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출 10:20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시 83:1
기다리느니 스스로 나서는 게 나은 것 같다. 후다닥 일을 처리하는 게 더 낫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더디고 느려 못 기다릴 것 같은, 기다림을 기다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진실을 왜곡한다. 우린 누구나 빠른 효과를 바란다. 그렇게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7-18).”
결국 일의 결과는 기다리지 못해 생긴 그릇됨이다.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한 사울 왕과 이내 바라던 혁명과는 다른 것을 보고 예수를 판 유다는 닮았다.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종교적이었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바로의 마음은 점점 더 완악하여지고, 이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음을 성경은 알린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 10:20).” 그러는 동안 조바심 내고 그 고통을 목격하는 저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참다 못해 호소한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시 83:1).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결국을 알기를 바란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39:4).
도대체 언제까지인지, 우리는 주께 토로하게 된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74:10).
참는다는 것, 무던히 참고 또 기다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은사다. 우리의 기다림은 번번이 두려움으로 허물어진다. 예기불안이 우리를 엄습한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그럴 것이란 불안으로 견딜 수가 없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89:46).
조급함은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사람을 들들 볶는다. 이는 병적이라 스스로도 주체할 수가 없다. 아, 우리 안의 탄식이 저절로 기어나온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90:13).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며 이 땅의 현실이다.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연일 돼도 않은 말들로 사회를 어지럽힌다. 대선을 앞두고 서로는 바닥을 드러내며 물고 뜯는 듯 할 말 못할 말이 없다. 서로가 나중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렘 12:4).” 실은 이 모든 게 내재된 두려움 때문이다. 이를 어찌 극복할 수 있을까?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시 22:12-13).
현실이 그러하다 해도,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27:13-14).
기다림의 싸움이고 그 결국으로 우리는 산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일은 강하고 담대하게 주를 기다릴 줄 아는 데서였다. 특히 아이를 대하는 데 있어 그 자식의 일에 어떤 부모가 느긋할 수 있겠나? 지레 겁먹고 앞서 두려움에 속절없는 것이 그 마음이고 보면, 그러니 자신이 나선다. 하나님께 맡기고 주를 기다리느니 자신이 직접 해결하는 편이 더 나은 듯하다. 그러느라 시험을 얼마 앞두고 주일을 지키는 일쯤이야!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서 현재의 예배 정도야! 하고 스스로들 타협한다. 사업은? 어떤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그러니 내 맘 같지 않다. 아,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6:2-3).
하늘이 두 쪽이 나든지, 자식 일이 당장 어떻게 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그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확신으로다. 오늘 성경은 거듭 이를 일깨우신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출 10:27).” 어쩌면 일부러 그러실 때도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려, 그 영광과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알아듣지를 않으니까. 그러면서 동시에 성경은 우리 믿는 자들을 안심시킨다. 듣게 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목격하게 하려 하신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사 35:4).
이와 같은 말씀 전에는 우리도 여느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어쩌면 저들보다 더 안달이다. 믿는다고 하는 일은 안 믿는 자들보다 조급함도 더한 법이어서,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3).” 그리고 목격해야 한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5-6).” 말도 안 되는 역사가 펼쳐진다.
나에게 그 대표적인 예를 내 인생에서 하나 들으라면, 내가 오늘의 나 된 일이다. 나는 결코 주를 전하며 어느 영혼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억지로라도 그 일만은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곤 하였다. 어릴 때부터 사람이 싫었고, 싫은 만큼 저들과 어울리기 위해 무던히 애쓴 결과다. 사울과 유다의 결국처럼 ‘어느 날 나는 죽었다.’ 어쩌다 내가 오늘 이렇게 되었는지, ‘저런 아이’의 말도 안 되는 말에 일일이 대꾸하고 답을 해주고, ‘저런 사람’의 막돼먹은 생활을 두고 같이 씨름하게 될 줄이야. 누구는 굳이 남의 일에 애쓰지 말라는데, 그게 또 내 맘 대로 되던가? 전에는 사막 같던 나의 메마른 영혼이 주를 바람으로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하는 것이다.
곧,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7-10).”
이 놀라운 변화를 스스로의 삶에서 목격하는 사람들이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전혀, 결단코 예상하지 못했던 결국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국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돌이켜 주의 이름 앞에 두 손 들고 나왔으며, 그때부터 불가사의한 일은 벌어졌다. 간단한 예로 나의 생활은 아직도 여전한데 그 와중에 새벽예배를 다니기 시작하였다. 갈 때마다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그때부터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때는 아이들이 모두 학원들 끝나고 오면 밤 11시, 12시를 넘길 때도 있었는데 그때 같이 둘러 앉아 손에 손을 잡고 기도하며 같이 성경을 읽었다. 나도 내가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 더 황당한 것은 여전히 내 곁에는 옛 친구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담배도 끊지 못하였고 술도 같이 마시고는 하였다. 없던 일로 할까 하는 마음이 수시로 나를 붙들어댔으나 신기하지? 그건 그것대로 주의 일은 주의 일대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신대원을 몇 개월 준비했다가 떨어졌다. 한 방에 될 줄 알았는데, 한편으론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다시 일 년, 나의 성스러움과 불경스러움은 혼재하였고, 나의 눈물과 기쁨은 조울증환자처럼 오락가락하였다. 그렇게 새벽예배에 나아가 날마다 울며 ‘어쩔 수 없는 나 자신’을 두고 주와 씨름하였다. 결국 나의 상대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었다. 주의 샅바를 잡고 씨름판에 오른 선수처럼 외로움은 가중되었다.
이듬해에 신대원에 합격하고 모든 게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파산이 오고 더는 ‘내 힘으로 견딜 수 있는’ 여력을 다했다. 그럴 때면 내 곁을 여전히 맴도는 친구들과 나의 스승은 ‘그래도 계속 할래?’ 하고 되묻는 것처럼 나의 어리석음을 질타하였고, 그러는 것이 현실도피의 증거라며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 ‘어지간히 해!’ 하며 나를 붙들었고, 나는 이내 개인회생에 들어갔고, 아들을 건사할 능력이 안 돼 필리핀 동생에게로 보내야 했다. 딸애는 미술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고, 그러는 동안 아내는 묵묵히 곁을 지켜냈다. 그러니 신대원을 울면서 다녔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3년, 6학기를 어찌 견딜 수 있었는지 도무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매 학기 수백만 원의 학비가 없는데 ‘저절로’ 생겼다. 같이 공부하던 신대원의 누구는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학기마다 한 학기씩 휴학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는데, 나 같았으면 그 핑계로 그만둘 걸 알고 계셨는지.
글방이 교회가 되고, 글방의 아이들이 예배에 나오면서 이듬해에 여섯 명 다음 해에 세 명의 세례교인을 세워 교회 구성원을 갖추어갔다. 그러다 목사고시에서 논술에서 한 번, 인성검사에서 한 번 각각 또 낙방을 하면서 ‘이래도 계속 갈래?’ 하는 내 안의 속삭임이 나로 주저하게 하고 갈등하며 주의 뜻에 회의를 갖게 하였다. 이제 외부의 적들-가까운 나의 친구와 스승은 잠잠해졌으나 내 안의 내부의 적들이 여전하였던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신대원하면서 술 담배를 기적적으로 다 끊었었는데, 거짓말처럼 누가 화장실에 멀쩡한 담배와 라이터를 두고 갔다. 다음 날은 혼자 남아 전에는 자주 가던 글방 옆 돼지 껍데기 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역시 내 길이 아닌가, 이 길이 아닌가? 하고 갈등하면서 불안증은 심해졌고…… 그때에 내게 보내신 주의 천사가 있었으니, 위암 말기로 복수가 가득차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려던 길을 우회하여 글방 근처 병원에서 마지막 수술을 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이와 보낸 나의 50일 간의 여정은 지금도 떠올리고 있으면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우리의 생활은 얼마나 다중적인가? 우울증 약에 불안제를 곁들여 약 기운으로 버티면서, 할까 말까 안 하면 안 될까 하는 갈등으로 남몰래 옛습관인 술담배를 몰래 하면서도 나는 매일 아침 글방으로 가는 길에 그녀에게 들러 에베소서를 같이 읽었고, 죽음을 앞둔 저의 두려움과 구원에 대한 불안과 회의를 말씀으로 찾아가며 묻고 답하고 하다, 날 위해 저의 가는 길을 우회하게 하심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50일간의 여정은 나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였는데, 그게 바로 기다림이었다. 주께서 하시라, 주를 바란다는 것은 기다림 그 이상의 사투였다. 그때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아, 이 놀라운 현장을 그녀는 지금 저 천국에서 같이 회상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겠지?
이 아침, 전혀 뜬금없이 나를 사로잡는 마음이 있으니,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 83:18).
이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 사랑은 독생자 예수를 날 위해 내어주시까지 하는 사랑이었다. 바울 사도는 자신 있게 자신의 경험도 들어 우리에게 설교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아, 내가 어찌 오늘의 나로, 나 같은 자가 지존자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누구보다 친밀하게 나의 속됨을 이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뢸 수 있을까? 이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 그때도 그렇듯이 내가 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더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이번 주간에는 누가 그 신랑과 온다. 저 목사를 나는 익히 잘 알지만, 그 답답함에 대하여 주께 고한다. 실은 걱정이 앞서고 특유의 그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은근히 ‘안 왔으면’ 하고 바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또 하나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면 아무도 못 말린다! 모세처럼 당당히 그깟 애굽의 바로 정도야! “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출 10:29).” 이제 때가 되었다. 현실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이젠 잘 알지 않던가? 하나님이 하신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시 86:14-15).
그리하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