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0편 / 주는 나의 도움이시다
211031 주일
시편 70편
주는 나의 도움이시다
시 40:13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40:14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시 40:15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시 40:16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 70:1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70:2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시 70:3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시 70:4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70:5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들어가는 말
오늘 시편은 다윗의 시로 [기념식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부연설명이 더해졌다. 오늘날에도 ‘기념식’ 하면 뭔가 기념하고 상기할 날을 뜻한다. 오늘 시편 70편은 시편 40편의 후반부를 그대로 인용하여 재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기념식에 어울리게 각색한 것이 사실이라면, 시편 40편 1절에서 5절의 내용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그 중에서도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3).” 하는 부분은 어느 절기의 어떤 기념식에도 적절하였을 것 같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5).” 하는 부분은 매우 전달하는 의미도 강렬하고 적절하다.
좀 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보다 다급하게 곧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속히’ 서둘러 도와달라고 하는 호소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이해를 돕고자 시편 40편 13-17절과 오늘 본문 70편을 좀 더 살펴보면,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 다소 편집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40편에서는 ‘여호와’ 곧 하나님의 본명을 세 번 부른다. 그리고 직분을 의미하는 ‘하나님(엘로힘)’은 한 번 부른다. 또한 친밀하면서도 전적인 의미인 ‘주(아도나이)’라고 부름이 다섯 번 반복된다. 그런데 70편에서는 ‘여호와’라는 신명은 두 번, 하나님은 세 번, 주님은 네 번 부른다. 이를 미뤄볼 때 시편 40편의 시는 개인적인 의미에서 쓴 것을 70편에서는 공식적인 의미에서 공개적인 도우심의 요청이 의도적으로 담겨져 있는 듯하다.
먼저 알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그 이상의 존재가 없으심으로 중요한 시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출 6:29).” 하시었고, 이를 강조하시면서도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신 5:6).” 하시었다. 시인 아삽의 찬송에서도,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83:18).
하는 고백이 나온다. 같은 시편 70편을 40편의 시를 그대로 인용하기보다 먼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 시인의 시적인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짐작하였는데, 그렇다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좀 더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뜻을 함께 나누고자한다. 오늘 시편은 앞서 69편의 [백합화의 노래]로 어려우나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히려 주를 찬송하는 내용과 다음에 이어질 71편의 다급하고 급박한 상황의 연결점으로 오늘 시편 70편을 놓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1. 주의 인자와 진리는 모든 성도의 영원한 구원의 소망이다.
시편 40편을 나누면서 우리는 13절에서 17절의 부분에서 ‘구원의 소망’을 살펴본 바 있다. 이에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는 호소를 대신한다(86:14). 즉 늘 우리 인생은 여러 어려움으로 가로막힌다. 산 넘어 산이라고, 출애굽과 동시에 모진 광야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어이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도착했을 땐 요단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약속의 땅에는 예닐곱 개의 이방민족과 30여 명의 왕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간신히 요단을 건넌다 해도 난공불락과 다름 없는 여리고 성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는 우리 구원의 여정-인생길을 예시한다. 그야말로 주의 긍휼하심과 은혜가 아니면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다. 어느 가정이나 그 사연을 조금만 들어보면 온갖 우여곡절로 가득하다. 또한 어떤 어려움은 설상가상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우여곡절은이란 말 그대로 ‘뒤얽혀 복잡한 사정’이다. 설상가상이란 ‘눈이 내렸는데 그 위에 서리까지 내린 형국’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간구한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15-16).” 곧 우리가 바라고 의지할 대상은 오직 주의 긍휼하심뿐이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곧 주의 인자와 진리로 긍휼하심을 바라고 구하는 것은 구원의 여정에서 우리 성도들의 특권이다.
2. 본문 이해
1) 이 땅의 패역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
이를 바로 알지 못하면 ‘속히’ 하고 누군가의 도우심을 바랄 때 우리는 우왕좌왕 엉뚱한 곳을 기웃거리게 된다. 이스라엘이 나온 애굽은 우리가 나온 세상이다. 애굽-세상의 특징을 베드로 사도는 벧후 2:12-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첫째, 짐승 같다.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다. 둘째, 비방하기를 잘한다.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비방은 남을 탓하는 것이다. 셋째, 교회를 멀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그 결국은 멸망일 뿐이다. 넷째, 결국 자신들의 불의의 값을 당한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다섯째, 끝까지 시치미 뗀다.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여섯째, 자신들만 모르는 흠이다. “점과 흠이라” 일곱째, 끝까지 속임수를 즐긴다.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여덟째, 범죄를 그치지 않는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아홉째, 자신뿐 아니라 남들도 유혹한다.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열째, 탐욕으로 물든 저주의 자식들이다.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그러니 오늘 시인은 그런 가운데서 ‘우리 영혼을 건지시고, 속히 도우소서.’ 하고 주께 외치는 것이다.
2) 우리 영혼을 찾는 세력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시 70:2).”
결국 우리의 싸움은 단순한 세상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곧 우리는 세상의 정세나 유행, 문화에 너무 부화뇌동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교회 안에서 정치와 장사(다단계)를 아주 경계한다. 우리 영혼을 찾는 세력이 세상 밖에만 있는 게 아니다.
즉 애굽을 나와 출애굽한 것으로 끝이 아니다.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에 당도한 것으로 다가 아니다. 이제부터다. 신앙의 여정을 가만히 보면 광야 생활이 오히려 편하고 문안하였다. 주께서 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입히셨다. 한데 이제 믿음이 세워지고 신앙이 바로 서려 할 때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낙공불락 같은 여리고 성이 있다. 교회 안에까지 지어지는 경우는 세속화다. 이것이 교회 밖에서는 문화다.
세속화란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추구하는 게 점점 같아지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교회가 사람 숫자와 외형적인 크기로 부흥을 평가한다. 점점 기업화되고, 시스템에 조직화되어, 목사는 성도를 다 알지 못하고 성도들에게 목사는 범접하기 어려운 위치의 존재가 되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전통적인 교회들은 사교장으로 팔리거나 관광산업의 일환이 되어 구경꾼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교회의 세속화는 급속도로 번져 한국교회도 덩치만 커졌다. 세상적인 문화는 그 심각성이 날로 더 애매해진다. 다문화가 형성되면서 가족의 변화는 물론 정체성도 위협받는다. 퀘어축제에 교회가 앞장서고,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성전환이나 낙태, 동성애에 대한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뿐인가? 문화의 일환으로 ‘종교 화합’을 내세우며 진리를 잃어가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다급히 외쳤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이제 더는 작은 교회, 교회 공동체로 서로가 뒤섞이기 싫어한다.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행여 누가 우리 속사정을 알까봐 쉬쉬하기 바쁘다. 속속들이 서로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위하여 중보하고 기도하는 교회는 사라지고 있다. 더는 교회 때문에 고난당하는 걸 원하는 성도는 없다. 그래서 규모 있고 조직이 잘 갖추어지고 복지 시스템이 잘된 큰 교회들로 사람들이 몰린다. 자본주의 시장원리와 교회의 현실은 흡사 너무 많이 닮아 있다.
3) 수치를 자초하는 성도가 되지 말자.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시 70:3).”
차라리 안 믿고 멋대로 살면 그나마 낫지, 믿는다고 하면서 이 무슨 형국인지! 가령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를 생각해보자. 차라리 헌금을 내지 말던가… 남들 다 그러니 내긴 내야겠고, 그러니 자기들 소유를 팔아 얼마는 숨기고 얼마만 전부인 것처럼 속여서 헌금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십일조에 인색하여 안 내는 건 둘째 치고 이를 쪼개기 하여 분산 투자하듯 드리는 성도들이 늘고 있다. 주일 헌금이나 절기, 감사헌금도 아까운 건 마찬가지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지 마시길. 그게 신앙의 수준이면 어떻겠나? 교회를 속이고 하나님을 능멸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찌 되었던가?(행 5:1-5). 또는 바보에 살던 마술사 바예수처럼 ‘거짓 선지자’ 행세를 하며 목사로 교사로 밥벌이를 하는 사역자를 어쩌면 좋을까?(13:11). 성도라고 하면서 수치를 자초하는 교인들이 너무 많다.
이에 예수님은 엄히 경고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믿을 거면 바로 믿자. 어느 훗날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온다.
4)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성도가 돼야 한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시 70:4-5).”
오늘 본문의 행심이다. 시인이 기념하고자 한 것은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데 있어 그 절박함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죄는 죄다. 악은 악이다. 죄가 상대적인 게 되고, 악은 희석되고, 선과 악은 혼재하여 그게 그거 같고, 저게 그거 같으니! 시인은 주께 외친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그 의미가 분명해야 한다. 오늘 시인은 이를 위해 ‘속히 내게 임하소서.’ 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하는 자신의 치부와 연약함을 드러내고 상기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어려우니 자꾸 여리고 성을 쌓고, 기웃거리며 교회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존재감 없이 살고자 하는데,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경고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경고하신다. 아니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6).”
나오는 말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오늘 시편 70편은 격앙된 목소리로 ‘상기하자 6.25’ 하고 외치는 것처럼 우리의 결단과 결연한 자세를 촉구한다.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기념하며 살고 있나? 우리 개개인의 출애굽의 역사가 얼마나 극적이었나? 우리의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셨는가? 애매하게 구는데도 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해야 한다. 더불어 이제 시작이다. 요단을 건너야 한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여리고 성, 곧 세상 문화나 교회 안의 세속화와 맞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반드시 오늘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하는 오늘 시편의 다급함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 70: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