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출 6:30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 79:9
우리 안에 이는 여러 감정 중에 의심과 회의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모양이다. 하긴 저의 말처럼 자기 백성들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데 하물며 애굽의 왕이 듣겠나싶은 것이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출 6:9).” 앞서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2).” 직명이 아닌 본명으로 알리시는 데는 그만한 무게와 권위가 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3).” 한데도 백성들 뿐 아니라 모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곧 우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그 감정이 표출된다.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도 자신의 감정이 걸림이 된다. 가령 누구에게 ‘아버지 하나님’은 엄하고 차갑고 무뚝뚝하다. 저는 무의식 가운데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로 투영된 것이다. 이를 알리어 말해주었는데 얼마나 씨름하고 바른 관계를 회복하였는지, 그 뒤로 이런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다. 아마도 그때 ‘그 불편함’에 대하여 글로 써보게 하고 이를 지켜보게 하였는데 저는 끝내 그것을 같이 나누지는 않았다. 혼자 써보기는 했다는데, 그만큼 우리 안에 케케묵은 감정은 골이 깊다. 스스로 부정하고 외면하며 잘 사는 것 같지만 뒤틀린 옻나무가 이내 수령을 다하지 못하고 비틀어진 자신을 흩어놓는 것과 같다. 내 안엔들 어찌 묵은 감정이 없겠나? 그때마다 요즘 묵상하게 되는 시편이…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뒤집어보면 사무친 감정은 오히려 승화되어 주를 더욱 깊이 찬송하게 한다. 나는 누구의 어떤 아픔, 슬픔과 그 안의 노여움을 들을 때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느끼고 누릴 저의 넉넉한 공간을 상상하게 된다. 가령 돌짝밭의 돌멩이들을 고르다 묻혀 있는 커다란 돌에 호미가 튕기면 그것을 가늠하여 파내는 일이 보통은 아니겠으나 파냈을 때에 그만한 크기의 허공이 땅 속에 생긴다. 그만큼 채워야 할 흙,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가 크고 깊고 넓은 것이다.
시편을 묵상하면 이는 마치 모든 감정의 종합장인 것 같다. 미움과 설움과 탄식과 한숨이 우리로 비탄하게 한다. 내 안에 버려져야 하는 좌절과 낭패가 오히려 주를 찬송하게 하는 수금과 비파가 된다. 곧 나의 노여움으로의 초대가 그 안에 생생하다. 어느 상담가이면서 목사인 이의 표현처럼 ‘영혼의 울부짖음은 해산하는 고통과 같다.’ 엄마는 거침없이 비명을 지르고 고통을 표출함으로 한 생명을 출산한다. 그 과정은 저의 안의 모든 오물도 함께 뒤섞여 나오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우리 안에 생겨나는 반항과 반문은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인 게 맞습니까?’ 회의하게 한다.
오늘 모세는 저의 마음을 가감없이 표출한다. 훗날에 다윗도 이러한 감정을 발판으로 50여 편이 넘는 시편을 남겼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1).
다윗과 마찬가지로 모세의 시편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90:1).
저의 유명한 기도는 여기서 나온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4-6).
주 앞에 우리의 생이란 얼마나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인지,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7-10).
이와 같은 시를 묵상하고 있노라면 마치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듯 저의 기도가 나의 것이 된다. 이를 보면서 우리의 감정이 결국은 하나님께 시선을 두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와의 대화나 저의 속엣 얘기를 귀담아 듣는 까닭도 그의 원망과 불안 가운데는 태곳적의 버림받은 기억(도피, 회피)과 이를 다시 찾으려는 욕구(분노)인 근원적인 ‘에덴’을 향한 결핍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날들,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날들로 우리의 기억은 왜곡되고 뒤틀려서 변이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님 앞에 설 때의 그 황망함에 대하여,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1:4).
오직 주께로만 고개를 돌리며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관계 속에서 뒤틀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한다. 에덴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공격성을 띄고 스스로는 되찾을 수 없다는 데서 회피성을 지닌다. 서로의 사랑은 곧 경멸을 가져오고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려고 두신 본래의 감정들은 모두 변질되어 뒤틀리고 말았다. 사랑이 거절당하면서 분노가 생겨나고 두려움이 이를 부추긴다. 시기와 질투가 밀려들면서 절망도 따라온다. 서로의 관계는 늘 싸우거나 회피하는 데 그 감정을 다 소진한다.
‘아픈 아이’와의 대화가 예시처럼 나를 일깨우고는 한다. 저에게 엄마란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분노와 미움을 상징이기도하다. 무슨 말끝이면 엄마에 대한 원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엄마에 대한 공격적인 언사는 고스란히 하나님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저의 감정을 지배하였고 이를 억지로 약물로 다스리려하다 지능까지 저하되고, 그의 세계는 여러 개로 쪼개져서 허공을 날아다닌다. 망상이란 그런 것이다. 현실과 망상은 너무 친숙하게 붙어 있었다. 엄마의 사랑이라 여겼던 것이 저를 미워해도 되는 근거로 작동하는 것을 본다.
어제는 엄마가 미안하다고 했어요! 저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가만히 시선을 맞추었다. 갑자기? 하고 묻는 시선이었는데, 저는 깍두기를 어기적어기적 씹어대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약을 주면서 한 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다. 나는 늘 앞뒤가 생략되는 저의 말의 세계를 쫓아가기 바쁘다. 되새기다 보면 의미 없는 말인 것 같으나 하고 싶어 하는 말이었다. 엄마가 왜 갑자기 미안하다고 한 것인지, 자주 그러는지 혹은 느닷없이 그런 것인지, 나는 되묻기를 포기하고 여러 생각으로 시달리듯 미간을 좁혀 생각을 더했다. 그럴 때마다 소용없는 일이다.
4년째, 나는 앞에서 영수증으로 받은 종이를 비행기로 접었다가 풀어놓고 아이에게 접어보게 하지만 소용없는 일과 같다.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매번 그 일을 반복한다. 비행기 하나를 접어 완성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다시 풀어놓은 종이를 접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 직면하게 하려는 것이다. 때로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그만둘까 하다, 나는 또 비행기를 천천히 접고(설명까지 하면서) 종이를 펼쳐서 아이 앞으로 내민다. 아이는 여러 번 시도하다 구겨진 종이를 내민다. 우리의 감정은 이처럼 어렵고 가혹한 것이다.
우리 안의 내면은 상실감으로 허하고 소외당한 듯 고통 중에 신음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 해도 저로부터의 외면을 경험한다. 상실감은 희망을 앗아간다. 가끔씩 아이는 거부하듯 그만, 그만, 하고 손을 젓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행기를 접어 아이에게 내민다. 그러면 아이는 못 이기는 척 그것을 그대로 풀었다가 다시 접는데 번번이 접힌 데가 겹쳐 구겨지고 만다. 굳이 그런 마음으로는 아니지만 나는 아이의 상실감으로 우리의 잃어버린 희망을 생각한다. 엄마가 어제 저녁에 미안하다고 했어요! 언제? 약 먹기 전에요! 무슨 일 있었어? 아뇨! 전혀! 그냥, 그래요. 뭐가? 엄마가? 너, 기분이? 질문이 여러 개 겹치면 아이는 답을 잇지 못한다. 마치 접히고 또 접힌 영수증 작은 종이의 여러 겹의 선 같다. 더는 어디로 접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새것을 그대로 내밀고 종이비행기를 접어달라고 하면 아이는 여러 번 시도하다 난감해한다. 그러는 동안 여러 겹의 선들이 포개지고 겹쳐져 나중에 제풀에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소유욕은 여러 번 접었다 펼쳐진 종이처럼 너덜거리다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소유하지 못한 감정은 소외감으로 이어져 고작된다. 그리고 거절된 기억으로 소외감을 부풀려 재생산한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소유욕, 욕심에 대하여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이것이 세상 이치이면서 동시에 훼손된 하나님과의 단적인 관계의 결과이다. 즉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
우리의 절망은 우리로 우리 자신을 숨긴다. 스스로도 너무 잘 숨겨서 어느 게 진짜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산다. 실상은 외로움으로의 도피다. 외로운 게 싫으면서도 외로움으로 안도한다. 내면의 갈등-자신을 직면할 때의 두려움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이를 소망으로 두고 생각하였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잠 13:12).” 희망이든 바라는 것이든 소원이 상한 마음과 만나면 마치 곰팡이 균처럼 삽시간에 옆에 것들로 전이된다. 그래서들 무슨 이야기를 하다 구체적으로 접근하려 들 때면 ‘다 그래요, 원래 그래요.’ 하는 말로 버무려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픈 아이’와의 대화가 진지한 날은 한보따리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를 받아든 기분이다. 3차 방정식을 대입하고 고차원적인 원리를 적용하려 공식을 찾아, 그 선을 따라 천천히 접어보지만 번번이 겹치고 덧대어져 어느 게 처음 접힌 선인지 더는 분간하지를 못하는 아이가 된다. 저는 아프니까 그렇다고 하지만 모두가 다를 게 없다. 멀쩡해 보이고 전혀 아무 문제없는 것 같아 보여도 실상은 더 케케묵은 감정이 그 안에 부유물처럼 가라앉아 있다. 순간 무슨 일이 휘저으면 삽시간에 앞을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자신이 병자라고 느끼는 아이가 내 곁의 여러 인물들 가운데 가장 정직하다.
기어이 어느 목사는 문자를 읽고 아무런 답이 없다. 나는 은근히 속이 타지만 기다릴 뿐이다. 저의 답을 기다린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다음 일을 어찌 진행하실 지를 말이다. 누가 글을 써보고 싶다고 하고(글을 써보고 싶다는 말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풀어놓겠다는 것인데) 꽤 오랜 시간을 묵묵부답이다. 전에 같으면 저를 보고 내가 조바심에 못 견뎌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어찌 행하시려는가하고 궁금증을 잃지 않으려 메모해두고 기억한다. 어디 쪽지에라도 적어 저의 이름과 그 간단한 의미를 적어 붙여둔다. 물론 그래놓고는 나는 잊고 있기 일쑤다.
한두 번 권한 것으로 됐다. 대나무는 싹을 내는 데 4년이 소요되고 매미는 한 번 흐드러지게 울어 짝을 찾는 데 7년 반을 땅 속에서 씨름하다 고작 칠 일을 살다 간다. 하물며, 우리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한 것이다. 흩어져 나는 없어지고 주의 뜻만이 전하여지기를. 그러니 사람 속을 누가 알까? 나에게는 무려 25년 이상의 암흑기가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살아온 날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기다리시게 하였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그때마다 내 곁에는 하나님이 붙이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게 지겹과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경우도 더 많다. 어떤 이는 직접적으로 어떤 이는 간접적으로 왔었는지조차 기억에도 없다. 오고 가는 일이 저들과의 관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함이었다. 만남에서 내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게 된 계기는 전혀 엉뚱하게도 그대로 방치하고 살았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부러지고 난 뒤에야 숱한 믿음의 사람들이 군사들처럼 행군하는 소리에서였다.
인생이 모진 것은 그래서다. 결국은 넘어지고 자빠져서 아이쿠야, 하고 어디가 깨지고 부러져야 안다. 기어이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꺼이꺼이 울면서 안다. 나는 아이엄마가 어째서 미안해, 하고 말하였는지 알 것 같다. 그저 단순한 감정의 요동이 아니라 늘 되새겨 자기 삶의 발판이 되는 저의 노여움인 것을 말이다. 그 노여움으로 부디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저 바람에 이는 수면의 물결처럼 변덕스러운 정도의 감정으로 그치지 않기를 말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4-5).
우리로 미안해 하고 두려워하게 하심은 주를 바라보게 하려 하심인데, 불의한 분노는 공격적인 방어를 취하며 번번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비틀어버린다. 그래놓고는 비틀린 제 손목의 고통으로 쩔쩔매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산다. 오늘 시편은 그것을 일깨운다.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시 79:2-3).
이를 우리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럴 때 우리 안의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온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5).
화살을 주께 겨누고 씩씩거리는 영혼들이 늘어간다. 그리고 애원하듯 간구하기를,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6-7).
우리의 거처가 황폐해질 때, 비로소 회개가 나오기는 하려는가?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8).
회개가 있은 뒤 모든 것이 인정되는 순간 주를 더욱 바라고 사모하고 자신의 죄 된 목습 앞에서 치를 떠는 것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9,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