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출 8:23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시 81:13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다. 이런저런 일들이 뒤섞여 아무리 세상을 어지럽힌다 해도 주의 시선은 언제나 우리에게 향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잔혹해진다. 어떻게든지 취하여 차지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이를 내버려두시기도 한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시 81:11-12).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차라리 혼나고 꾸짖음을 받아서 돌이켜 다시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 복일 텐데,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우리 안에 어떤 욕구가 없다면 어찌 살겠나. 한데 그것이 절제를 더하지 못하면 그릇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다. 즉 성도로서의 온전한 성장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것일 테고. 하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이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즉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간다는 것은 그 영혼의 일이기도 하겠다.
매번 되새기게 되지만 왜 성령의 열매 중에 절제를 그 끝에 두시고 사랑을 앞세우셨을까? 하는 데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즉 우리 사람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함께 영생을 누리고자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를 지키시고 기다리시며 참고 또 확신과 소망을 더하신다. 그래서 주의 사랑이 우리로 앞에서 견인하신다. 사랑이 없으면 뒤에 오는 모든 희락과 화평과 자비 들도 허사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속성들이 온전하려면 맨 뒤에서 절제가 이를 받쳐줘야 한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모두 사랑이 없이는 시작될 수 없고 절제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절제 없는 사랑은 그릇되어 자기 욕망을 따라 변질되기 십상이다. 이런저런 사연과 그 가정의 불화가운데 열에 아홉은 왜곡된 사랑의 표현으로 ‘위하여’가 폭력이 되고 지나친 간섭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릇 행하여 불륜의 현장에도 사랑이 동원된다.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에 절제가 없으면 뒤틀린 욕망의 도가니가 사랑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희락과 화평도 참 기쁨과 온전한 평안이 절제가 없이 욕구를 따를 때 즉흥적인 쾌락이 되고 안이한 무력증으로 나타난다. 모든 변태적인 행위에는 희락이 절제함을 더하지 못해서 생겨난 것이다. 화평보다 무서운 나른함도 없다. 불의에 대해 굳이 맞서서 싸우려하지 않음으로 죄악은 방치된다.
절제가 없는 오래 참음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자기 신념이 믿음으로, 그 의지가 선행으로 읽히는 것도 그래서다. 엊그제 누구와의 대화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하고 말해주며,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놓인다고 보았다. 특히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목회를, 주를 섬기는 일을 ‘하고 싶은 일’에 두어 자기 뜻을 펼치려는 데서 모든 사달이 난다. 주의 일을 낭만적으로 여기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그 기준이 돼야 하는데, 성경은 일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는 먼저와 나중이 엄격한 말씀의 표준이 된다. 모든 게 중요하나 모든 것을 건사할 수는 없다. 그럴 때 내게 두시는 상황 속에서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는 것.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 누구보다 뭉그적거리며 여러 날을 허송세월한 사람으로서 그 기준이 온전하지 못하면 그리 어그러지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
그때마다 주의 자비하심이 나와 함께 하셨는데, 이를 알면 알수록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주께 구한다. 그렇지만 절제 없는 자비는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생활을 유발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착하고 선한 사람 같으나 저의 자비는 어떤 무자비한 냉혹함보다 차가울 수 있다. 이어서 절제 없는 양선은 남에게 인정받고 존중받는 데 급급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서도 조건부적인 희생이 따를 뿐이다. 절제가 없는 충성은 맹목적인 의리와 속도 없는 속물이 되게 한다. 아무런 사고와 성찰 없이 명령에 복종하는 가신(家臣)으로 전락한다. 절제 없는 온유는 맹물 같아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데, 사람 좋은 건 그 속을 다 모르기 때문이다. 온유함이란 실제 그 마음이 엄격하여 ‘하나님만으로’ 그 앞에서 이리와 양과 사자와 토끼가 한데 어울리는 낙원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절제 없는 절제는 완고함으로 자기 기준에 엄격하여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할 일’을 기준으로 따라야 하고,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에 정도를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든지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지 않다. ‘그 중심을 보신다.’는 말을 나는 그리 이해한다. 그럼 우리의 중심, 그 확신은 무엇을 바탕으로 할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은 기다림과 동일선상에서다. 기다림은 때로 잔인하나 절제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기다림은 결코 무력한 것이 아니며 그저 막연한 상태는 더더욱 아니다. 그 어떤 무장보다 단단하여,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 27:14).
또한 기다림은 하나님으로 도움을 삼는 엄청난 무기와도 같다. 다른 어떤 세력보다 무서운 것이 기다림이라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다. 특히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 다들 마흔이 넘어 쉰 살이 지나 어느덧 여든이 되어가는 때에는 그 의미를 안다. 살아온 날이 예상 같지 않았다.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면 좀 다른 인생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쉰 살아 넘어가면서는 하늘의 뜻을 안다고 내 뜻대로 되는 게 업구나! 하는 놀라운 가르침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33:20).
그러므로 기다림이란 그 기준이 엄연하여 말씀으로 중심을 잡는 일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130:5).
이게 보니까, 내가 한다고 안달을 부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특히 사람이 사람을 대하고 마주하는 일에 있어 기다림보다 능숙한 관계는 없다. 아이의 실수에도 기다려주고, 누구의 그릇 행함에도 가만히 기다려줄 수 있는 것은 저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을 사랑하고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일도 실은 하나님이 저들을 나보다 더 귀히 여기시고 오늘에까지 내 곁에 두신 것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어제는 뜻밖의 소식이 들어왔다. 아니, 사실은 매우 놀라 여전히 생각이 많다. 아이와 같이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녀석의 일을 먼저 언급하면, 겨우 일이주 전에 그렇게도 굳게 약속했던 ‘충동구매 하지 않기’를 어기고 고액의 이어폰을 사고는 뭐라 싫은 소릴 들을까봐 바짝 긴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럴 거면 정품으로 사지, 하고 아이의 경직된 마음을 풀어주려다 누구의 문자가 들어온 것이다. 녀석은 능청스럽게 '카톡하셔도 돼요!' 하고 눈치는 빨라서! 아무튼 들어온 문자에는 다음 주에 신랑 목사가 같이 오겠다는 사모의 연락이었다. 순간 헉, 하고, 방심하고 있다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밀려드는 어떤 부담감은 기쁨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하였다. 설마, 하고 건넨 말이었었다. 어차피 안 올 거라 여겨서 우리 ‘금식기도라도 할까?’ 하고 너스레를 떨면서까지 저에게 대수롭지 않게 그리 권하고 허세를 부리던 일이다. 물론 꼭 필요해서 한 말이기는 한데, 진짜로 그러겠다고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아이 병의 특징은 그처럼 우발적인 데서 욕구를 푸는데 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번 돈으로 갖고 싶은 것을 갖겠다는데 어찌 말린다고 말려지겠나만? 대체로 뭐에 꽂히면 모든 사고가 그것으로 점령당하는 것 같다. 거기에 뭐라 하면 졸지에 적이 되고, 원망의 대상이 된다. 물론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저 아이에게 참고 견딘다는 것은 가히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이 꼭 '아픈 아이'여서 그런가? 다들 정상이라 하지만 저마다 다르지 않다. 그래도 감사한 건 녀석이 나를 ‘목사’로서 두려워할 줄을 안다. 어려워할 줄 알고, 스스로도 굳게 지키려고 했는데 또 실패(?)하고 그 일로 죄의식까지 가지고 나타나서 용서를 구했다. 바짝 긴장을 하고, 경직된 표정으로, 어쩐지 내 그럴 줄 알았다. 어제는 유난히 문자도 통화다 뜸하다 했다. 그러니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을 두고 뭐라 하겠나만 이어폰은 무선 헤드폰에 무선 이어폰에 유선 이어폰, 택배하는 사람들이나 쓸 것 같은 무슨 작대기처럼 생긴 이어폰까지 온갖 것을 다 합치면 차고도 넘친다.
어쩌겠나? 어르고 달래, 같이 식당에 들어가 앉았는데 사모로부터 온 문자는 더 너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것이 실제 이루어질 줄이야! 헉, 하고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아예 안 올 줄 알았고 안 온다고 하는 게 마땅하였다. 그런데 것도 다음에 같이 오겠다고?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잠시 건물 주변을 서성거리며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급하셨는가보다.’ 하는 마음뿐 달리 왜 그리 쉽게(?) 그러겠다고 한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아픈 아이' 열을 곱해 놓은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러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같이 온다고 하니 그나마 나는 것인지, 어떤 건지.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나? 어떤 말로 저의 뒤틀리고 상한 영혼을 어디서부터 뭐라 말을 꺼내야 할까? 갑자기 나의 마음은 무거워졌고 엄청난 부담감은 삽시간에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큰일 났다.’ 어디 대고 도와주세요! 하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오후 내내 생각만 많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설마, 했지 진짜 이렇게 될 줄이야!
에라, 모르겠다. 그것까지도 모르겠다. 그런 심정이 되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럴 때에 주님이 귀에 속삭이시는 말씀,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내가 염려할 게 아니라고 하시는 것이다. 말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나의 아버지의 성령이시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여러 번 되뇌어 읽었다. 그러게. 것도 또 와야 오는 것이고, 설령 온다 해도 오면 오는 것이지, 어쩌겠나? 말씀을 되뇌 웅얼거릴 때마다 내 심정은 ‘그래도 내가 뭐라고, 나 같은 게 무슨 말로다 저들을 위로하고 붙들 수 있겠나?’ 하는 데서 더는 염려가 또는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복잡하게 하는 것이야 별 수 없는 나의 연약함인 것이고,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바람은 차가왔고 하늘은 높았다. 저만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내가 걷는 이쪽 길에는 햇살이 가득하여 눈이 부셨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으며 먼 길을 돌았다. 돌면서 생각하고 생각하기를 또 여러 번 반복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니 참, 주의 일이란 게 오묘하고 기이하기만 하다. 함부로 나대서도 안 되고 함부로 미적거려서도 안 된다. 저도 놀랐는지, ‘그이가 시간 되면 같이 가겠대요!’ 하고 다짜고짜 문자를 보낸 셈이고, 그 심정은 어떨까? 하고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마침 그때 내 앞에는 아이가 있었고, 그 때문에라도 통화를 하지 않은 게 잘한 일인 것 같다. 둘이 그 일을 두고 통화를 했으면 이런저런 염려나 늘어지게 이어졌을 텐데, 것도 타이밍이 참 기가 막히시다! 당장 내 앞에는 ‘아픈 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것으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었다. 그 정도면 된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그리 확신이 들면서 더는 불안도 염려도 쓸모가 없다는 데 생각이 정리되었다.
어떤 문제를 마주하게 하실 때, 우리 안에는 정당하게 분노와 수치와 절망을 동시에 가지게 하신다. '분노'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죄에 대한 분노이고, '수치'는 우리가 연약한 사람으로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데서 그 한계를 느끼는 비통함이고, '절망'은 이내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간절함이었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시 17:14).
부조리한 사람들의 삶을 두고 분노할 수 있다는 데는 건강한 간구와 의지가 동원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59:11).
그 일로 교훈을 삼아 나를 돌아보고 나의 사는 날 동안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는 데 전념하게 하시는 일이다. 나는 요즘 일련의 사태, 상황을 지켜보며 나의 나 된 것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크게 배우고 있다. 나는 나 하나로도 힘에 겨운 삶이겠으나 하나님이 더하시는 힘으로 산다. 저들에게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할지, 무슨 말로다 주의 뜻을 전하고, 저의 사역의 길을 격려하고 독려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와 아론도 그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이랬다저랬다 하는 바로의 터무니없는 폭정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게 자신들을 그 앞에 세우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거듭하여 나타내시는 그 현장에서, 내 생각, 내 판단으로가 아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되 ‘해야 하는 일’을 향해 나아감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할 때 ‘하고 싶은 일’은 비뀌었다. 굴하지 않고, 주의 뜻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일이 아무리 뒤섞여 뒤죽박죽이 된다 해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 일’로 바꾸게 되면 비로소 알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 미약함 뒤에는 엄청난 폭발이 있다는 것, 그 이상의 일을 주가 행하시려고, 하나님은 이내 하나님의 일은 감추시고 우리로 북돋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시는 거였다. 아, 그럴 때마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69:29).
나의 가난함과 무력함과 무능함과 무책임함까지 주께 모두 내어놓으며,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출 8:22).” 나의 구별됨을 묵상하게 하신다. 그렇게 우리 주님은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23).” 손수 일하신다. 그러니 나는 다만 묵묵히 기다림으로, 무던히 할 수 있는 일을 행함으로 주를 바람인데,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시 81:13).
고로 나의 할 일은 오직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가 행하시는 주의 도를 따르는 것일 뿐. 그래서 실패가 또 좌절이 나를 억누르게 된다 해도 주는 반드시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로 의의 길로 행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나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주시는 자에서' 이를 감당할 뿐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1).
저는 나의 능력이시다. 내가 원해서 하는,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로 이해할 수는 없는 영역이었다. 다만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2).
그래서도 나에게 맡기신 자리, 그 일, 그 역할에 전념하는 것. 마치 노아가 120년을 무던히 방주를 지었던 일처럼,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13, 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