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 46:3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 69:30-31
일부러 나는 슬픈 이야기를 좋아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인간 실격>이나 <미안해요, 리키>와 같이 아픈 현실의 내용을 찾아서 본다. 가령 루이스세플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노인이 ‘억장이 무너지는 연애 이야기’를 찾아서 읽는 심정과 같을까? 마음을 기쁨에 두는 것보다 슬픔에 두는 것은 이 땅에서의 기쁨이 억지스럽고 너무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슬픔은 자연스럽고 누구나의 것이다. 솔로몬은 말하길,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왜 저의 말이 그러한가,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본래 인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그러니 그 속을 누가 알까? 우리 모두 숨길 수 없는 결국은 하나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어릴 때, 내가 처음 사랑하였던 한 소녀가 있었다. 저의 아버지는 나환자여서 얼굴은 물론 손가락 마디마디와 다리가 뒤틀리고 뒤섞여 기이하였다. 저의 어머니는 절름발이여서 걸을 때마다 딛고 서는 지구는 옆으로 굴러가는 듯 위태위태하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가 나환자촌이어서 그런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나는 저들의 일그러진 모습에 점점 익숙하여졌다. 처음 그 소녀가 목사 사택으로 온 것은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교회 출석 확인서를 받아가기 위해서였다. 평소처럼 집에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고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리 수술 때문에 한 해를 쉬는 기간이어서 채마밭에 앉아 흙장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오후 햇살을 등지고 튀밥 같이 하얀 여름 교복을 입고 서 있던 소녀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한참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인기척을 느끼고 저를 돌아다 본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을 꿈을 꾼다. 그러면 울다가 깬다.
기억은 왜곡되고 덧대어져 내 안에 그려져 있는 이미지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잘은 모른다. 꾸며진 부분이 어느 정도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도 가끔 그 소녀를 생각할 때면 슬프면서도 그립다. 울면서도 웃는다. 그렇게 한 삼사년을 좋아하는 사이로 지내면서 죽어라 하고 서로는 편지를 썼다. 서로 만나 말을 하는 것보다 글을 써서 보내거나 저의 글을 읽는 게 더 편하고 좋았다. 그때는 서로 만나는 게 어려워서, 그러다 가끔 만나면 두어 걸음 사이를 떼고 아주 느리고 천천히 오래도록 걷기만 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세상 모든 슬픔을 그 소녀에게서 읽었다. 저의 말투는 나른했고 조곤조곤하여 글을 읽는 것 같았는데, 자기 이야기를 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삼인칭으로 하곤 하였다. 그래서 그랬던 거겠지, 그런 마음이었나 봐, 하는 식으로.
나는 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더 어릴 적 아버지가 전도사로 부임하여 목회하였던 어느 시골 마을의 우물이 떠오르곤 하였다. 가정마다 수돗물이 들어오면서 더는 쓸모가 없어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던 외딴곳의 우물. 그래도 한때는 사람들이 모여 빨래도 하고 먹을 물도 길어가곤 하던 곳이었는데, 아마도 초등학교 삼사학년 때였을까? 아, 그때 우리 국민학교에는 단봉낙타가 있었다. 축사 같이 여러 동물들을 키우며 저들 먹이를 주워오는 게 당번이 하는 일이었는데… 내가 처음 사랑하였던 소녀를 만날 때면 나는 우물과 낙타를 자주 떠올리곤 하였다. 아마도 그 아이가 늘 그런 이미지여서 그랬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이고 늘 조용한데 저의 안에는 할 말이 많아서, 편지도 항상 여러 장이었고 말도 늘 혼잣말처럼 혼자 그렇게 길게 말하다 잊고 있었다는 듯 나를 돌아보곤 하면서.
이런 나를 아내는 항상 핀잔한다. 궁상맞다면서 말이다. 밝고 활기찬 아내와는 대조되는 경우가 많아 나는 자주 아내에게 시끄러워, 하고 고개를 젓곤 한다. 그래서 ‘아픈 아이’의 뜻 모를 긴 이야기를 싫어하지 않는가보다. 또는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기도 좋아하고 말하기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제 오늘 말씀에서 저들 개개인의 길고 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비로소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나이 든 야곱을 상상한다. 그동안 가슴이 묻고 살았을 여러 이야기를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힌다. 저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나는 성경의 어느 대목에서 이런 장면에 자주 눈길을 둔다. 아담아 하고 부르시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고, 하갈아 하고 부르시고, 모세야 하고 먼저 부르시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 하시는, 오늘 창세기 46장의 첫 부분을 읽다말고, 어쩌자고 소녀를 생각하고 그의 이야기들, 편지들을 떠올리게 된 것일까? 성경은 이야기다. 하나님은 이야기로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호 5:13).” 우리가 무얼 말하고 어떤 문제로 씨름할 때에 항상 그 곁에는 주님이 계셨다. 나는 늘 말씀 중에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말씀을 읽을 때면 눈물이 고인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바람이 나를 에워싸듯이 또는 고운 햇살이 눈이 부시게 흐드지다 사위가 어두워져 사방으로 흩어지는 저녁께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3:2-3).
나는 누구의 어떤 이야기에서 저가 말하지 못하는 그 너머의 노을을 상상하곤 한다.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야곱이 드디어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위로의 말씀이 마음을 적시는 것 같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 46:4).” 우리 주님은 약속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7-28).” 오늘 다윗의 시가 바로 또 들의 백합화의 곡조에 맞추어서 부른 노래이다. 그 내용은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주께 구하는 간구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시 69:1-2).
인생에서 슬픔을 빼고 논할 수 있는 말이 몇이나 될까? 억지웃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의 도우심을 구하는 일이겠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3).
이를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사느라 사람들은 저마다 그처럼 강박적으로 즐거움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 긴 코로나로 지친 가운데 일상으로의 회복을 시도한다는 오늘, 뉴스에서는 왁자한 거리를 비추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와글거리며 가게마다 사람들이 들어찬 어느 번화가의 모습을 보면서 슬퍼할 줄 모르는 기쁨은 위태로웠고, 외로워할 줄 모르는 즐거움은 불안하게 여겨졌다. 어릴 때 단봉낙타는 항상 혼자였다. 등하교를 할 때마다 나는 한참씩 그의 앞에 서서 어디 먼 사막에 두고 왔을 저의 가족을 상상하곤 하였다. 또는 덩그러니 놓인 우물을 들여다보며 마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입을 주시하는 것처럼 뚫어져라 하고 바라보곤 했었다. 소녀의 편지들은 길고도 길었다. 나는 몇 번을 다시 읽고 또 읽으며, 한 자 한 자 눌러쓰면서 숨을 고르고는 하였을 저의 다하지 못한 말을 생각하였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목깃이 간지러운 듯 저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말씀을 보다, 나는 말씀과 말씀 사이에 생략된 사람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생각한다. 그때 그 슬픔이 어떠했을지, 저가 땀을 훔치며 어디쯤 시선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곤 했을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5).
특히 시편의 함축된 언어와 언어 사이에는 무수한 말들이 생략되고 감추어져 있곤 하는데,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14-16).
저의 수렁과 저의 깊은 물과 저의 웅덩이를 생각하다보면 눈물이 고이고는 한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시시콜콜한 말들을 우물은 항상 깊은 어둠과 침묵으로 감추고 있었다. 단봉낙타는 침을 흘려가며 무얼 그리도 되새김질하고 있었고, 소녀는 저 혼자 한참을 말하다 말고 ‘알아들었어?’ 하고 되묻곤 하였는데…. 가끔씩 아주 잠깐씩 그것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고이곤 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누가 와서 말하다 운다. 그럼 나도 가만히 입을 삐쭉거리다 고개를 숙인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 다윗은 자신의 그 슬픔을 괴로움을 말할 수 없는 서러움을 백합화의 노래에 맞추어서 시를 지은 것일까?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7).
그렇게 주를 바라고 주를 생각하라고, 어쩌면 우리에게는 풍성한 슬픔으로 기쁨이 되게 하시는가보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29).
그래서 나는, 이야기한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30-31).
하여 이것으로 주께 위로를 받기를.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32-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