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창 47:9-10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70:4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늙음은 오는 순서대로이다. 억새를 보면 날 때부터 늙어있는 듯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다. 그런 억새의 순응은 바람을 거스르지 않는다. 이곳과 저곳을 주저하지도 않고 오롯이 주어진 자리에서 흔들림으로 뽑혀 나지 않는다. 소래포구 저쪽에 염전이 있던 자리에는 억새들이 가득하다. 나의 기억이 맞는다면 억새는 일 년 열두 달 내내 억새다. 형용사 ‘억세다’가 억새의 품위가 아닌가싶다. 억척스럽고 세찬 것이 생을 다하는 동안, 여러살이풀로 칠월에서 구월이면 꽃을 피워 바람에 날린다.
노인이 된 야곱이 바로 앞에 섰다 저의 물음에 자기 인생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인생을 나그네로 비유하여 험악한 세월을 살았노라고 말한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하였고 여러 날을 몸도 마음도 시달리며 살았다. 저의 이야기에서 나는 억새가 떠올랐고 그 험악한 세월을 순응으로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이면 우리 아파트 단지 내에 장이 선다. 아이들은 재잘거리고 노인들의 시선은 주전부리거리로 풍성하다.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느림은 빠름보다 여러 풍경을 거느린다. 빠름은 여기서 저기로 닿는데 급하여 넉넉한 시선을 거느리지 못하나, 느림은 찬찬히 모든 것에 가 닿는다. 나의 느림은 빠름보다 나아서 종종 걷다보면 전동킥보드를 탄 사람이 옆을 쎙- 하고 지나갈 때면 아찔하다. 며칠 전에 기사를 보니 어느 내리막길에서 십대 청소년이 아무런 보호 장구도 없이 킥보드를 타고 질주하다 기둥을 들이박고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빠름은 시야를 빼앗아 여러 풍경을 거느릴 수 없어 위태롭다.
오늘 야곱의 진술에서 저의 생의 빠름보다 느림을 더 느끼게 된다. 나름은 앞서서 축복을 원했고 형 에서의 장자권도 속임수로 사고, 아버지로부터의 축복을 가로채기도 하였다. 밧단아람으로 피하여 라헬을 사랑하며 네 아내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을 낳기까지 숨 가쁘기도 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저의 빠름이 느림보다 넉넉하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느림이 여러 떼 끝에서 하나님과의 독대를 갖게 된다. 그곳은 벧엘이었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창 35:15).”
월요일이면 나는 돌아오는 주일의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고 관련 성구를 찾아 그 의미를 훑는다. 아이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헬스를 시작하고, 보디빌더가 되겠다는 말에 응원하고 돌려보냈다. 조금 서둘러 집으로 오는 길에 장이 선 곳을 한 바퀴 휘이- 둘러보았다. 파는 이나 사려는 이나 느릿느릿하였고 그 사이로 제법 이제 찬바람이 불어 옷깃을 여미게 하였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노인들의 모습은 억새를 닮은 듯 바람에 몸을 맡긴 것처럼 흔들흔들하며 무엇에고 오래 시선을 두다가 거두고는 하였다. 점점 노인이 되어가는 나의 하루하루가 나는 싫지 않다. 저들의 느림에는 느긋한 시야가 확보된다. 가만히 응시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는 시선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시 71:1).
죽음은 그야말로 느림의 허허벌판처럼 여겨진다. 끝도 모를 시선인데 비로소 노인이 된 야곱의 입에서 탄식과 함께 자기 생을 주시하는 표현이 험악하였노라 하는 게 아니었을까? 노인들의 시선에는 이를 가만히 응시하는 방향이 있다. 노인이 된 시인도 이를 주께 구하고 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2).
모든 생명은 생을 다하면서 죽음 너머의 너른 세계를 바라본다. 그때에 우리가 주께 피하여 주께 바라는 것,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8).
말씀으로 말씀이어서 나는 가끔 다행이다. 마치 문서를 가진 것처럼 확실해지는 일인데,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시 25:2-3).
이것이 인생의 순환이 아닐까? 까닭 없이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한다. 젊을 때야 저의 빠름으로 시선을 너그럽게 둘 수 없는 일이라 하지만 나이가 들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그 마음의 조급함으로 동동거리며 사는 꼴이란 그야말로 수치스럽다. 오직 주만이 나의 피난처가 되셨음을,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71:3).
살며 사랑하며 배운 것이 피난처를 아는 일일 텐데,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수 있는 바위로 나의 반석과 나의 요새가 되심이 복이었다. 이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4).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을 쫓기듯이 살았다. 바쁘다는 게 좋은 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나는 가끔 누구에게 권면하기를 혼자 있는 시간을 준비하라고 이른다. 젊을 때야 그럴 수밖에 없었겠거니 하지만 어지간히 나이가 들면서는, 반백의 나이를 지천명이라 하는 것도 그래서가 아니겠나? 하늘의 뜻을 안다는 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사 12:2).
이와 같은 고백을 그 얼굴에 지니고 살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일까? 과연 그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셨나? 하고 젊을 때는 바삐 움직여 정신없이 살았을 테고. 그러는 동안 우리의 죄는 확장 되었고 그 파괴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을 다 늙고 나서도 자복하지 못하는 삶은 또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겠나? 기억해야 한다. 앞서 설교원고의 초안을 잡으며 다짐하듯 되뇌인 것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시 71:4).
하는 시인의 기도가 이제는 귀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미처 모르고 살았던 날들이 다 흘러가 허옇게 머리에는 서리가 내리고 몸은 느려지면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5).
아, 이와 같은 고백이 이제는 내 것이어서 나는 참 다행이었다. 한참 바쁘게 살 때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시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기나 했던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약 1:15-16).” 돌아보면 인생은 속임뿐이었고 내가 쉴 곳이라 여겼던 것들마다 허무하여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1-32).” 이와 같은 말씀에서 하나님이 오늘까지 참고 또 기다리심을 알 수 있다. ‘죽을 자가 죽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돌이켜야 하는데,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 3:13).
결국 우리의 싸움은 자기의 완고함이 아니었던가? 나는 돌아보면 그러했다. 누구 때문도 아니었고 무엇 때문도 아니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서럽고 원망스러웠던 것들까지도 실은 그게 아니라, 나 자신의 완고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성경은 이에 강조한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한데 그것으로 돈을 벌고 밥벌이를 하며 사는 세상이라, 악이 악인 줄 알기까지는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이 지나 늙음 앞에 앉아야 하는 것일까? 여전히 마음은 이팔청춘이라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그게 실은 다 허상이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러 이와 같은 허상은 참으로 질기고 집요하여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끊고 찍어 내버리지 않으면 죽음을 목전에 두기까지도 죽음을 예비하지 못하고 사는 게 세월이었다. 결국 우리의 사는 이유, 그 원인과 결과는 하나님이셨다. 노년에 시인은 찬송한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6).
이를 보다 일찍 알았더라면,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것을 왜 이처럼 나이가 들어서여 깨달은 것일까? 내 몸이 내 것인 줄 알고 살았던 날들이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그러할 때 가질 수 있는 놀라운 힘은, 지금의 현상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시 71:7-8).
안 믿는 자들의 눈에는 왜 저러고 사나? 싶은 것이지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더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끓을 수 없는 데서 나는 안도한다. 여전히 노리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원수들이 있으나 저들은 또 저들의 일을 하는 것이겠으니,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내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내 영혼을 엿보는 자들이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71:9-12).
어쩌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도 저 원수들에게 쫓기며 사는 숙명을 가졌다. 그래서 주님은 탄식 섞인 목소리로 이르신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1).” 기도해야 한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나의 시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수시로 이를 일러주었다.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하여 의인이라도 수시로 미끄러져 넘어질 뻔하기 십상인데,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먹고 사는 일에 전전긍긍하며 자기 밥벌이에 정신이 팔린 영혼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에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5:26-29).”
가만히 살아온 날들이 온통 주의 긍휼하심뿐이다. 그러니 부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언제나 낚아챌 기회만 엿보고 있는 세상에서, 억새를 닮은 노인의 시선에서 환경을 초월할 수 있을까?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들이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들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시 71:13-14).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더욱더욱 주를 찬송하는 삶으로 마무리되어지기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의 것으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오늘 내가 처한 어려움, 나를 괴롭히는 몸과 마음이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힘이 되고 있으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4:8-10).” 아, 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러할 때,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성경은 일제히 우리에게 우리의 근본을 알려주고 계셨다. 나의 남은 과제는 이제 그 하나님을 알리는 일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
(시 71:15-16).
돌아보면 나의 모든 우여곡절이 주를 더욱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 어릴 때 나의 아버지가 그처럼 나에게 들려주었던 말, 하나님이 특별히 너를 참 사랑하신다는 말이 이제는 실감이 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그러므로 내가 하는 한 가지 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그렇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오늘 시편의 말씀도 이를 나에게 들려주시는, 나의 느림이 나로 이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 말씀에 시선을 두게 하는 것이었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70: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