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출 1;20-21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 74:16-17
서로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 마음은 믿을 수 없고 세월은 잔인하게 흐른다. 이때 말씀 앞에 서서 이를 귀히 삼을 수만 있으면 복이다. 오늘 나는 산파들이 주를 경외하였다는 데서 복잡한 심경을 헤아려본다. 서슬이 시퍼런 바로의 명령이다. 자신과 가족들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당장의 두려움이냐 그것까지도 주관하시는 이를 경외함이냐 하는 기로에서 나이든 여인들이 갈등하는 것을 상상한다. 결국 주를 경외함으로,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출 1;20-21).” 그로 인하여 자신들의 집안과 백성들이 흥왕하였다. 세월은 흘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과 저들의 횡포는 극에 달한 지경에서였다.
이어서 오늘 시편의 찬송이 은은하게 흐르는 것 같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 74:16-17).
이를 알고 믿는다면 궁극적인 우리의 선택은 하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9:9-11).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곧 주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있지 않으면 모든 묵상도 경건도 기도도 헌신과 봉사도 헛되다. 이는 마음으로 감정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라 어제는 이랬다가 오늘은 저랬다가 한다. 말씀을 토대로 하여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 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6-17).”
나의 하루하루의 삶이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로 산다는 것은 날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이는 곧 말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씀으로 분별하여 행동하는 일이겠다. 하여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다. 기준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옮겨질 수 없다. 때론 그 기준을 따라 좌우 정렬을 할 때 가까이 설 때도 있으나 멀리 설 때도 있다. 사는 게 늘 일정할 수는 없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같으니 더러는 그러하다 해도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때론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내 생각과 내 기분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억울하기도 하고 공연히 속상하여 소외당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서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 같이 마음이 어려울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은 믿음을 굳게 잡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영광스럽게 여기도록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바울의 이와 같은 진술은 주옥같이 귀하다. 항상 내 것이기를 기도한다.
마음은 또 그러해서, 아이를 만나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이를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평소 아이가 좋아하는 쌈밥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서운해 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도 아이는 그것으로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누가 이 아이를 ‘아픈 아이’라고 하겠나싶다. 소위 정상인들보다 배려도 이해도 낫다. 야외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실은 열에 반은 잘 연결이 안 되는 대화이다. 그래서 헬스를 하면서 몸을 만들고 나름의 꿈을 가지면서 활기차게 생활하려 하는 게 기특하였다. 다만 가끔씩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목사님! 제가 다음은 뭘 하면 될까요? 하고 일일이 물을 때이다.
같은 또래 같은 질병을 가지고 있는 누구에 대해 들었다. 저는 통제 불능이라, 정신과입원을 반복하면서도 점점 더 그 성향은 괴팍해져가는 모양이었다. 항상 억누르고 다스리면 될 줄 알았던 그의 부친은 서서히 장성한 아들을 두려워한다. 어릴 때부터 안쓰러워하던 모친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퇴원하고 집에 있을 때는 술 담배에 절어 게임에 몰두하거나 제 멋대로 구는 것을 누구도 통제할 수 없다고 하니, 나는 내 앞에 두시는 이 아이를 주께 더 소중히 아뢴다. 때론 장난스럽게 때론 비루하게 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으로 아이는 되레 나를 위로하고 돌본다. 그러면서도 엄마와 잦은 충돌을 일삼는데 그 원인은 늘 돈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는 뭐라 할 수가 없고 나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에서 아이를 생각한다.
이런저런 것을 전혀 모르는 아내가 모처럼 토요일이라 오늘 같이 영화를 보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 나는 먼저 아이가 생각났고, 그럼 아이도 같이 와서 아이가 그처럼 보고 싶어 하던 것을 같이 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결국 내 안에 두시는 이 마음, 히브리 산파들이 바로의 서슬 퍼런 명을 어기면서까지 생명을 귀히 여기고 자기 백성을 위하는 마음도 이러한 게 아니었을까?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딛 3:15).” 우리 곁에 두신 한 영혼, 서로의 문안은 곧 성도의 교제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의 당연한 삶의 모습이겠다. 이는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결국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는 일.
이는 뭔가 대단한 어떤 경건의 모양이나 종교적인 행위로가 아니다. 일상이다. 너무 흔해서 남들과 다를 게 없는 듯한, 그러나 주를 바람으로 주께 더욱 의지할 수 있는, 즉 책임전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해도 괜찮은. 나는 이제 나의 책임을 주께 의탁한다. 어느 날 내가 죽었다는 것, 날마다 나를 쳐 복종시킨다는 것, 날마다 내가 죽는다는 것, 이것은 모두 하나여서 주를 경외함으로 오늘 히브리 산판들이 보일 수 있었던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이 이런 게 아닐까?
내가 어찌 감당하려 할 때는 선한 마음조차 유혹이 된다. 의도나 동기는 그렇듯 선하였으나 사람은 그리 선하지 못하다. 내가 누구를 대하는 데 있어 더욱 신중하고 더욱 주 앞에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은 그래서다. 사람의 감정, 더욱이 남녀의 일이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돈 앞에서는 누구도 결백할 수 없다. 모름지기 그런 것이어서 스스로를 믿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도 없다. ‘난 절대 안 그래!’ 하고 시작했던 일이 한참 어그러지고 난 뒤에야 아차, 싶은 것도 다 그래서이다. 여기서 다시 두 가지 엄히 다루는 마음은 남녀관계와 돈 문제다. 이 일에는 용빼는 재주 없다. 천하의 다윗도 여자 앞에서 한 방에 훅, 갔다. 돈 문제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것을 먼저 생각하는 아간이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교훈이 된다.
서로를 귀히 여긴다는 것은,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6).
여기서 각 지체의 분량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3).
나는 나의 나 됨을 잘 안다. 한 마디로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나를 자부하지 않고 스스로의 결단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생각은 저 혼자 들락거리기 일쑤며 마음은 조울증을 앓는 이처럼 조석 간에 바뀌어서 나도 조절하기가 어렵다. 하여 이 모든 일에 있어 주께 아뢰고 주 앞에 먼저 엎드리는 것, 나의 나 됨을 바로 잡으실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는 게 외에 달리 중요한 것은 없다. 앞서 주께 토설하지 못하고 눈물 흘리며 아뢰지 않으면 자꾸 사람 앞에서 그 짓이다. 왜 자꾸 운다. 심지어 드라마나 누구의 사연을 들으면서도 쩔쩔매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게 나 자신도 다르지 않음을 고백한다. 단지 나이 들면서 호르몬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감정이란 어린애나 늙은 사람이나 서로 다를 게 없다.
좋을 때야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다, 일정한 거리에서는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처럼 장담하다, 어느 순간, 개뿔. 세상에는 '난 안 그래!' 하고 장담하는 인간이 가장 못 믿을 인간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곁을 가까이 하면 분 냄새가 나기 마련이고 그 향취에 나도 모르게 이성을 잃는 게 성적인 유혹이다. 또는 견물생심이라고 보고 만지고 소지하기 전에는 그런 것에 전혀 마음이 없는 것처럼 굴지만, 이 또한 개뿔. 모두 감정이 하는 일이라 감정은 간사하고 몸은 줏대가 없어 안 그럴 줄 알았던 인간이 뒤로 호박씨 까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 13:13-14).
먼저는 주를 항상 곁에 모심이고 다음은 서로를 섬기는 일이었다.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주의 마음으로가 아니면 이 모든 일은 허사다. 저들 히브리 산파들의 결정이 단지 영웅적인 일로 그치는 게 아닌 것은 저들 마음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우선하였고, 이는 목숨을 걸고 주를 믿고 주의 자녀를 사랑함이었다. 이에,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몬 1:7).
결국 우리의 사랑은 주의 것으로다. 나의 동정이나 안타까움, 측은지심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그것이 남녀의 문제면 더욱 더 그러하고 심지어는 자식과 부모, 부부의 관계에서도 주의 마음과 주의 사랑이 배제되면 이는 모두 악하다.
나는 어느 가정의 어떤 불행을 전해들을 때 가정 먼저는 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인가, 하고 살핀다. 누가 뭐래도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조심할 줄을 안다.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아는 일이다. 그리고 저들의 일을 전해들을 때, 저들은 나를 목사로 알고 기도를 부탁하나 그 기도의 질은 조악하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곧 저들의 요구는 기도로 아뢸 내용이 아니다. 심지어 누구는 자신의 누구, 죽은 자를 위하여서 기도를 부탁하기도 한다… 저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에 아홉은 다들 당장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 누구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염두에 두고 주의 뜻을 먼저 구하고 바라는 경우는 드물다. 그저 병 낫기를, 돈 문제가 해결되기를, 건강이 회복되기를, 문제를 문제로만 여기고 부탁한다.
이는 꼭 목사가 아니어도 되고 하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해결되기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부처면 어떻고 천지신명, 용한 점쟁이면 또 어떻겠나? 목사라 하여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들이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겠으나, 누구의 영혼 구원을 두고 또는 주를 더욱 온전히 바라는 데 있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아룀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그 내용을 들고 용한 점집을 찾든 저가 적어준 부적을 품에 안고 살든 들어주지기만 한다면야 손바닥에 왕 자라고 못 새기고 다닐까? 도대체 부끄러운 게 없다. 두려움이 상실한 시대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개똥으로 알고 사는 것이다. 그런 기도는 개도 안 물어간다. 백 날 구한들, 차라리 해결되지 않는 것이 저의 영혼 구원에 일말의 가망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겠다. 차라리 건강이 회복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더 끝간 데 없이 궁지에 몰려 이내 두 손 들고 주 앞에 나아오는 것이 복이다.
아이가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어떤 부탁, 다음에 뭘 하면 될까요? 할 때마다 나는 주춤하다 주께 아룀으로 주께 넘긴다. 순간순간 주께 묻는 것이다. 난들 어쩌겠습니까? 하고 아이가 내게 묻듯 나는 하나님께 묻는다. 이에 말씀은 이르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전 16:23-24).
바울은 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앞에 두었다. 저는 또한 그것을 붙들고 남을 사랑하고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하였다. 그게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이다. 하여,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 3:14).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저의 영혼을 두고 주가 행하신 바를 따름이지, 저의 오늘을, 당장의 어떤 위로나 처지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더욱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주를 경외함으로 지속되어야 할 일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4:7-8).
이를 오늘 시편에서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심이 주께 있음을 되새긴다. 낮도 밤도, 인생의 좋은 시절도 나쁜 시절도 모두 주의 것임으로,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
(시 74:12-15).
이를 바로 안다면,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