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전봉석 2021. 10. 25. 04:59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23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 62:1

 

 

잠잠히 하나님만 바란다는 것, 마음에 있는 여러 문제나 형편 사정을 두고 시시로 주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는 일은 복되다. 어려움이, 때론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울 때, 주를 나의 피난처로 삼고 사는 일은 귀하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 62:8).

 

돌아보면 인생은 참으로 덧없고 짧고 모두가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투성이었으니,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9).

 

한 줌 무게도 한 될 것을 두고 씨름하고 애태우며 그리 힘에 겨워서 쩔쩔매는 게 인생이라니.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서 겪었을 수모를 생각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일을 보면서, 그러는 중에도 오직 주를 바람이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이런저런 환경과 여건을 따지면 대체 이 일에 무슨 형통이 깃들까? 의아하고 답답한 심정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란 누가 뭐라 해도 그 너머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일이었겠다. 비록 현실은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20-21)” 늘 주가 함께 하심이란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23).”

 

먼저는 거짓을 멀리하는 삶을 생각한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잠 11:3).” 스스로 어찌 도모하여 악을 꾀하지 않았다. 곧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그러한 나를 주가 돌보시고 함께 하심으로 붙드신 것인데,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 상황에 끌려가면 보디발의 아내도 권세고 의지할 능력이었다. 노예로 팔려가 운신이 어려운 터에 나름은 좋은 기회였고 상당한 유혹이었을 텐데. 결국은 자신이 어떻게 해보려는 교만을 없이하는 게 중요하였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당장은 그것으로 힘을 얻고 뭔가 이룬 듯하나 곧이어 욕이 되는 원리다. 그러므로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옵 1:4).” 이 모든 상황 가운데 주를 바람이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1-2).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 어제 주일은 그렇게 한 영혼, 또 한 시간을 두고 주만을 바라게 하셨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에 대하여, 뿌린 대로 거둔다는 심음과 거둠의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잠 11:3).” 이는 주 앞에서의 일이었다.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왕상 3:6).” 우리가 주의 든 자로 산다는 일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7)” 우선은 겸손이었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8)” 다음은 주의 뜻을 헤아림이었고,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 선악을 분별하기 위하여 ‘듣는 마음’을 주께 구하였다. 이에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10).”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1-12).

 

축복의 원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모색하는 그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당장에 요셉의 처지를 볼 때 저의 형통함이란 게 그래도 누구의 종살이요, 어디 옥에 갇힌 자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자로 여겨지지만… 이후에 하나님이 저를 어찌 사용하셨는가를 바로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1).

 

무던히 주신 삶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이 복되었다. 시편 22편과 같이 69편은 다윗의 고난의 시로 대표된다. 한데 그 시를 소산님의 곡조에 맞추었다. 즉 백합화의 노래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일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실 때에, 공중에 나는 새와 함께 들에 핀 백합화로 예로 드신 것을 볼 수 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8).

 

곧 우리의 염려란 얼마나 허망하고 허탈한 일인가? 자, 요셉이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다 노예로 팔려갔다. 나름은 그런 중에도 정직하였고 성실하여서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었다 한들, 그래도 종노릇이요, 그래서 옥살이었을 테지만…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돌아보면,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7).

 

어떻게 나름 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염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공중을 나는 새가 말해주고 있었다. 들에 핀 백합화가 노래하고 있었다. 아무리 우리 스스로 애써 수고한다 해도,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9).

 

이 원리를 바로 알게 하심이 귀하였다. 극심한 고통 중에서다. 다윗은 이를 노래하였고 수천 년이 지난 오늘, 이를 말씀으로 나누면서 내게 더하시는 말씀이라 더욱 새로웠다. 한 아이가 예배에 나오고 누구는 이내 그 시간을 멀리하였다. 이런저런 환경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사탄이 하려는 일과 주께서 이끄시려는 일은 극명히 대조되는 듯하였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구원의 소망으로 주를 바랄 뿐이었다. 곧 우리 믿는 자의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같이 하게 하신 이 시대의 환경이 달라지는 일이었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잠 11:10).

 

고로 악을 어찌 이길 생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주어진 삶에서의 요셉과 같이 무던함으로 주를 바라는 삶이 귀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리하여 구원을 이뤄가는 일이란, 그리 요란하고 대단한 게 아니라 묵묵히 주 앞에서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11).” 곧 나를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건할 수 있는 것은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오직 주만을 바란다는 것은,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단 2:20-21).”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가며 말씀으로만 의뢰하며 주를 바라는 일,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잠 11:30).

 

한 영혼이 주 앞에 나오고, 저로 주를 온전히 알게 하시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참고 또 기다리시는지. 나는 누구와 통화하다 저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한탄하였고, 저절로 누가 제 발로 예배로 나오는 것을 보고 이 또한 내가 어찌 하는 일이 아니었음을, 새삼 주를 인정하게 되는 날이었다. 고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 62:1).

 

오늘 이 한 구절의 시가 어떤 의미인지, 살면서 사랑하면서 배우는 일이었으니,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8)

 

어떤 일에 무슨 꾀를 내기보다 주께 토하여 나의 마음을 직고하는 것이 복이었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말씀은 구구절절 나를 붙드시는 노래요, 찬송이 되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2).

 

이를 알 때에 현실은 아무리 어떠하다 한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3).

 

아무리 그러할지라도,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5-6).

 

이와 같은 찬송이 나의 남은 생을 힘껏 붙들어 주시기를. 그리하여,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7).

 

이를 앎으로 주 앞에서 당당하였고 주어지는 현실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서도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8).” 주께 나의 마음을 수시로 토하는 것.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