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출 17:15-16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0:1-2
성경을 바로 알고 그 교리가 명확할 때 흔들림이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왜 필요했는지 그 원인과 동기 그리고 목적에 대해, 어려서부터 들었다. 들었던 것이라 지루할 것 같은데 한 달에 한 번, 셋째 주일에 아버지가 오셔서 다시 이를 다루어 주실 때 새롭다. 전에는 그런가보다 했던 것이 이제는 명징하여 뚜렷함을 느낀다. 나는 습관처럼 메모를 하며 설교를 듣다 어릴 때 설교 내용을 받아 적게 하였던 아버지의 교육이 새삼 귀하게 다가왔다. 말 나온 김에 구원의 원인과 그 동기 그리고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되새긴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나라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이를 듣고 아는, 하나님의 비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자만 듣는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곧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그의 완전한 나라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다.
이에 구원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와 같은 구원의 교리를 바울이 정리하기 전에 오늘 <모세의 시>에서도 이를 언급하고 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1-2).” 이를 우리로 알게 하신 것이다. 이를 사도 요한도 신학으로 정립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곧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이 구원의 목적은 영생을 우리로 함께 누리게 하려 하심이고, 이를 소망하는 그 마음을 우리 안에 두셨다.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1-2).” 이처럼 성경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여 시대가 다르고 각각의 인물이 다른 사람들임에도 저들로 알게 하셨고 이를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 하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이것으로 우리가 교훈을 삼고 책망을 듣고 바라게 함과 의로 교육을 받는다.
이때 그 구원의 단계는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 됨으로 이루어진다. 이를 우리는 지켜야 하고, 그 지킴은 치열한 삶으로 전투와 같다. 즉 구원은 안이하고 당위론적인 결과가 아니다. 결과론적으로는 그렇겠으나,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3-4).” 즉 이 구원의 도리를 허물고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 길로 가게 하려는 세력이 있다.
구원은 동일하게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바 된 사람들’에게 주신 기본구원이 있다. 이는 일반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일이다. 가끔씩 왜 내게 구원을 주셨는지, 나 같은 죄인이 어찌 구원을 받았는지, 그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어 막연하고 송구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누구도 자신을 선별하여 태어난 게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를 두고 베드로 사도는 설교하였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9-11).” 곧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2-13).” 그러므로 이어진 사도 베드로의 당부는 오늘 나의 삶에서 유효하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것이 일반적인 구원, 기본구원의 핵심이다. 곧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데 그 믿음을 스스로는 입증할 수 없다. 곧 자기 선택으로가 아니다. 어째서 어떻게, 내가 믿게 되었는지 나도 알지 못한다. 곧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밖에는 내 안의 믿음을 나 자신도 설명할 길이 없다. 안 믿어지는 게 믿어지는 것보다 설명하기 쉽다.
이에 구원의 전투는 시작된다. 이를 성장이라 하고 성화라 하여 성화구원이라 한다. 곧 자라가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고 어른이 되어가는 외형적인 면과 같이 그 성격도 인격도 달라지는, 성장하는 것과 같다. 정체된 생명은 죽었거나 병든 것이다. 구원도 단번에 주신 것은 맞지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 1:3).” 하여 사도는 우리 믿음의 성장을 싸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권면은 냉엄하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의 의미가 아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이것은 마땅한 것이다. 구원 받은 자로서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당연한 결과다. 이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나는 새삼 이와 같은 말씀을 들고, 말씀의 깊이 앞에서 나의 모자람을 느꼈다. 또한 누구에게도 바로 알려, 바르게 나누고 가르쳐야 할 것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 머리로는 다 아는 것이라 여겼는데, 수십 년이 흘러 이제야 그 의미가 귀하고 소중하고 절박하게 다가온다. 이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6).” 새삼 크고 귀하게 들려지고 느껴지는 데는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 구원의 모델은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시다. 어느 교회나 교단이나 일개 목사가 아니다. 어떤 교리나 지식이나 그 학식으로 종파의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이와 같은 말씀의 귀한 것을 알고, 다른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바울의 고백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이와 같은 고백이 오늘의 내 마음 속에도 조급함으로 자라난다. 그럴 수 있을까? 하고 두렵고 떨리기도 하다. 보잘것없고 내세울 것 없는 존재이나 예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엄연히 다르다. 나의 자존심, 열등의식과 자격지심 따위로 더는 주춤거릴 겨를이 없다. 이는 마치 한 농부가 밭에 감추인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이를 얻고자 하는 조급함과도 같다. ‘단번에 이루신 나의 믿음, 그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하시는 말씀은 그렇게 명징하게 다가온다. 믿음이 있고 구원이 자라가면, 신앙은 결코 안이하고 평온하기만 할 수 없다. 날마다 전쟁이다. 먼저는 내 안의 나 됨과의 싸움이다. 그 죄성은 고착되어 수시로 나를 붙든다. 그리고 주변에 널린 죄악됨이다. 온갖 유혹이다. 저들은 마치 철옹성 같아서 뭘 해도 잘 되는 것 같아,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나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내가 아는 누구도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의아하고 기가 막히게 잘 산다. 심지어 그 자식들까지도 남부럽지 않게,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산다. 그럴 때 나만 바보가 된 것 같다. 가령 나의 선생은 젊을 때의 믿음을 버렸다. 지금은 다원주의자로 도올을 능가한다. 저의 학식과 나름의 열심은 존경스럽다. 저의 생은 치열하였고 그 성실함은 어떤 위인보다 위대하다. 나와는 고2 때 영어선생으로 만난 스승이다. 저는 연합뉴스 기자가 되어 20여 년을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누구보다 치열하였고, 삶과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였다. 그 덕에 나는 저와 있으면서 배운 게 많다. 남다른 애정으로 나를 위해주었고, 그래서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사명자로 부르심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주의 길을 간다고 할 때 저는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다. 지금도 마뜩찮아하기는 마찬가지다. 저는 잘나가던 기자생활을 접고 제2의 도약으로 한국을 알리는 문화콘텐츠 산업에 뛰어 들었다. 외국인을 대상을 하는 잡지를 시작으로 오늘에는 특색 있고 국내 출판사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인간적으로는 내가 가장 존경하고 훌륭한 인물로 여기는 위인이다.
저는 종종 나의 글을 출판할 것을 제안한다. 파격적인 예우와 나름의 특혜를 제시하기도 했다. ‘마음대로’ 나의 이야기를 쓰고, 그 시간도 넉넉히 주겠다고도 하였다. 꽤 큰 선인세도 제시하고, 나름 특색있는(?) 나의 인생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하나님은 그럴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 지난 해에도 실제 어느 정도 서로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 있다. 거의 합의까지 이루어지고, 실제 실무진에게 전달되어 이제 저들이 와서 계약서를 받고 돈이 입금되고 할 시점이었는데, 며칠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는 마음으로 미루었던 것이.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내게 기쁨을 주지 않으셨고, 나의 마음 속에는 마치 발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끝내 나는 말을 번복하였고, 나의 거절은 선생에게 실망스러웠고, 그 일로 서로의 사이는 당연히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떤, 알 수 없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의 구원은 단회적인, 나는 믿음으로 구원 받아 천국 간다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갈등, 그 치열한 사투는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비로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치러야 했던 숱한 전투와도 상관이 있다. 함축적인 의미로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영원한 안식,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빼앗고 침노해야 하는 나라, 맹렬한 전투의 일상이기도 하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야고보 사도의 설교와도 일치한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20).” 곧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 즉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런 갈등도 번민도 수고와 애씀도 없이 그저 평이하고 안일하게 사노라 하는 믿음은, 단호하게 말씀하시듯 죽은 믿음이다. 하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즉 우리가 구원을 알면 알수록 나의 믿음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 만큼 치열한지, 이 땅에서 어떤 소원을 이루는 데도 다들 치열한 삶을 강조하는데 하물며 영생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곧 우리의 믿음은 자라가고 성장하는 성화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영생의 나라에서 누릴 영화구원으로도 이어진다. 바울 사도의 설교는 자신 들어보며,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5-38).”
곧 오늘 우리가 상상하고 마음에 두어 어떤 형체의 모양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에 따른 그 모든 영광이 서로 다르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40-41).” 쉽게 말해 천국에 가는 것으로 우리 구원의 목적이 전부가 아니다. 그곳에서 누릴 우리의 영광이 서로 다름을 앎으로, 오늘의 사투는 의미가 크다. 스스로 위로를 얻고 자신에게 보상을 주려는 요즘 세태로는 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선생 왈,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하는 저의 치열하였던 삶을 나도 존경은 한다. 그러나 이 땅의 정도로 끝인 것이라면 이보다 더 허무한 성과도 없다. 가끔씩 보내오는 선생의 출판사 책들을 보면, 한 끼 밥술에도 인생이 담기고 신이 싯든다. 어디 제주살이의 삶에도 전우주적인 신의 역사가 찬양된다. 그런 가운데 나의 책이 출판되어 소위 대박을 친다 한들, 행여 하나님도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깃들고 말 것 같은.
내가 저의 출판 권유를 이내 정중히 거절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더는 나의 남은 생이 이 땅의 삶으로 소진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주목 받는 생을 꿈꾸지 않는다. 광야의 소리로 족하다. 들에 핀 꽃이나 하늘을 나는 참새 따위에도 못 미치는 것이라도 주를 나타내고 증거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5, 40).” 이를 앎으로 나머지 모든 것, 이 땅에서의 어느 것도 더느 나의 우선이 될 수 없다. 자식도 나의 건강이나 부귀영화도. 그리하여 어느 훗날, 우리는 서야 할 것이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2-14).” 그러니 더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15).” 이를 알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복에 복을 더하는 삶이었다. 오늘 아침,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시 90:14).
하는 모세의 시편을 오래도록 입안에 머금고 있는 이유다. 다시 또 백성들은 광야생활에 지쳐 먹고 마실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이에 모세는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를 증거한다(출 17:15-16). 그 와중에 저는 기도하는 것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0:1-2).
이를 우리로 새겨듣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 것이 주의 은총이었다. 누구나 우리는 모두 티끌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주의 앞에서는 그것이 천 년이고 만 년 같은 한 밤일 뿐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3-4).
이와 같은 삶의 통찰을 가지고, 이제 나의 남은 생은 온전히 주만 바라며 주께로만 나아가, 주가 쓰시기에 합당할 수 있기를.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0-13).
이것이 또한 오늘의 나의 기도가 된 것에 감사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14,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