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 16:3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시 89:1
하나님은 그 뜻을 사람에게 숨기셨다. 이를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주를 더욱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다. 곧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오해를 사고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신다.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그런 뜻이 아닌데, 이를 두고 당장의 일로 판가름하고 주께 바라거나 원망하거나 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그럼에도 주의 인자하심은 이를 묵묵히 참으신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시 50:7).
이를 반드시 알게 하실 것이고 밝히 보이실 것인데, 특히 성경은 계시의 언어라 성령께서 이를 열어 보이시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가령 아이로 글을 쓰게 할 때 나는 같이 그 날짜에 맞춰 잠언을 읽는다. 그리고 그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하나 정하게 하여 그 의미를 이해한대로 설명하게 하고 이를 자기 삶에 적용하게 한다. ‘잠언으로 자기분석 글쓰기’라 하면 여느 성경도 다르지 않으나 잠언은 특히 격언이고 묶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어 한 구절을 오래 씹을수록 그 맛이 깊고 새롭다. 어느새 그것이 나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왜 일을 숨기시고 이를 당신의 영광으로 삼으실까? 이를 알고자 하여 주의 하고 묵상하는 데서 자신을 돌아보며 주의 뜻이 어떻게 실재하는가를 제시하신다. 이를 시인은 알았고 다음과 같이 주의 음성으로 진술하였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시 50:12).
우리의 오해나 그로 인한 감정의 요동 따위에 하나님이 뜻을 굽히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려움 속에 감추어 놓으신 주의 알기 위하여,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5).
이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 설명하시다 자조섞인 목소리로 감사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오늘이라 일컫는 날을 살며 때론 이해가 안 되고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두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할 때도 있지만, 물론 그것으로 하나님은 속상하시고 마음 아프실 때도 있지만, 다윗은 그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고 있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6-17).
우리의 어떤 결과, 노력에 따른 무슨 성과를 두고 하나님은 이를 예배로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보다 우리가 상한 심령 그대로 주 앞에 자신을 드리고 내어놓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거두절미하고 명징한 말씀으로 정의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 하나님으로가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그 심령이 채워지지 않음을. 그리하여 애통한다. 통회하고 자복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위로는 주밖에 없음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누구에게 일러 말한들 ‘웃을 때에도 있는 슬픔’을 누가 알아줄까? 곧 우리의 심령은 곤죽이 된 반죽처럼 치대고 볶여 자신의 완고함을 모두 부드럽게 되는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온유함이란 머리로 알고 실천으로 행한다고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 영혼의 시달림의 끝이 온유였다. 이에 드러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의, 곧 주의 뜻에 목마름을 느끼는 자로 살 때, 지난 생은 얼마나 잔인하였는가를,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사 29:8).
이를 아심으로 주님은 일러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이 긍휼의 정체는 측은지심이나 동정으로가 아니다. 싫고 좋음을 떠난 주의 마음으로 더해지는 것인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자신도 자신을 알지 못하여 주의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더욱 더 바라는 것이 화평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지난날 용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더는 개의치 않는 용서가 화평이다. 이에 더욱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 이러한 복의 근원이 하나님의 소원이시다.
언제나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데,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우리의 되바라진 기억은 왜곡되고 과장하여 스스로의 원망을 정당화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그래봐야 고작 노예의 삶이었을 뿐인데… 원망은 억지를 발판으로 하여 막무가내를 손에 쥐고 술 취한 자가 흔드는 가시나무 같이 휘두르며 자신을 물론 곁의 사람을 찌른다. 그래서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잠 26:9).” 저들의 회고와 그와 같은 진술이 얼마나 어리석고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오해의 극치는 결국 하나님의 일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원을 멸시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 자신을 원하신다니!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호 5:12).” 이쯤 되면 포기하고 더는 상종도 않으실 텐데,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15).”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 인내와 오래 참으심이 곧 인자하심이었다. 이를 시인은 노래한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시 89:1).
알면 알수록 알 수가 없는 주의 사랑을 두고,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호 10:11).” 오늘 우리의 고통은 스스로 자처한 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비례한다. 곧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8).” 고통은 가중되고 피폐한 영혼은 황폐할 따름인데도 얼마나 더 지나야 알 수 있을까? 시인은 되뇌며 호소한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시 89:46-49).
인생이 결국 다하는 날, 그제야 주의 살아계심과 인자하심을 알기는 할까? 오늘의 이와 같은 묵상과 고백이 귀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2).
주의 뜻을 알고 그 의중을 헤아려 주어진 삶을 산다는 일은, 살아서 기어이 사는 동안에 주의 음성, 그 뜻을 헤아려 아는 게 복이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호 11:8-9).
아, 이 놀라운 은택을 받은 자로서의 삶이라니! 나는 가끔 나의 지난날을 돌아볼 때면 주의 은총이 참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죽어 마땅하여,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바울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닐 거였다. 그만큼의 통회와 자복이 있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을 받은 것에 비례한다.
본디 여물을 먹는 소는 사자를 부러워하지 않는 법. 누가 어떻게 살고 얼마나 누리며 떵떵거리는가에 대해 더는 아쉬울 것이 없다. 저의 생이 얼마나 짧은지, 그 생의 무게가 한 줌 바람의 무게만도 못한 것을 알게 되면서… 그 결국은 이제는 안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 4:7).” 그러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 끝났다고 여기는 데가 끝이 아니다. 끝없는 주의 사랑과 같이 끝없는 고통의 날들도 기다리고 있으니, 참 지혜요 거룩이란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계 18:19).” 하나님 없는 삶이란 그처럼 허망하고 무가치한 것을 두고 이를 바로 알면,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시 89:3-4).
오늘 시편의 고백이 크게 다가온다.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5).
이에 시인은 한 술 더 떠 놀라운 진술이 이루어진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119:71-72).
이는 아는 사람은 알아보는 것으로,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74).
오늘을 살며 나는 무엇을 바라고 살고 있었나? 오늘 본문에서 저들은 자신들이 어쩌다 광야를 돌게 되어 40년의 광야 생활로 접어들었는지를 망각하였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옛날이 좋았다고 하며 거짓 회상으로 주를 원망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저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주의 긍휼하심 앞에 감복한다. 그야말로 나의 지난날, 그 어리석고 미련하기 짝이 없던 날들에서도 주께서 어찌 함께 하시며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돌보셨는가를 생각하면…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시 89:6).
곧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8).
내 안에 이는 탄성이 나로 하여금 주 앞에 무릎 꿇린다. 지난날의 죄가 진홍 같이 붉고, 더러워진 옷 같고,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돼지 여물통 곁의 더러운 냄새로 진동을 하지만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4-5).”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주의 일에 숨겨져 있다. 때론 어떠하다 해도 주는 선하시고 또 인자하신다. 이에,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
(시 89:17-18).
이는 주께서 숨기신 언약이라,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24).
오늘도 주가 붙드시고 함께 하심을, 때론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32).
이는 나로 주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것으로,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33-34).
이에,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5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