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출 18:11-12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시 91:7-8
성도의 교제는 서로의 삶과 그 고백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서로의 관계는 하나님으로 맺어지고 이어져서 은혜 가운데 왕래한다. 설령 육신은 떨어져 있으나 서로가 서로를 생각함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고, 느끼고, 듣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방문이 그러하여 하나님을 향한 저의 찬송이 영광이 된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는 저의 목격과 증언이 곧 찬송이다. 이에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우리의 만남과 교제와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심이 곧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도’를 나타낸다.
곧 서로의 믿음을 돋우고 격려하여 싸울 힘을 더하게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이에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이 하나님의 유기 곧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이란 것을 알게 된다. 시인은 표현하기를 이는 마치 자연재해의 하나인 지진 같다. 저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시 60:1-3).
곧 우리로 휘청거리게 하는 것들,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어려움이 재난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다. 다시 느끼지만 하나님이 두려운 때는 우리로 내버려두실 때이다. 그때가 언제일까?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겨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과 바꾼다. 그때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 이후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에 대하여는 차마 입에 담기가 무서울 정도이다(26-32).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5).” 그 인과관계가 분명하여 우리로 변명하지 못하게 한다. 이를 시편의 진술은 우리의 교만과 강포와 거만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린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6-9).
말씀을 준비하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모양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데서 치를 떤다. 막연히 그렇다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의 삶이 그 현장이 그런 것이다. 이때에 성경의 경고는, “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욥 21:30).”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우리의 능력이요, 주가 주시는 권능이다. 미래를 아는 지혜이고 이를 경계하는 슬기로움이다. 예수님은 일러,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곧 우리가 주를 떠나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그런데도 스스로 자신을 정당하게 여기는 자는 어리석었다. 하나님은 이를 드러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시 73:10-11).
곧 저들의 교만은 자신의 물을 마심이고 그 거만으로 ‘하나님이 어찌 알랴.’ 하는 것이다. 눈에 안 보이고, 당장에 알 수 없으니 그리 장담하고 사는 것이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우리가 어디로 숨은들 하나님이 보지 못하실까? 내가 아무리 감춘들 하나님이 모르실까?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깨닫게 된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시 73:12-14).
자칫 오늘의 현상에 우리 자신이 걸려 넘어지기 십상인 것이다. 전에 누가 그로 인하여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등지는 것을 보았다. 저는 이르기를 자신은 열심을 다해 주를 섬겼고, 믿었고, 희망을 가졌는데 그것이 모두 헛되었다고 하였다. 즉 일이 되는 과정에서 그 결과를 속단하는 일은 그래서 어리석다. 성경은 이에 요셉의 놀라운 고백을 수록하고 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그야말로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 인생이었던가?
이를 알고 주께 고할 줄 아는 것이 축복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숱한 고난을 겪고 난 뒤 욥의 고백은 수려하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6).
온전히 주 앞에 앉고 저를 눈으로 뵈올 때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은 회개뿐이다. 결국 깨달음 없는 말들은 요란하게 울리는 꽹과리와 같을 뿐이다. 시인도 이를 알았고 뒤늦게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시 73:15).
행여 함부로 말하지 말 것은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6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를 두고 온 나라가 말(言)들의 전쟁이다. 할 말 못할 말, 당장 득이 될까하여 온갖 말들이 난무하다. 이에 사도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아무리 정치는 말이라고 하나, 당장의 지지율을 두고 누구는 우쭐하여 자신이 뭐나 된 듯 말로 상대를 난도질이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저이는 저열한 비판으로, 이이는 저급한 판단으로 마구 총질을 해대는 것 같다. 환멸이 또 화가 나는 까닭은 그 가운데 너나 나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일러,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딤후 2:16-17).” 누구라도 다를 게 없어서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혀를 금하고 화평을 구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일이다. 아차, 하다 서로가 다를 게 없다. 특히 정치나 사회에 대하여는 믿는 자로서 그 입을 삼가 조심하는 것이 좋다. 누구를 지지한다는 것은 자칫 하나님의 섭리, 그 뜻을 능가하려는 교만과 거만이 동시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에 시인은 괴로워하다 혜안이 열려 고백하기를,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 73:16-17).
당장 자신의 감정과 판단으로 누구를 지지하고 또는 비판하는 일에 대하여 성경은 이를 금하신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설령 저의 잘못이 극명하다 해도 이를 마치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것이라 여겨 속단하고 방어하고 선제공격을 해대는 일은 사탄이 좋아라하는 일이다. 우리는 내남없이 다를 게 없는 존재인 것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를 알면서부터 나는 특히 정치나 종교에 대해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는다. 논쟁의 시대는 지났다. 앞서 믿음의 선친들이 올바른 교리와 성경의 가치를 지키려고 평생을 다투고 싸우며 이룩한, 우리에게는 교회의 전통이 있다. 이제는 각자 지키는 시대이지, 서로를 겨누어 싸우고 이겨야 하는 시절은 아니다. 물론 정치란 말과 말의 경쟁이어서 사람들은 이리 쓸리고 저리 모여서 자신들의 이득을 계산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도’가 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삼하 22:31).”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은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 91:14-15).
이는 주의 말씀이라,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45:18).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 앞에 가만히 의뢰하고 의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귀하고 복된 일이겠다. 다른 무엇이 어떤 것으로 더 나은 보장을 하겠나? 악인들의 형통함은 그저 일장춘몽과 같이 깨고 나면 초라한 현실만이 저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시 73:18-20).
그러니 특히 교회 안에서의 정치 이야기는 금물이다. 누구를 지지하고 지탄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옳을 수 없다. 다만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1).”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판단이란 게 얼마나 우매할 따름인지,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 73:21-23).
오늘도 나의 하루가 온전한 것은 주가 나의 오른손을 붙드셨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누가 지혜 있고 누가 선비이겠나?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 1:20).” 넋 놓고 있다간 당달아 휩쓸려 간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 이를 명심하고 그 마음에 새겨 무지한 말을 버리고 오만한 생각을 그쳐야 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이를 깨닫는데 너무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실족하지 않음은 주께 붙들려 사는 것이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시 73:23-26).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며 이 귀한 진리 앞에 감복한다. 어제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오늘 월차를 내어 인천까지 오겠다고 하여 마음이 흡족하였다. 이는 이제 우리가 같이 주를 바람이고 온전히 섬김으로다. 지난 며칠 ‘다니엘 기도회’에 참석했었다며, 그런저런 가운데 할 말이 생겼는가? 도봉구에서 인천 귀퉁이까지 먼 걸음을 하겠다고 하니 이 또한 복된 성도의 만남이 되기를… 그래서 설레었나?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뜨고 말씀 앞에 앉아 저를 생각하였고 주가 다루시는 우리의 만남을 즐거워하게 된다. 이는 시인의 고백과 같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7).
우리가 같이 주의 살아계심과 그의 인자하심을 삶에서 경험하고 이를 나누며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성도의 교제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나의 하루는 이 묵상의 시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누구를 만나고 어떤 말을 나누고 무엇으로 같이 고민하게 되든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시는 말씀과 함께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49:10).”
어제 잠깐 오늘 오는 일로 통화를 하다, 나는 저에게 성경공부를 마저 끝내고 누구를 가르치는 일에 주저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일러주었다. 저의 교회에서는 평신도 성경공부라 하여, 서로 일대일로 성경공부를 하는가본데 앞서 한 이가 다음을 이어서 새로운 신자를 양육하는 것인가 보았다. 저의 순서가 거의 끝나려는데 '코로나19'가 터져 미뤄지고, 이를 핑계로 주저하는 마음은 틈을 타고 들어와 아예 다음을 이으려 하지 않는 마음까지 생겨났다. ‘나 같은 게 무슨…’ 하면서 주저하는 저에게 그리 맡기심이 두 말할 것도 없이 너로 성장하게 한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 말씀의 연결과 연결이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행여 주저하다 사탄에게 틈을 주기 십상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이보다 더 큰 복에 복은 없다. 나는 누구에게든 할 수만 있으면 글을 쓰라 권하고 이에 말씀을 묵상하여 삶을 돌아보는 것보다 소중한 시간은 없다고 과감하게 이른다. 그렇게 나의 하루는 ‘이 시간’ 말씀을 묵상하고, 준비하고, 그것으로 나의 삶을 돌아보아 적용하는 일에 하루의 초점을 둔다. 다른 일은 모두 부수적이라, 다음에 해도 되겠으나 이 시간만큼은 잃고 싶지 않다. 몸이 아파도, 어디를 가도, 누가 아무리 일찍 온다 해도… 내가 이를 누구에게 권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로또가 맞고, 아파트가 당첨되고, 아이가 최고의 대학에 입학을 하고, 건강이 회복되고, 하는 일이 만사가 형통하다 한들! 이는 모두 지나고 나면 일장춘몽과 같은 것을,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시 73:20).
이보다 더 두렵고 끔찍한 결과가 또 있을까? 그러므로 내가 여느 궁정에 사는 것보다 주의 집 문지기로 사는 것이 낫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0-11).
누가 차를 최신식 SUV 최고사양으로 바꾸었다. 누구는 어디에 사두었던 땅이 올라 졸지에 갑부가 되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오히려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즐거워하는데, 나는 이제 그런 게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좋겠다, 하고 맞장구는 쳐주지만 애써 이를 위하여 사는 것에 대하여는 더는 수고할 마음이 없다. 그러느니 이 아침에 말씀을 준비하고, 오늘 친구가 오면 어떤 말씀으로 어떤 권면과 위로가 필요할까? 하고 주께 아뢰며 이를 바로 알기를 원한다. 아이는 왜 또 요즘 성경 쓰기가 주춤해졌을까? 신경이 쓰이고, 저들 내외를 보내시기는 하실까? 주의 뜻은 무얼까? 하고 헤아려 바로 알기를 더 원한다. 사도는 일러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이를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며. 그러할 때에,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시 91:7-8).
오늘의 이와 같은 말씀이 내게는 더 귀하다. 그리 여겨지는 마음이 귀하다. 그러므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 91:1-3).
오늘을 살며 자칫하다간 언제 끌려갔는지도 모르게 끌려가는 영혼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그러므로 다시 그러므로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