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전봉석 2021. 11. 9. 05:18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 4:12-13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 77:10-11

 

 

실제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발목을 잡곤 한다. 나름의 판단과 기준이 그 걸림이 된다. 오늘 본문 첫 구절의 의미가 이를 함축한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 4:1).” 누구라도 그런 판단을 하겠다. 그러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설득하신다. 화도 나고(14),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듣지만(24) 그럼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우리는 참 지긋지긋하게 말도 안 듣고 자기 생각에 시달린다. 오늘과 같은 말씀을 접할 때면 저게 나인가? 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바람이 몹시 불고 비가 내리더니 날이 금세 추워졌다. 월요일은 다음 주일 본문을 읽고, 주석도 찾고, 그 의미와 인용할 구절을 살핀다. 점심때는 아이가 오고 같이 식사를 하고 커피를 같이 마셨다. 누구나 이런저런 환경에서도 나름의 생을 산다.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그 고집으로 더디 믿기도 한다. 사람을 마주하고 대하는 일보다 말씀을 준비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일이 좋다. 그럴 때 나 또한 ‘모세의 숙소’에 들어가 이내 뭉그적거리기 일쑤다. 그래서 유익은 규칙적인 삶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지만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한 이유다. 돈도 시간도 마음도 쓰이는 게 한 사람을 대하는 일이겠으나 주가 맡기시는 한 영혼으로 저를 대한다. 누구의 일을 듣는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이 무언가? 어제는 말씀을 준비하는데 시의적절하게 그 의미를 알게 하셨다. 시편 72편을 3연으로 구분하여 1연은 1절에서 7절까지로 <우리가 구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란 주제를 살폈다. 이는 솔로몬의 시다. 어쩌면 누군가 저를 위해 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노년의 다윗이 아들 솔로몬을 위해 지은 것이란 논리도 그럴 듯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지었든지, 내게 들려주는 말씀으로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다. 그럴 때 시편의 기도처럼 “주의 판단력”을 내게 주소서, 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시 72:1).

 

하나님이 모세를 백성들에게 보내는 데 있어 모세의 태도는 매우 미심쩍은 듯 이런저런 우려를 먼저 표출한다. 그러할 때 오늘 솔로몬의 시편은 하나님께 주의 판단력을 먼저 구하도록 지도한다. 잠언에서도 “지혜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4:7).” 하고 저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명히 하였다. 곧 바울도 이에 따른 근거로 첫째,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구한다. 둘째,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바란다. 셋째,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한 삶을 위해서이다. 넷째, 그 안에 우리에게 맡기신 영광과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힘의 위력이 역사하실 것을 알기를 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으로 살기 위하여서도 ‘주의 판단력’을 지녀야 한다. 이는 공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시 72:2-3).

 

여기서 산들은 우리가 의지하려는 것을 상징한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기댈 수 있는 산’을 찾기 마련이다. 하여,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21:1).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나름의 열심과 판단으로 일을 이뤄가려하지만 이내,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2).

 

하는 고백이 우리 성도의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로 알게 하시는 것 하나,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이 땅의 많은 위정자들이 공의를 외치고 자기들 나름의 기준을 들고 그 잣대로 정의와 공의를 실현한다고 장담하지만,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신 24:17).” 이 사소하고 간단한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게 또한 그 한계이겠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 56:1).” 여기서 우리의 기준은 이 땅의 사회 구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구현될 공의를 익혀야 한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4:1).” 그러나 그게 참 묘연하기만 한 것은 저마다의 기준으로는 어림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 세상이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 호소한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 72:4).

 

이것이 우리 ‘왕 같은 제사장’의 권한을 가지고 사는 믿는 자로서의 사명인 것이다. 즉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잠 29:14).” 우리 모두가 각각의 터전에서 성실히 신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31:9).” 신원한다는 것은 ‘가슴에 맺힌 일을 풀어주는 일’이다. 그런 주의 심정으로 누구와 마주하고 저의 말을 들어준다.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와 해야 하는 격려는 주의 사랑으로다. 곧 하나님의 자유, 그 마음을 알게 하는 일이 곧 우리 믿는 자들로서의 사명이겠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시 146:7).”

 

나로 오늘의 내게 되게 하심을 묵상할 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정의구현이고 공의로운 삶의 예행이다.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시 72:5).

 

우리 어둠을 비추시는 하나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 14:2).” 이를 묵상할 때면 어째서 나 같은 이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셨는지, 우리는 그 기준을 알 수 없다. 다만 주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어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그 목적은 하나, 나로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처럼 교회를 지키고 한 영혼을 건사하는 일을 두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목격하게 하신다.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 72:6-7).

 

고로 우리의 삶이 저들에게 거울이 된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한다. 증인으로의 삶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싫어한다. 안 믿는 자들은 우리의 생각을 거부한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 4:2-40).” 그럼에도 믿는 자의 숫자 또한 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는 영원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6:7).”

 

시적 구조를 따라 연과 행으로 나눠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쪼개어 분절로 들어찬 주의 놀라우신 지혜를 깨닫게 하심은 귀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누구를 대하고 어떤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 말씀으로만 말씀에서 이를 받는 게 더 좋다고 여길 때가 있다. 마치 베드로가 변화산상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로 내려오고 싶어하지 않은 심정과도 같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같이 하나님은 이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신다. 주의 백성들을 위하여 우리로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2연의 주제는 그것이었다(시 72:8-11).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통치로 굴복하게 하신다.> 곧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28).

 

이를 반드시 실현하시는 데 있어 우리로 주의 영광을 세상에 알리게 하시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어째서 그리 행하시는가? 이는 먼저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이다.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시 72:7).” 하고 노래하였던 시인은 결국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주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섬기게 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11).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그러니까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은 공의를 실행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4).” 이는 일시적인 정권 창출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말로 벌이는 전쟁의 설전이 아니다.

 

그래서 시편은 3연(72:12-17절)에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은 그리스도의 의-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는 주제로 가닥을 잡았다.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시 72:14).

 

이는 곧 하나님께 찬송이 된다. 즉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15).” 이는 엄연한 결말이다. 솔로몬이 주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했던 것도,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왕상 3:11-12).” 단지 눈앞의 이익이나 자신의 요구를 아뢰기보다 주의 뜻을 바로 알고 이를 구현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면서 오늘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것은 배가 물 위에 떠 있어야지 물이 배에 스며들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이를 위해 바울 사도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무엇을 하든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만 있다면,

 

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시 72:16).

 

그럼 다른 모든 일은 주가 책임지신다. 오직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저 아이를 생각함도 누구의 일로 같이 씨름하는 것도 그저 측은지심으로 저를 동정하는 것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축복을 누린다.’ 그래야 하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시 72:17).

 

곧 우리의 복은 이 땅에서 추구하는 저들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러자고 우리를 구원하신 게 아니다.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의 영생이었다. 노후를 준비하며 젊은 날을 죽어라 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처럼, 하물며 영생을 위한 것은 무엇으로 준비하고 있는지?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이를 알 때에 오늘 모세가 받은, 누리는 특권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새삼 묵상하게 된다.

 

하필이면 왜 모세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고민이 아니다. 그런 주제는 쓸모가 없다. 어떻게 누구는 믿는 자로 누구는 영원히 믿지 않는 자로 구분되었는지도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다만 오늘 이처럼 우리는 말씀 앞에서 주의 음성을 듣는다. 이로써,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72:18-19).

 

이는 시편의 송영에 해당하며 우리의 기도와 찬송의 모든 마무리에 해당한다. 오늘 시편도 이를 찬송하고 있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 77:10-11).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공통된 모습은 일치한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2).

 

곧 오늘 하루도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내 입에 머금고 읊조리며 ‘주의 행사’ 곧 나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주의 놀라우신 은총과 긍휼하심은 ‘낮은 목소리로 되뇌이는 것’이 복되었다. 고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2).

 

다른 위로는 일시적이고 즉흥적일 뿐 영원할 수 없는 것이어서,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13-15).

 

그렇게 오늘 말씀에서도, 나의 현실에서도,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