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창 42:8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어떤 일, 도무지 요지부동인 일을 두고 씨름할 때 자주 이 말씀을 되뇌게 된다.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이는 예수님의 믿음으로 그리 알고 섬기셨다. 동시에 나에게 두시는 마음으로 그리 여기며 주께 맡기기를 바라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씀 뒤에,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마치 보란 듯 실패를 증명하시는 셈이다. 곧 나 또한 이렇게 하면 되겠거니, 하였던 일들이 보기 좋게 나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하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하는 그 의미는 선명해진다.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 있다. 결국은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
우리로 함께 하게 하심은 그리 하게 하신 이로써 한계가 있다. 내가 어찌 더하거나 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나는 누구는 이를 알아보고 누구는 이를 알아보지 못함을 두고 묵상하게 된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창 42:8).” 어떤 일, 누가 누구를 알아본다는 것, 이에 어떤 어려움은 누가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들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후회하게 한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나는 여기에서 누구와 누구의 어떤 갈림에 대해서는 명확히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만 오늘 시편의 노래로 그 의미를 되새길 따름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우리 안의 어떤 만족은 둘로 나뉜다. 한 부자 농부가 있었다(눅 12:16-21). 저는 나름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였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19).” 이와 같은 만족은 자기만족으로 스스로 후회 없다고 여기나 한 치 앞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20).”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의 생명조차 주관하심이 누구에게 있는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21).” 실제 우리의 단면이지 않던가? 믿음이 좋다고 여기는 자나 어리석어 이를 알지 못하는 자나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표면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곧 우리를 애굽에서 이끄시고 광야로 훈련하게 하심은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역사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부여된 인생행로를 알게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와 같다. 더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세속화된 우리 삶의 습성을 제거하기 위해 광야도 허용하신다. 이에 주의 자녀가 된다는 것, 곧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일은 저들을 맞서 싸워야 하는 삶이다. 가난안에는 예닐곱 개의 부족과 삼십여 명의 왕들이 있었다. 곧 오래 전에 이미 터를 잡고 그 안에서 서로 왕 노릇하는 우리 안팎의 주류가 있다. 이를 맞서 싸워야 한다. 그 단적인 예로 우리 앞에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었다. 오합지졸과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에게 여리고는 난공불락과 같다. 한데 하나님의 전술적인 방책은 다소 엉뚱하시다. 하루 한 번씩 성을 도는 것이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크게 함성을 지르는 일이었다.
앞서도 가나안을 정탐하고 요단을 건널 때에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두고 하나님의 전술은 어이가 없었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수 3:8).” 출렁거리는 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뭔가 어떤 조짐을 보이시는 것도 아니고, 다른 뾰족한 대책을 세우신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막무가내로 그리 하라는 것인데, 오늘도 우린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곤 한다. 세상적으로 무모하고 어이없다.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다. 앞서 정탐꾼들의 보고나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두고 하나님은 때로 막무가내시다. 우리 앞에는 다만, 그러니 어쩔 것인가? 하는 갈등만 남는다. 가뜩이나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15).” 또 그 시기는 물이 범람하여 수영을 하여 건넌다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때이다. 그럼에도 믿음으로,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16).” 주가 행하시는 일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로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이에,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17).
먼저 순종이냐 여전히 갈등이냐. 먼저는 의심하고 돌아보아 다시 또 제자리냐 믿음으로 나아가느냐. 신앙과 불신앙은 한끝 차이다. 늘 우리 앞에 요단이 흐른다. 불가능한 현실이다. 설령 또 믿음으로 딛고 서자 범람하던 요단이 마른 땅으로 모두가 걸어서 건넜다고 해도 앞에 가로 놓인 것은 여리고 성이다. 늘 그때마다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는 듯하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여리고 성은 위협적이다. 교회 안에서의 여리고 성은 세속화다. 교회 밖의 여리고 성은 세상적인 문화다. 내 안의 세속화는 의심으로부터 회의와 갈등과 온갖 다를 바 없는 타협과 이해의 상식들이다. 흔히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상식의 기준으로 어떤 문제를 돌파하려 한다. 누구를 이해하고 저를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도 타협을 우선으로 한다. 어떤 대화에서, 어떤 일을 두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끼리도 이해가 충돌하고 상식이 대립한다. 갈등이 조성되고 모해와 음해가 자리매김을 한다. 우리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현실이다. 이때,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난공불락 같은 여리고 성 앞에서, 앞서 말도 안 되는 요단을 건너면서 나는 부정적인 나의 갈등과 싸운다. 아이를 앞에 두고 저의 병적인 문제들을 회피하고 싶어 한다. 오죽하니 아이와의 대화를 녹음하여 누구에게 좀 들려주고 싶을 정도로 대화는 무모하고 권면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나를 다시 저의 앞에 앉히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다. 출렁거리는 요단을 보지 말고 말씀만 믿고 물속으로 발을 내딛으라는 것이다. 누구의 되풀이 되는 말과 그의 반복적인 갈등 앞에 덩달아 지칠 게 아니라, 나는 여호수아와 같이 무모하게 여겨지는 그 일을 다시 또 마주해야 한다. 그뿐인가? 여리고 성을 돌아야 한다. 어디 성지순례 자료에 보니 그 성의 둘레는 그리 큰 게 아니어서 4키로 정도로, 그러니 정상적인 걸음으로 돈다면 한 시간 남짓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일곱 바퀴라 하면 일곱 시간을 그처럼 돌고 또 돈다는 소린데… 상상만으로도 어이가 없다.
아이를 앞에 앉히고 정색을 하고 세 가지 다짐을 했다. ‘더는 자신을 위해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지 않는다. 더는 새로운 일에 혹해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위해 돈을 쓴다.’ 이를 받아 적게 하고 그리 해야 하는 이유를 열 번 스무 번 거듭 설명하였다. 병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두고 나는 주의 역사하심에 호소하듯 아이에게 일렀다. 앞서 아이는 더 이상 피시방에 가지 않는다. 돈을 주고 거듭 도전해야 하는 오락도 끊었다. 술자리에서 술을 사양한다. 엄마에게 더는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 않는다. 감정적으로 출렁거릴 땐, 스스로 진정제를 먹는다.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하필 조현병을 소재로 한국영화가 개봉되는 모양인데, 덕분에 나도 몰랐던 바를 공부하게 된 셈이다.
먼 친척 관계인 누가 그 집 아이도 그런 모양인데, 저는 지금 극에 달해서 어찌 손쓸 방도가 없는 모양이다. 정신병동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호전될 기미가 없이 모두가 지쳐가는 모양이다. 아이는 연대 무슨 과를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의 수재였다고 하고, 그 부모는 재산이 있어 온갖 ‘용하다는’ 것으로 이런저런 방도를 모색했던 모양이다. 결국은 다 실패인데, 이상하지? 죽어도 하나님은 싫다고 하니… 나는 다만 내 곁에 두신 한 영혼으로 씨름할 뿐이다. 누구라도 그럴 소지가 있다. 유전적인 요인이 더러 있다고는 하나 의학적으로 후천적인 경우인 것으로 밝혀졌다.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아이의 감정기복이 심하고, 조울증이 간극을 멀리하면서 예사롭지 않고, 분노조절이 어렵고 또는 극심한 우울감을 호소할 때, 얼마든지 해리와 분열이 동반되어 우리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다. 대부분 약물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기억력 감퇴와 지능저하가 동반되어 급속도로 아이큐가 떨어져 지적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거기에 망상이 더해지면서 헛것이 들리고 보이기 시작하면 전조증상이다.
누군가는 이를 지지하고 호응하면서 아이 곁을 지키며 주의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데, 부모의 사랑과 관심 정도로는 어림없다. 내 곁의 몇몇 동일한 경우도 그 부모들의 지극정성은 눈물겨울 정도이다. 한 아이엄마는 아이의 분리불안장애를 호소하며 직장도 그만두고 아이 곁을 지킨다. 하루 24시간 아이에게 전폭적으로 매달리는데 나는 그 말에 더 큰 심각성을 느꼈다. 분리불안은 오히려 아이가 아니라 아이엄마의 증상인 게 틀림없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사랑으로도 안 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오히려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저들의 영혼을 더욱 병들게 한다. 이를 당사자나 그 엄마에게 이른들, 범람한 요단강을 건넌다는 건 무모할 뿐이다. 난공불락 같은 여리고 성을 돈다는 일은 미친 짓 같다. 그러니 누구의 말마따나 교회는 싫고 목사는 더 싫다는 말이 오히려 정직하게 들린다. 사람이 어찌 하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
우리가 주를 의뢰하고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무모함을 전제로 한다.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상식적이고 나름 현실 가능한 길을 택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저들 부모에게는 그만한 능력과 돈도 있다. 내로라하는 전문의와 병원에 아이를 맡긴다. 그러면서도 용한 점쟁이를 찾거나 나름의 민간요법(?)을 마다하지 않는다. 안 믿는 저들로서는 하나님만 빼고 다 해볼 만하다. 희한하지? 그만큼 절박하면서도 교회와 목사는 끝까지 마다한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다 안다’고 여기는 탓이다. 나는 누구의 그런 소식에 뭐라 나서거나 어떤 말로도 거들지 않는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8).
앞서도 밝힌 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이는 주의 일을 맡은 자로서도 견지해야 하는 자세이겠다. 내가 나서서 ‘마땅히 행할 그 이상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나는 뒤늦게 신대원을 하면서 주의 일을 맡는 데 있어, 이 말씀을 철저히 가슴에 새겼다. 남들처럼, 여느 교회 같이, 어느 목사처럼 하는 따위로 나의 기준을 두지 않는다. 누가 뭐라든지, 심지어 내 안의 갈등이 나를 쥐고 흔들 때도 나는 이 말씀을 기준으로 ‘좌우정렬’ 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곤 한다.
아이와 함께 어디 널찍한 카페 구석진 데 앉아 두 시간이 넘게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하면서 세 가지 다짐을 받았다. 중간에 아이는 서러움인지 어떤 감정으로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눈물도 수단이라, 거짓말과 눈물은 늘 교묘한 무기로 쓰인다는 것을 이제 잘 안다. 안타까워 다독일 때가 아니다. 아이의 엉뚱한 자기항변에 그럼 좋을 대로 하다 서로 못 견디겠으면 병동에 입원을 하든지, 가족이 갈가리 흩어지든지 알아서 해라! 다소 모질게 작심을 하고 아이를 영적으로 농락하는 세력을 내리눌렀다. 사탄의 역사다. 내가 저를 상대할 수는 없으나 그리 앞에 두심은 주가 하시겠다는 소리다. 어찌 우리가 범람한 요단강을 마르게 할 수 있겠나? 거기에 오합지졸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다니! 오직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와 끝은 알 수 없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 3:8).
우리로 이르시는 말씀이다. 나는 그리 듣는다. ‘아픈 아이’ 뿐인가? 나는 내 곁의 멀쩡한 어느 목사가 더 문제다. 그 가정이 더 심각하게 여겨진다. 누가 누굴 돕는다고 하는데 저의 열심이 나는 더 위태롭다. 스스로 의원이 필요치 않다고 하는,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이 나는 더 무섭다. 실제 그들을 상대하는 일이 더 어렵다. 후에 여호수아는 작심을 하고 발언하였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수 6:26).”
나는 이와 같은 묵상글을 쓰면서 실은 그 당사자들이 이 글을 읽기를 바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상대는 결코 이 글을 읽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표현은 거침이 없고 나의 묵상은 오롯이 나를 붙드시는 데 소용된다. 곧 나는 굳이 주목 받는 생이고 싶지 않다. 누구처럼 여러 영혼을 두고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일을 수행하느니, 한 영혼만 상대하게 하심이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은 누가 오고, 내일은 누가 오는데 딱 그만큼씩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주께서는 상대하게 하신다. 그러니까 나의 보잘것없고 나약함이 나의 무기가 되고 방패가 된다. 바울의 표현처럼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그간 요셉의 ‘약함 훈련’이 저로 당대의 강대국 총리라는 직책을 수행하게 하셨다. 이를 시편의 아름다운 묘사로 다시 음미하면,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 65:10).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나도 나를 주체할 주제가 못 되는데 무슨… 그럼에도,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11-12).” 또 한 해를 돌아보고, 오늘의 이런저런 일을 되새기다 보면,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