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전봉석 2021. 11. 19. 04:18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시 87:6

 

 

때가 겹치기 전, 어떤 일이 엎치고 덮치기까지, 우리는 뭉개고 미적거리며 설마, 하고 또 미룬다. 곧 우리의 미련함이란, ‘죄를 심상히 여긴다.’ 가벼이, 대수롭지 않게, 그럴 수 있는 것으로, 남들 다 그러고 사는 것처럼… ‘자기 행위가 바른 줄로 안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하면 이를 듣기 싫어하고 듣지도 않는다(잠 14:9, 12:5). 결국 저는 저의 ‘입으로 매를 자청하는 셈이다(14:3).’ 그러니 참 갈수록 태산이란 말이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26:11).”

 

그러할 때 우리 안의 수치심이 제대로 작동을 하면, 즉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면 오히려 그것이 유익이다. 성경은 일러,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3-15).” 이를 한 마디로 하면,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이를 위해 우리를 누르던 권세를 십자가로 이기셨다. 곧 우리가 이를 알면 알수록 자신의 부끄러움-수치를 통해 주의 은혜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곧 나를 위하여 우리 주님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5-6).

 

어떤 일, 그 어려움은 나로 하여금 좌절하게도 하나 주의 이름을 부르게도 한다. 어제는 공연히 어려운 하루였다. 마음은 우울하고 몸은 힘들어서 나의 나 됨이 힘에 겨웠다. 그런 상태, 어떤 모멸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주님, 하고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날이 있다. 이어서 이사야의 진술이 이를 나타내는 것 같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7-8).

 

어디에 일이 있어 산책도 할 겸 걷기로 하고 나섰던 길인데, 어디서 순간 어려움이 닥쳐왔다. 돌아갈 수도 계속 갈 수도 없이 나는 자꾸만 서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마음이 어려웠다. 몸은 무거웠고 마음은 생각 같지 않았다. 순간 누구에게 연락할 곳도 없고, 그런 말을 할 사람도 없을 때… 어떤 서글픔은 수치심으로 나를 엄습하는 듯하였다. 남이 들으면 웃을 일인데, 아직도 먼 길을 두고 앞으로 가기도 그렇다고 도로 뒤로 돌아가기도 너무 까마득하여… 세찬 바람에 낙엽들은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있었고, 외딴 길이라 사람들도 뜸해서 나는 한편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순간 한심하기만 하였다. 등짝이 흥건하게 젖었던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졌고, 한참을 그렇게 서서 어찌할까 궁리하다가 결국은 택시를 탔다. 고작 여기서 저기 정도의 거리여서 괜히 나는 민망하고 창피하였다.

 

수치는 우리 안의 고질적인 감정이다. 사탄은 이를 집요하게 공략하고 드러내어 비웃는다. 아무도 개의치 않을 일을 두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한데 그 부끄러움, 나의 수치가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런 상황에 누구에게 연락을 하기도, 이를 알려 뭐라 말하기도 면구스러운 일이어서… 그런데 그 역설은 주를 바람으로 상한 심령을 이해하는 힘을 얻는다. 누구나 자신만의 어떤 수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완고해질수록 이를 대신하는 값을 더할 뿐이다. 허영과 허세가 대표적이고, 다른 것으로 대치하여 그것으로 괜찮은 줄 아는 경우들이 대부분 그래서이다. 많이 배우지 못했다는 열등감이 하나를 가지고 열을 아는 체 하며 살게 하고, 못 가지고 살았던 것에 대한 분풀이나 하듯 명품으로 도배를 한다거나, 소위 남을 괄시하고 자신을 우월하다고 여기는 모든 행태가 우리 안의 수치심이 빚어내는 역기능이다.

 

그런데 또한 동시에 그와 같은 슬픔, 어떤 수치가 우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한다.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한참을 길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상황 중에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솔직히 도움을 청할 사람이 떠오르지도 않고, 그런 일 따위로 하다못해 가족들에게 연락하기조차 부끄러운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예배다. 어떤 슬픔이 주의 선하심을 감사하게 한다. 나는 이것이 내 안의 수치심이 갖는 역동적인 순기능이라 생각한다. 비록 그 근원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먹지 말라, 하신 것을 먹고 스스로 부끄러워 그늘 아래 숨은 처음 사람들의 첫 행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다 아시면서 모르는 척 찾아오시고 그 이름을 불러주셨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8-9).”

 

나의 어쩔 수 없음이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되뇌게 한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시 51:1-2).

 

수치심을 느낄 줄 알아야 사람이다. 사람만이 수치를 안다. 개나 돼지는 부끄러운 걸 모른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수치 때문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를 귀히 여기신다. 그 잘난 어떤 공로보다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4).” 내가 어제 겪은 나의 일을 두고 이런 마음으로 위로가 되게 하심이 복이다. 곧 내가 느낄 수 있는 나의 수치가 오히려 복이 되게 한다는 것,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3).

 

시의 저자인 다윗이 저지른 어떤 행위로가 아니라, 우리의 어떤 부족하고 연약함으로가 아니라, 아니 그 이상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곧 나의 소망이 주의 이름이다. 실제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죄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게 하고 시치미 떼고 우리야의 아내를 자기 부인으로 맞이한 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실은 이를 애통해 하고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수치의 망각이 더 큰 문제였다. 나단을 보내 저의 죄를 지적한 것도 그 죄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한 저의 수치의 마비 때문이었다. 수치를 잃으면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한다. 다시 생각해도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무지가 문제다. 무지가 죄다. 그로 인해 우리의 정체가 상실되는 것이다. 죄는 더 이상 문제될 게 없다. 십자가의 도가 이를 모두 갚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과거와 미래로부터 소망을 빚졌다. 이자도 없고, 원금도 갚지 않아도 되는 빚이다. 수치는 우리로 사랑에 빚진 마음을 독촉한다.

 

빌려다 쓰는 마음을 마음이 알지 못하면 이를 몰염치하다고 한다. 우리가 주님, 하고 부르다 눈물이 핑, 도는 것은 그 은혜가 감사해서이지 아직도 갚아야 할 죄-빚 때문이 아니다. 이를 오늘 말씀이 상기시키는 게 아닌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4).

 

이미 더는 가망이 없고 모든 승패가 결정 난 줄 알았는데 실은 우리의 엄청난 오해였다. 사탄이 더한 수치의 수치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무의미하게 여기고 가치 없다고 몰아세운다. 더 해 뭐하나, 싶은 삶을 더함으로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 몰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미, 이김은 여호와께 있었다는 사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곧 우리가 더 이상 갚아야 할 빚은 없다. 죄도 더는 죄로써의 위력을 상실했다. 다만 우리는 사랑의 빚 외에 어떠한 빚도 없다. 하여 오늘 본문은 ‘너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시는 것이다. 그 보장의 근거가 내 안에 있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시 25:1-3).

 

이 놀라운 진리 앞에 나의 위로가 크다. 생각 같지 않은 날들과 마음 같지 않은 몸을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위악함을 느낄 때 바울을 이를 들어 역공을 하듯 진리를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를 안다는 것은 몸으로 마음으로 우리의 온 영혼으로 반응하게 되는 일이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사 50:8).

 

나는 누구에게 공감을 얻고자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또는 나의 마음이 서로의 마음이라 장담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줄 수 있는 한 가지, 어제도 누구를 위로하다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한다는 바울의 설교가 곧 우리 믿는 자의 것이 아니던가, 하고 장담하였다. 울적하고 힘에 겨울 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시는 주의 음성이 때론 야속하다. 부당하고 억울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한데 주는 굽히지 않으시고,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시며 내가 번번이 느끼는 나의 수치를 들추신다. 남들 모르게 잘 위장하고, 스스로에게도 다른 대체로 만족을 대신하려 하던 것을 거둬내시며,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하는 사도 바울의 얼빠진 소리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찌 자신의 약함을, 그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스스로도 ‘죄인 중의 괴수’라 고백할 정도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두고 자랑한다고 하는 것인지. 저의 말이 허세가 아닌 것은,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 놀라운 비밀의 역사를 저는 이제 알았다. 이를 부정하거나 숨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감 없이 누가 물으면 말해준다(고후 12:9).

 

솔직히 나도 좀 아는데, 이건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위하여 그처럼 거짓을 꾸미고 산다. 아는 척, 괜찮은 척, 자기는 별 일 없는 듯 시치미 떼고 산다. 그러느라 사는 데 드는 부대비용이 어마어마하다. 철 따라 남부러울 것 없는 옷도 사야하고, 차도 바꿔야 하고, 어디서 누구를 만나면 허세도 떨어야 하고, 쉴 새 없이 말로다 자신을 변명하고 두둔하고 거짓을 꾸며서라도 그 삶 자체를 도배를 해야 하는 일인데… 인생이란 본래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렘 10:20).” 그런 걸 두고 끝까지 가오 잡다 목숨 줄 놓는 이들도 많다. 그러니 오늘이 나로 같은 상황에서 주를 바라게 하심을 두고 나는 종종 그러는 내가 낯설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시 25:6-7).

 

나의 이와 같은 아룀이 뻔뻔함인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인지, 솔직히 나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입을 삐쭉거리고, 시무룩하여, 마치 골난 사람처럼 뚱하여 말도 없이 돌아누웠다가 일찍 잠이 들고는 평소보다 한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 앉았다. 어제의 우울감이 또는 수치심이 오늘의 나로 주의 긍휼하심을 더욱 바라게 되는 것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나를 옹호하고 내 편을 들어주실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가 이 아침의 묵상 시간을 가장 소중히 다루고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은, 전에는 파괴적이었던 나의 열등감인지 자격지심인지, 어쨌든 그 우울감은 오히려 이제 주의 이름을 상기시키고 주께 고하고 아뢰는, 예배가 되었다. 바람이 몹시 불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어느 길거리에서 나의 주춤거림이 예배가 되고, 금방이라도 누가 뭐라 하면 엉엉, 하고 울음보가 터져버릴 것처럼 속상하고 민망하고 한심하고 답답하던 심정이 도리어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이 되었으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전에는 내가 어떠했는지를 안다. 알면 알수록, 이를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조금은 더 뻔뻔하게 혹은 담대함으로 주 앞에 아뢰고 고하며 주밖에 없음을 오히려 안도하는 일이 되었으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 30:11).

 

이를 어찌 말로 다 옮겨 표현할 수 있겠나? 기어이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 사는 것으로 이를 드러내고 증거 하는 삶이어야 하는 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이것이 우리 수치의 역설이다. 전에는 그처럼 위장하고 감추고 거짓으로 꾸며 살았던 것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시 87:6).

 

나의 나 된 것에 대하여 주를 인정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가장 귀한 은혜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으며, 버려지고 잊혀야 마땅하지 않았던가? 그런 나를 오늘에 두시고 천하보다 귀하다 하시니,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시 87:7).

 

곧,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1, 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