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창 27:3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5
아이들이 요즘 시험 때라 평소보다 머리를 쥐어짜며 공부를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믿음도 자주 시험대에 선다. 어떤 일, 무슨 상황 가운데서 이를 어찌할까, 하는 문제를 두고 얼마나 주를 의지하는지 또는 자신을 의지하는지, 이 둘을 교묘히 섞어 얼버무리려는지. 평소와 다른 어려움은 우리로 머리를 쥐어짜고 마음을 조급하게 한다.
오늘 본문은 이에 따른 우리의 여러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축복권을 자신의 권력인 듯 행세하는 이삭을 본다.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27:4).” 이를 또 편애로 야곱에게 이르며 거짓으로 꾸며 축복을 가로채게 하는 리브가를 본다.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6, 13).”
이것이 거짓인 줄 알고도 능청스럽게 행세하며 축복을 가로채는 야곱을 본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19).” 다 늦게 돌아와 남은 축복이라도 바라며 원망하는 에서의 모습을 본다.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34).”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나이 들어 무력한 이삭은 두려워한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33).”
각각의 모습은 어리석고 부정하나 이를 정하게 하시고 이것으로도 주의 선한 뜻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그런 거 보면 다들 자기 생을 산다. 리브가의 편애 때문일지, 이삭의 그릇된 의식과 탐욕 때문일지, 야곱의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마음 때문일지, 에서의 자기과시와 안이한 미련함 때문인지… 어느 훗날 야곱의 입에서 탄식처럼 나온 ‘험악한 세월’을 살게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으로 인함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과 그 결과로 빚어지는 일이다. 더욱이 에서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는 은혜의 문을 막으시는 것을 본다.
그럼에도 나는 요즘 한 구절의 말씀을 오래 두고 묵상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하신 예수님의 말씀 앞에 이 모든 사람의 일이란 그 결국이 주의 손에 달린 것임을 되새기게 된다. 이 말씀은 무조건적인 것으로 심지어 어떤 경우에도 이를 막을 수 없다. 가령 평생 강도짓으로 살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 가운데 하나는,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저런 인간이 어찌 천국에 갈 수 있겠나… 싶은데도 은혜의 기준은 우리가 정한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에서의 경우는 나름 수고하나 그의 노력으로는,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우리가 우리 생의 어떤 선택의 여지에서 가미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노력으로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버지가 주신 자들로’ 곧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결국 하나님의 것으로 주께 주신 자들은 생의 막판에서라도 주를 영접하고 그 말씀을 지킴으로 기회가 주어질 것이고, 그 결과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어떤 일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시험대에 서서 내 의지나 노력으로 어찌 견디거나 이겨내려고 하는 일보다 그 자체, 은혜의 진가를 확인하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곧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삭과 리브가와 에서와 야곱, 각각의 모습이 우리의 실체인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반드시 뜻을 이루신다. 비록 그 일을 비웃으며 믿기지 않을지라도,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 18:10).” 우리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7:19).” 어떤 경우에도 변경하거나 되돌려 창세전에 계획하신 일을 수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삶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누가의 삶을 보고 그대로 뭐라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서로는 각자의 선택을 따라 살며 주어진 생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 이에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롬 9:9).” 이는 불변의 법칙으로 좌로도 우로도 바뀌지 않는 이치다. 각자 애매하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살아야 하는 생의 경우는 어쩔 수 없는 각자의 몫으로이겠으나, 그 결국은 오직 약속의 말씀으로 귀결된다. 이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롬 4:20-22).
곧 우리의 의는 이 땅에서의 업적으로가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존경하고 위하고 높이 평가하는 따위의 공로로가 아니다. 그것으로 구원이 좌우되고 은혜가 뒤바뀌지는 않는다. 에서는 결국 에서의 길을 간 것이고 야곱은 이내 약속의 말씀 가운데 그 궤도를 돌았던 것이다. 이는 무조건적인 약속의 결과로 아무리 수고하여도 은혜의 문이 닫힌 에서가 있고, 아무리 허물과 실수투성이라 해도 주어지는 은혜를 선회하는 야곱의 결국이 있다. 이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그래서 때론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조건적이기도 하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24).” 그리 말씀하신 이의 절대적인 주권이신 것이다. 아무리 이삭이 우유부단하면서 자기 탐욕으로 눈이 가려졌다 해도 저는 축복을 해야 할 자에게 축복을 바로 하였다. 리브가의 편애가 결국 두 아들 간의 반목을 가져오고 꺼지지 않는 불화의 불씨가 되었을지언정 장자 에서는 축복의 자격이 없었고 차자 야곱은 은혜를 받은 자였다. 이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 에서가 자처한 일이 아니다. 그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저의 안이함이 축복권을 상실한 게 아니다. 저는 애초에 축복의 대상일 수 없었다. 기구한 사연으로 기어이 험난한 세월을 자처한 야곱의 경우는 그 생이 어떠하였든지 '하나님의 것'으로 그 축복의 당사자였던 것.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겔 34:25).”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영원하며 확고부동하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26).” 하실 때에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고 저지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27-28).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누구로 인한 어떤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29).” 다만 주의 말씀이시다. “그들이 내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고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30).” 우리는 어떤 일에서 주를 알 뿐이다. 저를 믿고 의뢰할 따름이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안도한다. 에서는 결국 에서였고, 야곱은 결국 야곱이었다. 이는 주가 정하신 바이고 다른 결과를 낼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사는 동안에 그의 삶의 질에 대하여는,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시 50:1).
부르심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3).” 오늘 시편의 말씀을 앞에 두고 턱을 괴고 있다. 아무이 어떠하다 해도,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2).
이를 맛보고 누리고 사는 게 복이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세상이 부러워서 나 또한 시인과 같이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73:2-3).” 마음이 어지러울 때가 있다. 돈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이럴 때 턱, 하니 내로라하는 삶으로 텅텅거리고 싶기도 하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조금은 덜 궁벽하고 어려움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물며 주의 일이고, 주의 교회인데… 하는 씨름으로 입을 삐쭉 내밀고 하나님 앞에 투덜거리며 칭얼거리고 보채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말씀의 약속으로 아하, 하고 새삼 마음을 가다듬기도 하면서.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이보다 더 큰 은혜가 무엇이겠나? 내가 내세울 것이 무엇인가? 나는 주 앞에 서면 드릴 말씀이 없어 고개를 저을 뿐일 텐데도,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1:5).” 곧 이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8).” 결코 변개가 없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말씀이시라. 이는 내가 좀 더 나은 게 있어서 아닌 것을,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6).
고로 나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만 위로를 더한다. 새 힘을 얻는다. 이런저런 환경이나 상황을 보면 때론 이해할 수 없고, 다소 억울하기도 하고, 어떻게 이러실 수 있나싶기도 하여 서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렘 4:1-2).
주의 말씀은 엄연하여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겔 18:30).” 이를 듣고 두려워 떨며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 복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31).” 하시는 경고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주의 뜻을 살필 수 있는 것이 능력이고 주가 주시는 은혜이었다.
돌아보아 회개하고,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1).” 믿음을 바로 하여,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2).” 새 마음으로,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하루하루의 날이 거저 주어진 은혜로 살지만 거저 흘러가게 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곧 순종을 요구하시는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27).” 곧 우리의 행함은 주만 의탁하는 것이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9:1-2).
이처럼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오늘 일련의 상황을 주의 눈으로, 주의 마음으로, 주의 생각으로, 보고 느끼고 다시금 되새기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8:1).
그러니 내가 주를 바람이여,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
(50:4-6).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하심을 묵상하게 하신다. 그리고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7).
어떠하든지, 비록 리브가의 어리석은 편애가 불러온 화를 가지고도 선을 이루시고, 이삭의 옹색한 자기만족으로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신 축복의 계승은 이어지고, 야곱의 속임수와 잔꾀에도 주의 역사는 보존되는 것이었으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시 50:11-12).
이 모든 게 주의 것이요, 주의 주권과 권세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5).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특권이고 권세이며 영원히 잃지 않을 영광이 된다. 하면 주 앞에서 잠잠하기를,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21).
주를 참 사랑하는 일과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은 하나여서, 남들은 뭐라 하든지 우리는 주께로, 주 앞에서만 주의 약속의 말씀으로 씨름하면서도 굳건하였다. 그러니 행여 이제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2-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