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전봉석 2021. 12. 1. 05:14

 

너는 산에서 보인 양식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

출 26:30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 99:9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산다. 이를 어찌 표현하든지 그의 표현이 그의 인격이 되고 숙명이 된다. 나이 쉰을 넘겨 예순이 다가오면서는 자주 뒤를 돌아보는가보다. 애매하게 남은 세월을 두고 ‘이제 뭘 하지?’ 하고 상심에 젖곤 한단다. 평생을 달려온 길에서 내려서야 하는데 그게 좀체 여의치가 않은 것이다. 누구는 퇴직 후 할 일을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을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누구는 골골하는 몸을 어르고 달래며 몸을 추스르느라 여념이 없고, 누구는 제2의 인생을 운운하며 새로운 취미를 찾는다. 이런저런 생각들 가운데는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책 한 권을 남겼으면 하는 모양이다.

 

누가 어느 모임을 이야기하며 그래서 글쓰기를 좀 가르쳐줄 수 있겠는지 묻는데, 나야말로 생각이 많아졌다. 그쯤 나이가 들면 모름지기 저마다는 작가이고 자신의 이야기는 대하소설을 능가하는 소재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 몇몇의 사연을 듣고 공통적인 화두를 찾았는데 저들 대부분이 ‘교회를 다녔었다’는 과거형으로서 오늘의 자신들 신앙을 정리하는 것이다. 젊을 때 또는 어린시절에 주일학교를 회상하거나 '그랬었지' 하고 되뇌는 것이다. 누군 교회에 상처가 있어 하나님을 떠났다는데 안 들어도 어떤 말이겠거니 알겠다. 아무튼 어찌 어떻게 연결될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저들의 신앙 상태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이 어찌 다루시려는가 흥미있어 하였다. 저마다 남은 생을 알차게 살 궁리는 하지만 장작 그 너머를 상상하지는 못하는지, 외면하는 것인지 신앙 이야기는 길게 하려 하질 않는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왜 이처럼 하나님은 성막과 성소의 세세한 구조와 그 짜임을 두고 설명하시는지 생각하다, “너는 산에서 보인 양식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출 26:30).” 하시는 말씀에서 한참을 멈추었다. 다들 서로 다른 생을 사는 것 같지만 그 양식은 하나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또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두고 이야기를 듣다, 저마다의 관심은 살아온 날에 대한 일반이었다. 우리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 3:21-22).

 

가만히 생각하기를 앞으로 살 날을 두고 생각하는 것보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어찌 행하셨는가를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였다. 나는 그런 점에서 저들이 글쓰기를 갈망한다는 사실에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여서 우리의 기억이나 때론 생각을 과장하여 지나온 날을 덧대고 꾸미기도 하지만 곧 일흔이 되고 여든이 되기까지 회상할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 언제 오라 하시면 갈 일만 남았다. 나는 저들 너덧 명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저들 신앙생활은 어떠한가에 자꾸 관심을 두었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미력하나마 저들을 생을 글로 쓰며 돌아보는 데 일조를 하겠으나, 그저 사는 데 정신이 팔려 영생은 뒷전이라면 굳이 내가 할 게 없을 터였다. 하니 내가 전제로 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 먼저 구하였다. 나에게 두신 부르심의 사명은 이제 명백하여 복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복음은 우리의 영생이다. 이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이고 그에 때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 99:9).

 

하는 오늘 말씀에서 나는 발이 묶인듯 어떤 확신을 더하게 된다. 곧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느 9:31).

 

곧 우리의 회상이란 주가 행하심을 발견하는 일이다. 나는 주를 멀리하였으나 언제나 가까이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를, 말씀은 집약하여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주의 긍휼하심과 은혜로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더라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하여 오늘의 직분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전 3:10).” 이제 남은 생을 두고 다하지 못한 생의 여한을 풀려는 데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는 일로써 살아왔던 날들 가운데 나를 돌보시며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글쓰기가 저를 관찰하게 하고 자신의 생을 돌아보아 성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를 원한다면 좋겠다. 그리 말해주고 싶다. 단지 ‘회고록’의 정도로 글로 남겨질 자기 이야기가 뭐 그리 중요하겠나? 우리의 남은 생은 이제 시작인 영생의 한 날 한 날이다. 여기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곧 우리 생의 목적은 극명하다. 오늘 우리에게 두신 이 직분의 목적도 명료하다. 따라서 하나의 공통된 화두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일이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누가 장담하겠나? 제2의 인생 운운하며 2, 30년 그 계획이 탄탄하다 한들, 지금처럼 그때에도 '그랬었지!' 하는 정도에서 신앙을 멀리하고 살겠나?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누구의 이런저런 제안을 두고 나는 어제 잠깐 생각을 하였다. 하고 안 하고는 내 결정이 아니다. 거짓말처럼 나는 이제 주가 행하시는 일의 도구일 뿐이다. 소개되는 이들의 면면이 어떠하였든 관심없다. ‘다녔었다, 믿었었다.’ 하는 과거형의 신앙들에도 관심없다. 문득 에베소 교회에 하신 말씀을 생각하였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 3-4).

 

나름 열심히 살았던 날들을 회고하고 이를 글로 남긴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들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 지난날은 언제나 우리의 영생을 반추한다. 어떠했든지 그 가운데서 ‘내가 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을 되찾아야 한다. 어디서 잃었는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굳이 나는 안 믿는 자나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에 대하여는 뭐라 이를 말이 없다. 성경은 저들에게도 들려 있다. 그 마음에 모시기 싫어하는 하나님을 내가 무슨 수로 담아주겠나? 다만 주의 자녀이고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하여는, 주께서 마음이 더 쓰이실 터.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5).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말씀이 아닐까? 시인은 이를 받쳐주듯 노래하였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

(시 74:13-15).

 

저마다의 사연은 차치하고, 주가 어찌 함께 하셨는지! 안고 살아온 인생이라는 게 다들 고만고만한 것 같지만 이를 돌아보며 주가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알고 위로를 삼아 남은 생을 발판으로 영원으로 도약해야 한다. 그리 삼지 못하면 그 남은 생도 그저 허망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저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보다 그 중심애 두고 있는 것에 궁금해하였다. ‘사망에서의 구속’이 없었더라면 너와 내가 오늘 굳이 만날 일이 무엇이겠나? 이와 같은 회상과 고백이 가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주가 나의 허물에서 숨기시었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호 13:14).” 우리 스스로는 넘어설 수 없는 문제들이 더 많던 날들이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이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아 글을 쓰고 회상하는 날들이면 감사로 채워질 것을 확신한다. 결국 이 모든 우리 인생의 계절이 다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의하였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 74:16-17).

 

그러므로 한 발 더 나아가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119:71-72).

 

아, 이 고백이 나는 나의 이야기라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의 남은 날들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저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고백과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드려지게 할 수 있다면, 하고 바란다. 그럴 수 있다면 내가 뭐라도 같이 할 수 있겠는데, 굳이 애매한 나이에 그 고작 남은 생을 두고 제2의 인생을 운운하며 고민하는 일이라면 사양하겠다! 모르겠다, 나는. 쉰 살이 지니고 여전히 생의 신기루에 사로잡혀 살고 싶지는 않다. 서른이 되면 좀 다를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마흔이 되면 뭔가 분명한 생이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러나 쉰을 훌쩍 넘기고도 한참을 더했는데도 생은 여전히 미진하여 ‘한없이 가벼운 생’으로만 출렁거릴 뿐이다. 더는 널뛰듯 생에 나의 영혼을 맡겨두고, 저당잡힌 사람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돈돈거리는 일도, 건강염려증으로 씨름하는 일도, 남을 가족들을 두고 쓸데없이 염려하는 일도, 다 하나마나 한 날들을 두고 열심을 다하고 싶지는 않다. 살다보면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은 이제 지겹다. 

 

오죽하니 시인은 고난이 자신으로 유익하게 하였다고 고백할까? 내가 바라는 행복이나 즐거움으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곧 우리의 고난이 우리로 거룩하신 이를 사모하게 한다. 이를 알 때 비로소 우리 생의 가치는 더해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로 성립된다. 여든을 넘겨 아흔에서 상수(上壽)의 생을 다 한다 한들, 이는 저절로 알 수 있는 가치 있는 생이 아니다. 우리의 복은 주를 바람에 있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시 74:18, 22).

 

살아오면서 나는 얼마나 자주 우매한 자의 자리에 앉곤 하였는지, 이를 돌아보며 주의 살아계심을 이제는 나의 생의 전부를 두고 걸겠다.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이 아니면 값어치가 없는 가치다.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이 다 헛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 하나님이여

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

(느 9:32).

 

이쯤 나이가 차고 뒤를 돌아보니, 나는 이상하게 까마득하기만 하다. 누구는 눈 깜짝할 사이였다는데, 나는 그 지나온 날들이 너무 멀어서, 이제는 주께 아뢸 수 있는 복이 하나뿐이다. 내가 주를 알듯 주가 먼저 나를 아셨다는 것. 가장 귀하다는 것은 주가 나를 아심으로 내가 주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를 저들에게 강조할 수 있을까? 여전히 그저 먹고 사는 데 연연하여, 그 골몰하는 생의 누추함에 대하여 말해줄 수 있을까? 늘 아이들만 대하다 나보다 늙은 이들을 상대하게 하신다면 무슨 말로 우리의 영생을 알려줄 수 있을까? 누구는 여행을 하며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를 원하고, 누구는 후학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고 싶다하고… 누구는 일찍 자식을 여의고 이를 가슴에 묻고 살고, 다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혼자 곱씹다 이제라도 이를 글로 썼으면 하는 것인데. 나는 우리가 받은 은혜의 긍휼하심이 이 땅으로 전부가 아닌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시 106:45-46).

 

우리가 우리의 수명을 다한다는 것은 이내 주께서 바라시는 날들이 하나둘 이루어진다는 것이어서, 나는 이를 생각하느라 누구의 어떤 사연에 귀를 기울이다 머리가 다 아팠다. 다만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이 아침, 말씀 앞에서 나를 주관하시는, 주의 성막을 두고 “너는 산에서 보인 양식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출 26:30).” 하는, 나의 산, 내가 주를 마주하였던 주의 성산에서 나에게 보이신 양식이라면,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 99:1).

 

가만히 말씀 앞에서 주의 살아계심을 묵상한다. 주를 온전히 믿음으로 마주하는 것은 순종이었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들의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먹이를 움켜 가져가 버려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곧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사 5:29, 30).” 아직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게 살아온 날들을 두고, 인생이 그동안 어떠했는지, 으르렁거리며 움킨 것을 놓지 못해 씨름하던 것들에 대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하 15:22).” 하시는 말씀 앞에서 가만히 그저 가만히…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시 99:2-3).

 

나의 남은 날들이 이제 불리고 드려지는 고백으로만 가득하기를, 그리하여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5,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