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전봉석 2021. 10. 15. 05:32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창 29:3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 52:8

 

 

편집된 기억이 그리움이다. 어떤 이의 추억이든 기억은 왜곡되어 아름다움을 가장한다. ‘그때가 좋았는데…’ 하는 마음은 그래서 로마신화에 나오는 야누스 같다. 얼굴을 앞뒤로 가진 저는 시선이 앞뒤로 있으니, 앞으로 나아가려다 주춤거리며 뒤를 보고, 뒤를 보느라 앞으로 나아가기를 더디게 한다. 매년 1월의 의미는 야누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새로운 해를 맞으면서 기쁜데, 지나간 해를 그리워하느라 슬프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러한 게 아닐까? 누구의 사연을 듣다, 어떤 이의 기도 부탁하는 내용을 전화로 들으며, 또는 소망이 또는 슬픔이 동시에 나를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무슨 말 끝에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순간 그 이야기는 마음을 술렁거리게도 하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 이는 참으로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부질없는 짓이기도 하다. 좋아서 결혼을 했는데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나? 어느덧 앞으로 발을 내딛었는데 뒷걸음질 치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 누가 지나온 날을 그리워하는 것을 두고 나는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언제나 딛고 서야 하는 자리는 여기 이만큼, 금이 그어져 있는 정도의 <지금>일 뿐이다. 과거나 미래는 늘 ‘~ 때문에’ 좌지우지된다. 헛되이 또 무얼 바라기도 하고, 새삼 지나간 것을 되씹기도 한다. 듣다보면 저의 오늘이 왜 그랬는지 알겠다. 그 이야기는 앞으로의 생이 어떨지 가늠하게도 한다. 그렇다고 함부로 입 밖에 낼 소리는 아니다.

 

누구는 부유하면서 쓸 돈이 없는 사람이 있고, 누구는 많이 배웠으면서 번번이 인생의 굽이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누구는 밝고 명랑한데 툭하면 울고, 누구는 단란하여 행복할 줄 알았는데 우울증으로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생은 하루하루가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사는 게 아닐까? 앞으로 보여지는 얼굴과 저의 뒤의 얼굴이 서로 다르다. 다른 곳을 본다. 어쩌다 보니 나는 자주 그런 자들의 얼굴, 시선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는 실제 저만이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다를 게 없었다. 어제도 누가 다녀가고, 앞서 누구와의 통화에서 '어떤 이야기'를 듣다 기구한 저의 사연에 숨을 길게 내쉬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다들 시치미 떼고 능청스러운 얼굴을 하고 또 다른 얼굴은 숨기고 살아간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세월을 읽으며 문득 다를 게 없는 우리 생의 얼굴을 보는듯하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창 29:30).” 이 짧은 한 문장에는 무려 14년의 세월이 숨겨져 있다. 최소한 열네 번의 야누스 얼굴을 감추고 있는 셈이고, 그 곱절의 시간을 살아가는 형편인 셈이다. 사랑은 아름다우나 중국의 공갈과자처럼 그 속은 비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 일깨우고 있다. 곧 우리의 충만함이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 곧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여 사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값어치 있는 삶인지, 이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나는 우리에게 두신 충만함을 위하여도 누구에게 자주 글쓰기를 권한다. 이는 단순히 글을 쓴다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자기 혼자 자기를 오롯이 마주하고 앉을 수 있는 시간으로, 그 시간에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시는지를 그 깊고 충만한 시간을 알게 하고자함인데,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터무니없는 나의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바울의 깊은 영성은 저의 글쓰기에 있었다. 저가 말로다 또는 행동으로 활동하였던 사도였으면 이만큼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계화할 수 있었을까? 비록 거의 평생을 감옥에 갇혀 살았으나 그와 더불어 우리 성경의 교리는 저로 인해 정돈이 되었다. 저의 글쓰기-편지쓰기에서 유지되고 확장된 게 분명하다.

 

곧 지혜자도 말하길,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잠 8:20-21).

 

앞에 앉은 이가 나의 루틴을 물었다. 늘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물 한 컵을 마시고, 이를 들고 창가 쪽 내 자리로 간다. 불을 켜고 말씀을 끌어다 순서에 따라 정해진 곳을 읽는다. 읽고, 쓰고, 기도하며, 혼자인 것 같은 자리에서 동석자가 계심을 확인한다. 나는 저에게 무슨 말을 할까? 어떤 내용을 쓸까? 앞서 생각하거나 계획하는 것이 없다. 연애하는 사람은 할 말을 준비하지 않듯이 나의 글쓰기는 그때의 저와의 내밀한 시간이다. 글쓰기를 마친 후 묵상글을 보내게 된 계기는 서로 달라도, 몇몇에게(저들이 읽든지 안 읽든지) 성경 한 구절과 함께 편지처럼 띄운다. 그리고 교회로 간다. 늘 정해진 나의 동선을 따라 나는 같은 일을 수행한다. 억지로나 무엇을 바라고 하는 일도 아니다.

 

한데 어제도 앞에 앉은 이는 너무 뒤죽박죽 자신의 하루는 너무 정신이 없다고 푸념하였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하루 일과에 몸도 마음도 늘 피곤하다. 나는 저이가 들고 온 가방을 보고도 한눈에 알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것저것 두고 다녀도 될 것 같은데 에코백 가득 그 아구까지 물건이 흘러넘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일상은 이처럼 포화상태다. 혼자 앉아 글을 쓴다는 일은 사치스럽다. ‘그럴 시간’을 낼 수 없다. 그것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누구보다 바삐, 부지런하다. 다만 이걸 하면서도 저걸 생각하고 누구를 대하면서도 다른 누구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식한다. 다른 데 너무 많이 자신을 쏟고 살기 때문이다.

 

오늘 야곱의 일상을 보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사랑하는 라헬’ 그 하나를 얻으려는 데 부수적으로 드는 시간과 열정이 너무 많다. 마치 하루를 사는 데 드는 부대비용이 너무 많은 것처럼, 누구는 무얼 하나 이야기 하기 위해 온 우주를 들었다 놓을 정도로 주변 이야기가 장황하다. 아이에 대한 일만 해도 열에 일고여덟은 놓아두어도 될 일이다. 애쓴다고 애쓰는데 애써봐야 소용없는 일로 애한테까지 무시당하는 일이다. 그로 인해 밀려드는 감정과 피로감으로 과부화가 걸린 것이다. 거기에 신랑과 친정과 시댁과 그곳으로 파생되는 숱한 일을 저는 혼자서 감당하느라 쩔쩔맨다. 그러니 굳이 지출하지 않아도 될 돈이 허투루 쓰이면서 정작 생활은 쪼들리는 형국과 같다.

 

결국은 우려되는 아이 문제로 어디 큰 대학병원에서 발달검사를 받았던 모양이다. 무슨 검사에 수십만 원의 돈이 들고, 이를 또 진단하며 뭐라 한 마디 거드는 상담료가 어마어마하였다. 말을 하는 데도, 듣든 데도 다 돈이라, 그만큼의 돈이 어림잡아도 백만 원은 훌쩍 넘기고 돌아온 <소견>은 '아이들마다 다소 늦될 뿐'이라는 애매모호한 답변이었다. 그 소릴 듣자고 예약을 하고 설문을 작성하고 무슨 검사를 하고, 그 옘병을 떨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보니, 실질적인 일상이 오죽하겠나? 그러니 거기에, 거기마다 또 소모되는 감정까지 치면, 이거야 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 누구 탓을 할까? 내가 듣기에는 온 가족 모두 정신과 약이 필요하다. 조금은 진정을 해야지, 그러니 저이만 툭하면 운다. 서러워서 울고, 힘에 벅차서 울고, 자기감정에 못 이겨서 울고, 사는 게 너무 고단하여서 운다. 주님, 하고 불러도 아무런 답이 없는 것은 주님도 할 말이 없으신 셈이다. 뭐라 한들? 대체 왜 말씀 앞에 앉질 못하는 것일까? 주님, 하고 부르고는 주님이 말씀하실 기회도 주지 않고 아들 일에, 남편 일에, 조바심 치는 일들에 쫓겨 뭐라 하시는 말씀을 들을 새가 없다.

 

싱거운 소리처럼 들렸겠지만, 나는 들고 다니는 가방부터 정리 좀 하라고 일렀다. 나의 루틴? 개뿔, 나는 어떤 작업, 나의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일련의 정해진 프로그램이 없다. 그저 단조로운 동선이 새삼 감사하였다. 주께 다시 돌아오고 나의 365일은 한결같다. 보면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씨름도 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이의 경우를 두고 주께 구하기도 하지만 연연해하지는 않는다. 전에 누가 뭘 가져다주느라 주차장에서만 잠깐 들렀는데, 그것을 받으러 갔다가 저의 차 실내를 보는 순간, 알겠더라! 뒷자리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하였고, 옆 조수석도 누가 앉질 못할 정도로 이것저것 잔뜩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 운전을 하는 동안에 또 뒤섞일 테고, 무얼 꺼내느라 또 뒤섞일 테고, 그럼에도 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뭐라 좀 하니까, 어디 있는지 다 안다고 듣기 싫어하며 갔다. 이는 우리의 문제를 문제로 보여주는 아주 단적인 예이다. 야누스처럼 앞도 보고 뒤도 본다. 여기도 저기도 돌아볼 게 너무 많다. 

 

성경은 엄연히 우리의 정돈을 요구하셨다. ‘너희는 먼저…’ 하고!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앞서 뭐가 어쩌고 저쩌고 온갖 근심 걱정 다 접고, <그런즉> 하고 일러, 정리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우선하는 것과 나중 하는 것, 굳이 없어도 되는 일과 안 해도 되는 일에 대해서는 과감히 버려두면서. 이에 우리 믿는 자의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니 누군 삽질해야 하고, 장가들어야 하고, 소 다섯겨리 불린 재산을 건사하여야 하고, 다들 그렇게 저마다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들로 뒤죽박죽 엉망진창 난리다. 그러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주인의 천국 잔치에는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러니 죽어 거름으로나 쓸 것, 이를 어쩐다?

 

우리의 이 복잡한 삶을 정돈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첫째, 주님은 우리의 빛이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그런데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싫은 것이다. ‘몸에 밴 어린아이’의 일로 오늘도 부산하다. 해도 해도 끝도 없는 하루 일에 지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푸념한다. 그러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그러려면 어둠을 벗어야 한다. 설마 누구만 그랬을까? 나 또한 누구 못지않아 그때는 그렇게 친구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정신이 팔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고 일주일이 하루만 더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다 부질없다. 끊고 보니 죽고 못살 줄 알았던 순서대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저들에게 나는 그리 대단한 존재도 아니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좌우지간 불을 비추어 길을 밝혀야 한다.

 

둘째, 저는 나의 생명이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헛된 것으로 분주하게 살 때는 몰랐다. 무엇이 중한지, 무엇이 우선인지, 한데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 우리로 주를 먹고 살게 하신다. 말씀이 귀하면 뭐하나? 성경이 아무리 하나님의 존귀하신 말씀이면 어쩌겠나? 그게 내 영혼을 채우지 못하고 그 일상을 주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주와 상관없는 삶이란 저를 먹지 못함이다. 그래서 지혜자는 무엇이 전부인가를 알린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잠 8:35).”

 

셋째, 주는 나의 길이다. 곧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상은 다른 길로 돌아가는 꼴이니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 일 같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여행 길 같다. 엉뚱한 데로 들어서서 엉뚱한 것을 뒤적거리며 찾는 꼴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우리 안의 만족함이란 이것 외에 다른 것은 다 부수적일 뿐이다.

 

넷째, 그러할 때 주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아니, 평안이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주시는 데도 받지 못함은 양손 가득 쥐고 있는 게 너무 많다. 아들 문제로, 남편 문제로, 문제가 문제를 낳고 그것은 곰팡이 균처럼 삽시간에 번져 우리 마음을 문드러지게 하고 있는데,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그러므로 평안은 거저 막연한 어떤 느낌이나 낭만적인 어떤 기대가 아니다. 실제 이런저런 일이 산적하여 당장 앞길을 알 수 없는 처지인데도 순간 느긋한 것이다. 이는 주가 알아서 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의 곁에 있다는 것은 마치 주의 차에 동승하고 있는 것과 같아서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저가 나를 인도하신다. 곧 내가 쥐고 있던 핸들을 놓아드려야 한다. 운전석을 양도해야 한다. 우리의 자유의지? 젊은 때가 객쩍은 소리로 고상한 척 굴려하지만, 개나 물어가라 해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존심으로 허비하는, 증오에 찬 여인을 본다. 그러느니 용서가 편하다. 용서는 한 번으로 되지만 증오는 평생으로도 모자라다.

 

다섯째, 주님은 우리의 만족함이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어제도 누가 찔끔거리는데 그 삶이 서러워, 힘에 겨워서 그러는 것을, 이는 아무리 애써도 목마름이다. 허기진 영혼으로는 만족함을 누릴 수 없다.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일을 두고 이 무슨 헛발질을 해대는 꼴인지!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 21:6).” 받는다고 받으면서도 미덥지가 않아 조금씩 자꾸 덜어서 자신의 등짐은 어느새 보리새우 등껍질처럼 휘었다. 보리새우는 결국 자신의 등껍질에 갇혀 죽는다. 

 

여섯째,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은 자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미 다 끝난 일을 두고, 이제 나는 이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면 되는 것을. 다시 또 다시, 누구의 이야기는 전 주의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어제의 일을 오늘도 거듭하는 것이었으니, 아직도 등에 지고 있나? 하고 물어보면 영락없이 저의 등골이 휘었다. 어쩌겠나?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미덥지 못해 돈도 필요하고, 사회적인 친화력도 발휘해야 하고, 자식들도 건사해야 하는데, 자신의 기호나 취미도 즐겨야 하고… 그런 자의 실상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너무 바쁘다. 조금 뭐라 하면 간섭한다고 싫어하니, 어쩌겠나? 놓아둘 수밖에!

 

우리는, 아니 나의 하루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임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성경은 누차 일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는데, 이게 뜬구름 잡는 소리 같고 당장의 라헬이 전부인 듯 저를 위해서면 칠년이 하루 같다는 데야 뭐라 하겠나? 다들 보면 ‘생긴 대로 산다.’ 자기 고집에 겨워 산다. 뭐라 한들 들리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나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 하듯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자 하심을 얻었으니 하나님과 화평하자.’ 이를 누리자 하면, 나의 단조로운 시간을 ‘팔자 좋은 소리’로 치부하기 일쑤다. 가까운 이든 먼발치께의 누구든, 그래서 뭐라 일러준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이 놀라운 즐거움을 도무지 알게 할 길이 없는 것일까? 결국은 환난으로밖에는 소용이 없는 일일까? 갈 데까지 가서 후회가 또 슬픔이 아쉬움으로 생을 마감할 때에야 알아들을까? 그래서도 나는 다음의 진술을 사랑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것도 복이려니. 저 고달픈 생애도 결국은 주를 마주하는 일이겠거니. 부디 그러하기를. 주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처럼, 불가능할 것 같은 저이의 이런저런 오늘의 형편에 대고 외치고 싶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 52:8).

 

고로 우리의 가치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가?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