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전봉석 2021. 10. 31. 05:11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5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68:28

 

 

애굽은 세상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요 권속이고 세력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는 한 영혼이 주 앞으로 나오는 데 따른 엄청난 역사다. 순순히 출애굽이 이루어질 수 없다. 기어이 하나님과의 대적이 일어나고 열 가지의 엄청난 재앙이 쏟아지고 난 뒤에야 두 손 들고 항복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시는 것인데, 모든 동물과 사람의 처음 난 것을 잃고서야 깨닫게 된다. 그만큼 애굽에 물든 우리의 죄성은 끈질기다.

 

이어지는 출애굽에서 다시 또 붙들기 위한 애굽의 추격과 앞으로 가로 막은 홍해로 인한 좌절과 고통은 엄청나다. 누구는 거기서 또 한동안 붙들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을 홍해에 수장시키시고 이스라엘은 걸어서 홍해를 건너, 애굽과의 관계를 끓으신다. 그리고 1년여 만에 당도한 요단 건너 가나안 앞에서의 주저함과 머뭇거림은 기어이 40년의 배회와 광야 생활을 자처하게 된다. 이로써 ‘애굽에서 섞여 나온 무리’들이 모두 광야에서 죽기까지, 곧 죄로 물든 우리의 속성이 모두 죽기까지, 우리 안에 애굽으로 물들었던 속성이 씻어지기까지의 그 시간은 잔혹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신다. 돌아보면 그때마다 애굽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먹이시고 입히시며 우리로 이내 가나안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훗날 우리가 들어갈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비로소 주의 자녀로 이 땅을 살며 '침노해야 할 천국'이다. 그때마다 우리 앞에는 요단이 가로놓인다. 성도의 삶이란 가나안을 되찾는 일이다. 그러나 바른 성도의 삶은 '날마다 전쟁'이다. 그리고 각자의 땅을 차지한다. 사사기 시대를 지나 왕을 두기까지 저들은 또한 저들 좋을 대로 하나님을 섬기었다. 이를 알지 못한 세월로 인해 스스로는 애굽과 다를 바 없는 종의 생활로 시달림을 당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거부하고, 주변 나라들과 같이 자기들의 왕을 세움으로 단일국가로는 채 3대를 지나지 못해서 그 잘만 솔로몬 이후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두 쪽이 난다. 그리고 각각의 나라로 서로는 서로를 겨누고 싸운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하기까지 그 일은 끝이 없다.

 

그리고 더는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진 암흑시대를 지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저들을 구원하신다. 한데 이 또한 거절함으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그 죄를 돌리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그리하여 복음은 흩어지고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러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는 표면적인 이야기이면서 다면적인 영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와 같은 장구한 구원의 여정을 되새기다, 문득 오늘 요셉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져본다. 왜 그때 저는 자신들의 민족을 애굽으로 끌어들인 것일까? 오늘 본문을 다시 상고하면,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자신이 두세 번 언급한 것처럼 앞으로 남은 5년의 기근뿐이다. 이후 저들의 결과는 노예로 전락 되었다. 저는 미처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없는 이스라엘로 애굽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셈이었는데, 사람 참 그 한계가 야속하기만하다.

 

물론 우리는 당장의 어려움,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를 위해 다들 기를 쓰고 산다. 그래서 믿고 교회 다니고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이를 모두 은혜, 축복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요셉의 업적은 위대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귀한 예시다. 그럼에도 저는 어쨌든 애굽화 되었다. 저를 들어 이스라엘로 죽음의 기근을 면하게 하신 것은 사실이나 굳이 자신이 사는 이방 땅, 우상의 나라 애굽으로 온 이스라엘을 끌어들인 것이 옳은 것일까? 하나님의 선민을 이끌어 들여 결국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긴 하였으나 자그마치 420여 년의 세속화 곧 애굽화는 이루어졌다.

 

물론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오늘 요셉의 고백은 주옥같다.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고, 저들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찬송하는 것은 대단하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는 놀라운 진리는 사실이다. 한데 거기에 눌러살기를 바라시고 그리 행하신 일은 아니다. 애굽으로 모두 이끌어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게 한 것은 하나님이 그리하신 게 아니다. 애굽은 늘 하나님이 경계하시는 땅이라. 아브라함 때부터 이는 명백하다. 그러니 요셉을 애굽에 판 것이 저들의 선택이었다. 저를 애굽에 팔기까지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놓은 야곱, 이스라엘의 편애가 문제다. 앞서 한 여자 라헬에 빠져 사랑한 까닭이다. 거슬러 올라가 자기들이 모색하여 작당하고 얻은 장자의 명분과 축복이 문제다. 그 부모 이삭과 리브가의 갈등이었고 이삭의 우유부단함 때문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의 딸들을 사랑함으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오늘의 이 모든 일은 죄로 인함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1-3).” 결국 다시 육신이 되었다! 거슬러 올라가 아담의 선택은 이와 같이 엄청난 역사로 이어져 거대한 구원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유전인자가 있다. 곧 우리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힘이 있다. 이를 시편은 이를 일깨운다.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68:28).

 

영적으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저들의 이야기는 개별적으로 각 가정의 이야기다. 개개인의 구원의 이야기다. 누구는 기어이 애굽으로 들어가 애굽에 눌러앉아 살고, 애굽화되어 아우성이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어떠하셨는가를, 오늘 시인은 이렇게 서술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19).

 

그럼에도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심으로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3).

 

그곳이 애굽이어도, 광야 길에서도, 홍해를 앞두고도, 요단을 건너면서도, 이내 가나안의 끝도 없는 전쟁에서도 ‘의인은 기뻐한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뛰놀며 즐거워한다.’ 같은 시절을 보내면서도 누구는 이렇게 다르고 누구는 저렇게 달랐다. 곧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이와 같은 고백은 누구 못지않게 사연도 많고 탈도 많았던, 지도자 모세의 진언이다. 그런데 또 누구는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32).” 이내 믿지 않았고 그릇된 선택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국은 오롯이 자신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그 자식의 자식의 일로까지 대물림하듯 이어진다.

 

누구의 사연을 듣다보면 저의 이야기에 앞서 그 부모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누가 이혼을 하였는데 앞서 그 부모의 이혼이 있었고, 누가 폭력적이고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실은 그 부모의 세대에서 흘러넘친 죄의 결과라. 이를 단절하기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여서 보고 자란대로 그리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 몹쓸 죄의 악순환 중에도 오늘 요셉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다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고 연장하신다. 누가 하나님을 탓을 하기에는 사람의 선택이 너무 그럴듯하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대로 사는 수밖에는 달리, 갈 데까지 가야 한다는 말보다 무서운 저주는 없는 듯하다. 이를 알지 못해 범하는 죄가 수두룩하고 알면서도 어쩌지 못해 끌려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니 우리는 바르게 행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잠 29:27).” 어이없지만 모든 드라마나 영화는 자신들의 죄의 속성을 알고 이로 인해 빚어지는 온갖 폐단과 부조리와 인간 이하의 ‘인간 실격’을 그려낸다. 이를 작품화하여 서로가 평을 하고 우열을 가리고 상을 가져간다. 찬사를 보내고 ‘브라보’를 외치면서 국위선양을 외치는데 나는 그것이 섬뜩할 때가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자기검점을 하게 된다.

 

먼저는 그와 같은 죄짐에 눌려 신음하기는 하나? 이를 알고 주께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의 힘’을 유지하기는 하는 것일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의 절규가 때론 아이러니하다 싶을 정도로 저와 같이 영적인 사람도 사람으로 사는 일을 두고 통회한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그와 같은 짓눌림의 신음으로 저는 이 놀라운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시편의 시인도 같은 목소리를 낸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중략)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시 38:3-8).

 

곧 자신의 죄과로 신음하지 못하는 영혼은 끔찍하다. 그리하여 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한탄하는가, 하는 문제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나를 비롯하여 내 곁의 누구도 이를 인정하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머리로는 인정하나 실제의 삶으로는 ‘그럴 수 있는, 누구나의 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이를 안다면 저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시 54:1, 109:26).

 

곧 어찌할까 하여,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 16:30-31).” 바울이 갇힌 옥을 지키던 간수가 실은 자신의 갇혀 살았던 생을 두고 저와 저의 가족을 이끌고 주 앞에 나아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과연 우리를 구원하실 보혈의 가치를 인정하는가? 우리는 실상 다 알고 있다. 이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승화하며 영화로 소설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표현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리하여 어떤가?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그렇다면 과연 하루에도 몇 번을 예수를 대적하지 않으려, 복음에서 어그러지지 않으려, 자신을 쳐 복종하기는 하는지…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약 2:7).” 그저 다를 바 없이 무늬만 믿는 자로, 명맥만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로 알고 고집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를 알려면 과연 얼마나 주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며 사투하는가를 돌아보면 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시 19:10-11).

 

사느라 그저 사는 일에 연연하여 그저 5년의 남은 기근을 모면하려 과연 이스라엘 자신의 민족을 애굽으로 이끈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물론 당장의 생명의 연장하고 그리할 수 있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면 그렇게 애굽에 안착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리 된 거 남은 5년의 기근이 끝나고 본래의 약속한 땅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면 어땠을까? 아니 아예 애굽으로 이끌어 들일 일이 아니라, 얼마든지 왕래하며 그 위기의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결국은 저의 권세가 그 이방의 나라에서 천년만년 이어질 줄로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당장의 생명 보존으로 족하였던 것일까?

 

이에 우리는 얼마나 온전한 믿음을 얻고자 열의와 성의를 다하고 살고 있는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6-17).” 어쩌자고 우린 늘 닥치고 난 뒤에야 후회와 한탄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일까?

 

믿음은 보존되고 지켜져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손발이 짤리고, 불행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해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누가 이내 젊을 때의 믿음을 저버리고 안 믿는 가정으로 시집을 갔다. 당장은 훌륭하였고 그 사랑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신앙의 불화가 찾아들고 안 믿는 시댁과의 갈등은 물론 사랑하여 결혼한 남자와의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도 물거품이 되었다. 순식간의 일로 저는 아이 하나만 떠안고 이혼을 당하였다. 이를 불행이라 여길 수도 있고, 그나마 복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고… 나는 저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으나,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곧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사역이 있어 이로 인하여 거저 주신 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이를 알면 알수록 주로 인하여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도리어 우리 ‘사람의 힘’이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하여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이와 같은 고백과 남은 삶의 모든 여정이 그러하기를.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시 68:4).

 

물론 요셉은 요셉으로서 훌륭하였으나 좀 더 깊은 안목으로는 저의 선택이 안타깝고 속상하다. 우리는 결국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존재인가? 오늘 시편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1).

 

어떠하든지 주가 나와 함께 하심으로,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28).

 

저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19).

 

이것이 오늘 하루에도 내가 더 사는 이유이겠으니,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