 한 시간은 족히 깊은 잠에 빠진 것 같다.
말이 되는가 모르겠으나, 나는 나의 약함으로 주의 일을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깊고 넓고 크신 뜻을 어찌 다 알까?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고 말씀이 묻는다(욥 11:7). 우리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8-9).” 곧 욥의 친구 나아마 사람 소발의 설명처럼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으시고, 스올 저 지옥구덩이보다 깊으시고, 내가 딛고 사는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시다. 곧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충만하심이 ‘너와 나’ 혹은 ‘우리’의 관계로 무엇을 이루시려고 하는지, 나는 종종 아이의 두서없는 말에서 나의 한계를 느끼듯이 주의 넓고 크김을 상상한다.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 저의 그 어쩔 수 없음을 헤아린다는 일은 그러므로 사명감으로가 아니면 감당이 어렵다. 성경은 일러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헤아림은 그저 막연하여서 그런가보다, 하고 마는 게 아니라 힘을 다해 주는 것이다. 마음을 주고 생각을 더해 주께 아뢰며, 같은 시공간을 나누어 그리 함께 여기는 것으로 온 마음을 다하는 일이다. 헤아림은 그 자체로 일인 것이다.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고 뭐라 말을 거들어 돕고자 함인데, 이는 실제적이며 구체적이어서 내 것을 그만큼 내어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하여 하나님은 우리 일에 관여하신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욥 5:9-11).
헤아림이란 결코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아이와의 대화는 피곤하고 그 의미를 같이 공감하는 일은 나름의 대단한 집중이 필요하다. 거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저의 한계를 이해하고, 그러니 내가 뭐라 하기 전에 저의 말을 충분히 듣고 공감과 지지를 보여야 하는데… 이게 실은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니어서.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는 그 충만하신 사랑과 은총으로 참고 또 인내하셨을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알 것 같다.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9:19-20).
욥과 그 친구들의 논쟁에서 주의 크고 높으신 뜻과 깊고 넓으신 사랑을 헤아리게 된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26:14).
저들의 진술로 어찌 하나님의 크고 넓으신 사랑을 알 수 있을까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감히 내가 어찌 주의 사랑과 그의 크신 뜻을 헤아려 알 수 있을까? 다만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나 내 곁에 두신 한 영혼을 이해하고 주의 사랑으로 대하는 일에서도 한계는 여실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그럴 때 바울의 진술은 큰 도움이 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4-36).
누구 일로 마음이 어지럽다가 또한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도 쩔쩔매다보면, 나의 나 됨이 약함으로 주의 사랑을 더욱 구하게 된다. 주의 은혜가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이를 알면 알수록 복되었다. 가슴이 답답하여 숨을 몰아쉬다, 어떤 불안이 또는 공포가 나를 엄습하기도 하면서…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낫고자 하는 데 몰두하다 보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내 코가 석 자라며 남을 멀리고 그리 핑계대기 시작하면 내게 두신 이 자리도 지키기 어렵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생각하기를 버티는 것으로 상책이란 생각도 든다. 무얼 잘해서가 아니고, 누구에게 뭘 어찌 마주 대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주시는 마음대로… 오늘 말씀의 서두에서처럼 하나님이 그 말씀대로, 말씀하신 대로 일을 이뤄 가시는 것에 집중하면 안다. 주는 사라에게뿐 아니라 하갈에게도, 이삭에게뿐 아니라 이스마엘에게도 공평히 사랑하신다. 이를 감당하는 것은 각자 저들의 몫이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다만 우리는 이를 알고 붙들고 의뢰함이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 103:17-18).
이처럼 가만히 말씀을 따라가며 위로하심을 얻는다. 가령 내가 누구의 일이나 아이의 일을 두고 이를 다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아이가 회사에서 있었던 나름의 억울함을 토로할 때 들어주는 일(특히 저의 병적인 감정기복과 그에 따른 충동적인 발언 및 행동에 대하여), 그래서 자신이 어찌 하였고 뭐가 어땠다는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으로 우선은 다다. 누구 또한 다르지 않다. 실제 보면 다들, 아프다. 성한 사람이 없다. 마음이 병들었고 모든 심령은 상하였다. 이때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있는 것, 저로 말하게 하고, 듣고, 같이 공감하는 정도이면 됐다. 듣다보면 짜증도 나고, 한심하기도 하고, 징징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화도 올라오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도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나도 그럴 것이고, 그런 나를 저도 주의 마음으로 받아주는 것일 테고, 내가 주의 사랑을 받은 자로 주의 은총을 안다면 이 또한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 수 있다. 무던히 또는 가만히 주가 말씀하신 대로 일 하시는 것처럼 그와 같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의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그리 생각하였다.
이는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1-12).” 곧 나의 미숙하고 연약함으로 주의 완전하심과 전능하심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난다는 바울의 진술을 알 것 같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나의 연약함을 연약한대로 놓아두신다. 그 사랑이 내 뜻과는 다르고 그래서 어그러진 감정으로 기도해도 다른 응답으로 답하실 때가 많으나, 그것으로 주의 뜻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의 만연한 죄로 인한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시 37:35-37).
악은 무성하여 모든 게 잘 된 것만 같지만 돌아서 다시 와보면 흔적도 없다. 하지만 우리의 온전함이란 평안으로 안다. 때론 힘들어서 몹쓸 생각도 들고, 주께 투정하는 마음도 들지만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나의 부족함이나 연약함, 부끄러움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나의 그런 허물을 덮어주신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6:8).
이 크신 주의 사랑 앞에 나는 몸둘 바를 모르나 평안하였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고, 한 것도 없지만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 은혜였다. 나는 요즘 부쩍 그의 사랑을 생각한다. 나의 약한 몸뚱이를 가지고도 주의 놀라우신 은총을 깨닫고, 누구의 어려운 처지나 어쩔 수 없음을 두고도 주의 크신 은혜를 생각한다. 나는 저와 저의 문제로 주의 사랑을 알아가고, 알려주고 싶은데 때론 이를 싫어하고 멀리는 것에는 별 수 없다. 나도 나를 강제할 수 없듯이 내가 누구를 감히 강제할 수 있겠나? 다만,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2).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여서 아브라함을 어찌 그처럼 사랑하시는지, 더불어 저의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까지도 돌보시고 위로하심이라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 21:17-18).”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하시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19).”
그러니 나의 죄와 허물이 가리어졌다는 것,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아, 내가 받은 은혜가 귀하다. 평안이란 안도함이다. 비로소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는 일이다. 주께서 나의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신다!
친구와 무슨 일로 통화를 하다 그때 그 시절, 그러고 지나왔던 날들의 부끄러움에 대하여 나는 다시 입에 올려 말하지는 못하였으나… 죄가 가려지고 더는 기억됨이 없으신 주의 은총 앞에 새삼 감사하였다. 친구에게도 말을 보태서,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과의 일에서 롯이 될 것인가, 오바댜나 다니엘이 될 것인가… 우리는 판단해야 한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그들 속에 살다가가는, 저가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 해도 그 심령은 상하는데 저들과 같이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 날마다 보고 들음으로 그의 의로움도 상한다. 예수님의 엄한 경고는 그런 뜻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저는 나의 말을 어찌 들었을까? 아이는 잘 이해하고 돌아갔을까? 누구는 일련의 사건을 두고 자신을 돌아보며 주의 도우심이 절실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였을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다만 오늘도 나에게 주신 하루 동안에…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시 44:5).
새 힘을 얻기를. 그리하여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6).” 하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7).” 주만 바라며 나아가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8).
비록,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20-22).
그러할 때에도 주를 바람이여.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23).” 주밖에 나를 의지할 수 없음을,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25).”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