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출 11:3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5
여물 먹는 소는 사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세상 그 어떤 모양도 권세도 주께 힘을 얻고 사는 자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그 마음에는 시온의 대로가 있다. 우리 안에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이 굳건하면 굳건할수록 남부러울 게 없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초라하고 보잘것없으나 저는 우리의 왕이로소이다.
오늘 본문은 다음에 이어질 말씀으로 설레게 한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출 11:3).” 아무리 세상이 어떻다 해도 우리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권세와 영광이 있다. 이를 알면 알수록 오늘 시인의 찬송이 새삼스럽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0-11).
이를 아는데 다른 소원이 다 무슨 소용이겠나? 이 땅에서 형통함이 무조건 축복은 아니다. 오히려 잘됨이 못됨보다 못하고 못됨이 잘됨보다 나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누구 내외는 하는 일마다 잘 풀려 어느 변두리로 옮기며 큰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하였더니 몇 해만에 곱절 이상으로 아파트 값이 올랐다. 다시 어디 한적한 전원주택단지로 옮겼더니 몇 해 안 돼 그 옆으로 전철역이 생겨 수 곱절로 지가가 뛰었다. 그리고 또 몇 해 뒤 거의 평생을 등지고 살던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강원도 태백의 어디 산지가, 그게 또 무슨 개발을 맞으며 수백억의 가치로 어마무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재수좋으면 자빠져도 참외밭이라고, 하는 일마다 척척 풀리니 그야말로 복이 늘어진 인생들이다. 한때는 그들을 참 부러워도 하였는데… 다윗의 3대 악장인 아삽이 자신의 경험을 그렇게 노래한 것이 내 마음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1-3).
하나님이 어떤 이에게 선을 행하시는지를 알고, 이를 붙들고 참고 견디며 감사히 산다고 살다가도 악인들의 형통함과 오만한 자의 잘됨을 부러워하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기도 한다. 어찌 아니 그러겠나? 저들은 손 안 대고 코 풀고 하는 일마다 척척 잘 풀리는 것 같으니,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4-9).
그야말로 뭘 해도 잘된다. 이를 복이라 하여 안 믿는 자들은 물론 믿는 자들도 저들의 축복을 기준으로 구하고 바라는 것이야 당연하겠다. 들어가도 잘되고 나아가도 잘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복을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1-6).
그러니 우리가 바라는 복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땅에서의 잘됨과 못됨의 차이가 무엇이며 무엇을 바람으로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할 것인지. 오늘 말씀은 복의 기준에 대해 우리의 바람과 그 소망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것 같다. 한 마디로 먼저 정의하면, 구별됨이다.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출 11:6-7).”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날, 하나님은 우리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신다. 하여,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7:31).
돌아보면 이보다 더 값진 복은 없었다. 부러울 것 없는 어느 내외의 잘됨이 실은 그 속이 실어증 환자 같고 자기만의 세계에 함몰된 경우라, 지하에 아예 남부러울 것 없는 오락실을 꾸며 저들은 가상세계에서 산다. 하나 있는 아들은 천재라, 영재 중고등학교를 순탄하게 밟고 올라가는가했더니, 수능에서 떨이지고 어디론가 잠적을 했다. 띄엄띄엄 전해 듣는 소식이라, 이후 전후 맥락은 알지 못하지만 전에 같이 어울리던 시절을 생각하면 우연히 같이 갔던 친구의 표현대로라면 ‘지구 종말 전날에 그러고 놀지 않겠나?’ 싶었다고 하였다. 그러니 곁에 있을 때는 이를 분별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좋으면 그저 좋은 줄만 알았지….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욥 12:6).
이와 같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분별하며 사는 자가 복이 있다. 저들은 결코 남부러울 것 없는 만큼 하나님을 갈망하지도 않는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시 37:35-36).
이러한 다윗의 시를 다윗의 악장 아삽은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들이 이를 알기까지 얼마나 어리석은 시절을 부러움 속에 살았는지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73:10-14).
그러니 저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괜히 억울하고 분할 따름이다. 나만 손해인 것 같다. 하나님은 부당하고 온당하지 못한 세상을 두고 보시는 것만 같다. 그리하여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기껏 주를 바라고 함께 하던 이들의 배교가 늘어가고 있다. 그야말로 영혼을 끌어 모아서라도 이 땅에서 잘되고 형통하길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 4:7).”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일 겨를이 없다. 그러다 어느 가까운 훗날 우리는 주 앞에 고꾸라져 외칠 것이다.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계 18:19).”
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추억하고 세상 사람들은 과거를 추억한다. ‘그때가 좋았지…’ 하는 저들에게 화 있을진저, 우리는 이제 우리의 환난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당장의 이문을 좇아가는 자의 뒤는 참담할 뿐이라. 보이는 게 결코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가 꿈을 잃지 않는 것은 미래를 추억함인데, 이 모순된 표현은 성경을 근거로 한다. 어찌 겪지도 않은 일을 추억하겠나싶지만, 성경은 예언과 계시의 말씀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오늘의 내가 그렇지 않던가? 예전에 어울리던 저들과의 나는 오늘의 나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앞으로의 나를 알고 그러한 나의 미래를 추억한다.
곧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이는 이미 실현되었고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결국 나의 미래의 추억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를 살면서 삶으로 살아보지 못한 날을 추억한다. 이를 시편은 노래하기를,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72:2-3).
이에 우리에게 더하신 놀라운 예지력은 <주의 판단력>으로,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아직 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이미 충분히 일어난 일로 여겨 이를 사는 삶이 복이었다. 예전의 나는 세상의 판단력을 얻기 위해 그리 수고하여 저들과 어울리려 하였다면 이제는 주의 판단력으로라, 말씀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누구의 일을 두고 생각함에서도, 주의 판단력으로라 하면 주가 바라시는 한 가지 일, 곧 내 안에 두시는 그 한 가지 마음으로 기준을 삼게 되는데…….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5).
이를 참 복으로 여길 줄 아는 것이 복이 된다. 후에 아삽은 이를 주의 성소에서 제한적으로나마 깨달았고 이를 다음과 같이 찬송하고 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73:15-17).
나는 주의 성소에 들어앉아 다다음 주일의 설교본문을 앞서 펼쳐놓고 뒤적였다. 주석을 뒤적이고 인용구절을 찾아 말씀의 근거를 든든히 하다 보니 오전이 다 갔다. 점심께는 아이가 퇴근하고 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이런저런 저의 이야기를 짜깁기하듯 듣고 이해하며 말동무가 된다. 어제는 여러 번 다시 풀었다 접었다하다 드디어(!) 비행기 접기에 성공하였다. 곧 있을 아이 생일에 맞추어 같이 영화를 보자고 약속을 하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산보를 하다 들어왔다. 주의 이름으로 한다. 누구를 대하고 생각함에 있어 이제는 주의 판단력, 곧 주의 마음으로 다가가게 해달라고 빌고 또 바란다. 나의 수고는 쓸모없다. 그 수고는 가볍고 헐거워서 누구의 손을 잡아줄 수도 없다. 아이의 말을 열 중에 한두 개만 알아듣는데도 훌륭한 대화가 되는 것은 주가 하시게 하는 일이다. 난 그저 거기에 있다. 아이는 돌아가 운동을 하고 춤을 추고 늦은 저녁에 성경을 쓰고 잤다. 잠자리에 든 나는 아이가 성경을 써서 카페에 올릴 때마다 징징- 징징- 알림진동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 84:1).
나는 오늘 아침의 시편을 나의 삶의 전반에 놓는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2-4).
이제 나의 복은 기준이 바뀌었고, 그 가치도 엄연히 달라졌다. 세상 누구, 예전에 어떤 친구들의 흥왕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직,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9).
이를 복으로 알고 사는 것이 복 중의 복이라는 것에 확신을 더하며,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0-11).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어느 상가 귀퉁이 구석진 곳에 이름도 없는 교회 같지 않은 교회라 해도, 여기는 여호와의 성전이라. 이를 저들은 알까? 나는 이웃하는 이들과 그 주인을 두고 주께 아뢴다. 이 교회로 인하여 복의 복이 생수의 강처럼 흘러 넘치기를. 비록,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6).
교회가 복의 근원이 되어 주의 복이 흘러넘쳐서 저들의 삶과 가정과 그 사업 위에 임하여 함께 하여주시기를. 하면,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7).
어느 훗날 우리가 같이 미래를 추억하는 그날이 오기를. 교회의 사명은 교회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복이 되었다. 아내는 종종 나에게 ‘교회를 지키는 자’라고 비유한다. 나는 이제 그 말이 듣기 좋다. 종일 들어앉아 하는 것도 없이 꾸벅꾸벅 조는 경비실 늙은이 같다 해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8-9).
그리함으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0-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