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9:45-46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 102:19-21
우리 안의 어떤 노여움이 우리로 주를 찬송하게 한다는 말씀을 자주 음미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이를 되새겨 묵상할 때마다, 속상한 어떤 상태나 느낌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내게는 특권이고 참 복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면서 사는 동안에 어떤 노여움, 그 수치심으로 신음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한데 그것으로 주를 찾고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다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앞서 본을 보이셨고, 수많은 믿음의 선친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어찌 갈등하고 번뇌하면서도 주를 바라고 의지하였는가를 성경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제사장의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저들이 행해야 하는 의식을 살피게 된다. 먼저는 목욕이었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출 29:4).” 자신을 깨끗하게 씻는다는 행위는 더러움을 인식한다는 것이고, 이를 청결하게 하고자 하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니고데모를 앞에 두고 씻음의 원리를 강론하시며 거듭남을 주제로 삼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물은 나의 행위이고 성령으로는 하나님의 일이다. 직분을 감당하는데 있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이를 주께 고하는 죄 씻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이는 필수적인 일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6-7).” 예수께서 덧붙여 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육은 결국 육이어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영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일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닌 거였다. 물론 사탄의 훼방이겠으나 육은 끊임없이 육적인 일을 꾀하고자 하는데 이는 세상을 사는 동안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겠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분명한 사실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7).”
그래 이 땅의 모든 욕구는 지나간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하면 이를 위해 어찌 해야 할까? 곧 씻는다는 행위로 구약의 제사는 번제와 속죄로 크게 그 의미가 갈리는 것을 본다. 속죄제는 수소 한 마리를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인데, 그 내장과 기름과 간에 붙은 기름덩어리와 두 콩팥에 붙은 기름덩어리는 떼어 불에 사른다. 나머지 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바깥에서 불에 태운다. “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그 송아지를 잡고 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을지며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을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출 29:12-14).”
상상해보면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온갖 역겨움이 그 안에 가득하다. 한데 이 일을 하기에 앞서 먼저 중요한 일은 그 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하는 행위였다.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출 29:10).” 이것이 죄인의 말로이고 그 역겨움과 숨 막히고 잔인한 현장에서 우리 구주 예수께서 수송아지가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전가 받으셨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그저 액세서리가 아니고 마음을 다지는 문양의 정도가 아닌 그 이상이 된다. 곧 내가 그 위에 달려 죽임을 당해 마땅하였을 텐데, 이를 전가함으로 주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를 되새길 때면 가슴이 먹먹하고 순간 내 안에 맺힌 어떤 노여움을 들추어 누구를 원망하고 서러워할 따위의 일이 아닌 것이다.
번제는 속죄제를 드린 후에 숫양으로 속죄제의 방식을 따랐다. 똑같이 먼저 그의 머리에 죄를 전가하였고 “너는 또 숫양 한 마리를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지며(15).” 이를 잡아 제단 위에 뿌렸고 각을 떴다. “너는 그 숫양을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 위의 주위에 뿌리고 그 숫양의 각을 뜨고 그 장부와 다리는 씻어 각을 뜬 고기와 그 머리와 함께 두고 그 숫양 전부를 제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16-18).”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숫양 전부’이다. 이를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하여, 그 숫양 전체를 제단 위에서 통째로 살라 바쳐라. 이것이 바로 나 주에게 드리는 번제이며, 이것이 바로 향기로 나 주를 기쁘게 하는 살라 바치는 제물이다(18).” ‘통째로’라는 표현 앞에 멈칫하게 된다.
번제는 헌신이다. 어느 일부가 아닌 전부를 살라 그 향기를 올리는 소제다. 헌신은 남은 것을 또는 어느 일부를 나누는 정도의 것으로가 아니다. 통째로 전부 몽땅 불살라 그 향기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냄새다. 어느 날, 또는 어떤 일에, 무엇을, 또는 어느 정도로 ‘적당히’의 의미가 끼어들 수가 없는 ‘전부’로서의 불사름이다. 심지어 나의 의까지도 불살라야 한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따위의 자기희생적인 남겨짐이나 덧붙임이 용납될 수 없는 전부이다. 곧 이를 바울의 진술로 마디글로 나누어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과연 나의 매순간은 어떠한가를 되새기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즉 나는 과연 죽었나? 여전히 살아있는 나의 아집과 자존심, 이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하는 어떤 나만의 가치와 기준을 붙들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 번제는 화제다. 불에 태워 모든 걸 사를 때 나는 향기로서의 제사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문득 이 말씀을 되뇌다 입을 막게 된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자기합리화가 나를 먼저 선동한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겠어? 하는 의문을 핑계처럼 들고…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바울은 일갈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 나는 과연 그러한가?
그래서 저도 저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날마다 자기는 죽는다고 고백하였던 것이겠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날마다 죽는 자신을 두고 이를 자랑으로 삼고 살다니…. 여전한 나의 성질머리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열등의식과 자격지심으로 혼자 들썽거리기 일쑤인 나 자신을 두고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때론 감정이 상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고, 이것들이 마음 속 어디에 꾹꾹 눌렸다가 애꿎은 일에 폭발을 하거나 화를 내기 일쑤인데….
그러니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긍휼하심으로 나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자비가 아니면 감당이 안 된다. 어제도 별 것 아닌 일로 마음이 상했다가 욱, 하고 올라와 성질을 부리고… 그럴 땐 마치 미친 사람 같아서 내 스스로 다중적인 나를 보면 치가 떨린다. 이 또한 나를 옥죄는 수치심이 되어 나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일 텐데,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3-15).” 이 놀라운 죽음의 역설 앞에 나는 두 손을 든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5-6).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7).
수치가 수치심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8).
오직 주를 곁에 모시고 사는 사람의 당당함이었다. 세상이 저들을 감당하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그래서 이해가 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저들이 어떤 꼴을 당했나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6-37).” 그러면서도 묵묵히 이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나는 사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절망한다. 나는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면 알수록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내가 아는 내가 원수다. 세상에서 제일 감당이 안 되고 이길 수 없는 원수가 바로 나 자신이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 찔끔하고 부러워도 하다 순간 또 욱, 하고 올라오는 어떤 울분-노여움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것으로 어찌 주를 찬송하게 하시려는지….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 25:1).
주의 긍휼하심으로만이 살 길이다. 나로서 나는 나를 이겨낼 자신이 없다. 그러니 날마다 자신을 죽였다는 것일까? 어떻게 살려 좀 해보려고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상대가 바로 자신임을 저도 알았던 것일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바울의 절규가 내 목소리로 터져나오는 것 같다. 저는 그렇게 자신을 일일이 각을 뜨듯 마디마디를 쪼개고 잘라서 통째로 사르듯이 고백한다. 아침마다 묵상글을 쓰는 나의 심정도 그러한데 하나도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아 때로는 좌절한다. 구제불능인 나를 나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20).
죄란 참으로 끔찍하고 악착같아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주를 바라며 선을 구하다가도 순간 돌아서기 무섭게 엄습하는 내 안의 어떤 죄성을 두고,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러니 날마다 싸운다. 매순간이 시끄럽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
나는 주 앞에 드려질 수 없는, 하등에 쓸모없는 죄인인 것을. 그런데 이 수치, 이 노여움이 그래서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되뇌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이 불균형한 인간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로 주의 일을 감당하게도 하셨으니! 오늘 본문은 이를 상기시킨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5-46).” 나는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한없이 무너진다. 왜 그처럼 나로 세상에서 인도하여 내셨는가를 알게 하시려고….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 102:19-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