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출 30:37-38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2
우리의 삶이란 날마다 주께 제단을 쌓는 일이다(1-13). 이를 위해 우리가 봉사하는 데 있어 속전(14-16)을 바쳐야 한다. 이는 모두에게 동일하였고 같은 금액으로 하였다. 또한 물두멍(17-21)을 두어 자신을 정결하게 하였고, 구별을 위한 향유(22-33)를 발라 주가 머무시는 곳임을 구별하였다. 성소 안을 가득 채우는 향(34-38)은 거룩한 임재를 뜻한다. 물두멍은 성소에 들어갈 때 손을 씻는 정결의식의 예표이고, 향유는 그것으로 성소의 모든 도구에 발라 정결하게 하는 기름이다. 왕과 제사장을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부어 정결로 구별하는 상징적인 의식을 가졌다. 향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뜻한다. 성소 안에 꺼지지 않게 함으로, 이 세 가지는 정결과 구별됨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로 이어지는 것을 본다.
어느 것도 나를 위한 자기만족으로 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를 상기시킴은 의외로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하는 일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하는 게 많이 섞여 있음을 알게 한다.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 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 30:37-38).” 이와 같은 말씀에서 문득 드는 마음은 우리 안에 주를 위한다는 것이 실은 어떤 만족, 그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있지는 않은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친다. 가령 내가 누구를 대하는 데 있어 정녕 그 한 영혼을 주의 마음을 주의 사랑으로 위함이 맞는지… 혹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는 ‘자기의 의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특히 공의와 정의란 게 자기의 이상과 신념을 위한 것일 때, 오늘 말씀에서 ‘냄새를 맡으려고 이 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를 연관 짓게 한다.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본의 아니게 교회가 자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번에도 오미크론이란 새로운 변이바이러스의 발원지인 곳으로 선교를 다녀온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염병이 확산되는 추세다. 그때마다 속상한 것은 저들의 극성이다. 한참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있을 때 무슨 안수기도니 정결의식이니 하며 신유와 은사를 강조하던 것에서부터 이번에도 선교를 운운한 어떤 열심을 중심으로 이 일이 확산된 셈인데… 조심스러운 언급이지만 오늘 본문에서의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귀에 꽂히는 것 같다. 모두가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거룩을 강조하며 하는 일일 테지만 과연 그러한 것인지? 그래서 교회가 오히려 사회의 근심이 되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가만히 되새겨 볼 일이다.
무슨 유행처럼 성전의 기물이 ‘고가의 물건’으로 유행을 타고, 교회마다 선교 일정을 치적처럼 내세우는데, 무슨 패키지여행처럼 ‘선교여행 상품’으로 둔갑하는 것을 볼 때도 있다. 특별 기도회니 무슨 안수니, 무슨 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정작은 사람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분간하기가 좀 애매한 때도 있다. 그렇게 선동하고 부추겨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벌이는 듯한 이벤트적인 것들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일갈하시는 게 아닐까?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 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 30:37-38).”
시쳇말로 겸사겸사, 임도 보고 뽕도 따고 하는 식으로, 감히 뭐라 운운하면서 속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으나 합당하지 못한 일과 그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는 성경이 누누이 지적하고 경계하시는 바이다. 이상하지?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하며 이어지는 여러 현상들에 대하여(-32) 그것이 과연 교회 밖의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것일까? 가령 누구를 대할 때면 저의 안에 주를 바라고 구하는 신앙은 있는 듯한데 희한한 것은 자기의지로 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주의 일을 구하면서 자신의 낭만을 추구한다. 오직 주님만을 바란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를 애태워한다. 결국 누가 알아주지 않아 그것으로 실망하고 좌절하고 가던 길을 우회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의 근본적인 죄다. 곧 불의한 마음으로 안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물론이나 믿는 자로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사 32:6).” 이런 일을 누가 행하는가? 저는 나름 믿는다는 사람으로 살면서 그러하다. 안 믿는 자는 차라리 그런 데조차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가만히 주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같이 있지를 못한다. 말씀 묵상은커녕 기도도 안 믿는 자의 소원과 다를 게 없다. 그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7-8).” 구별됨은 확실하여서 누가 알고 모르고, 보고 안 보고 개의치 않는다.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욥 22:23).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입을 통해 이르시는 말씀이다. 실은 우리 안의 불의가 얼마나 추악한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누구의 행실로 저를 예단하거나 속단할 수도 없다. 다만 그 드러나는 행태로는 탐욕이 있다. 이사야는 다소 거칠게 이를 진술하였는데,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 56:11-12).” 행여 오늘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실정은 아닐까? 자기 행위에 도취되어 이를 말씀으로 연관 짓기는 하는데, 탐욕스러운 포식자 같아서 그 교회가 포화 상태인데도 결코 주변 교회로 또는 교회끼리 상생하려는 의지는 없다. 작은 교실에 복도에 TV를 설치하고 기둥 뒤에서, 어느 작은 골방에까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는 혈안이 되면서 정작 교회와 교인들을 분산하여 파송할 생각은 없다.
누가 다니던 교회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 교회는 벌써 50여 년째 교회 교인들 수도 건물도 그대로라고 한다. 여느 교회 같으면 교인들 수가 늘어 더 크고 더 웅장하게 자신들을 확대하는 데 중점을 둘 텐데 거기는 다른 것이다. 교회에 부목사를 세우고 저들로 교인들을 맡아 양육하게 하고 일대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긴다. 일정 기간 그 시일이 차고 교인들 수가 어느 정도 늘면 독립을 장려하고 부목사로 있던 이와 함께 저가 맡아 양육하던 교인들도 함께 개척을 권한다. 그에 따른 일체의 시작은 본교회가 부담을 한다. 같은 지역 내에서 뿐 아니라 원근각처로 어디로든지 예외를 두지 않는다. 나도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라 세세한 부분은 알 수 없지만 그 자체로는 아주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본교회는 그 크기와 규모가 인근에 사는 교인들로 늘 한결같고 그렇게 파생하여 각지로 나간 교회들이 또한 그렇듯 교회를 이뤄간다고 하는데… 상대적으로 대기업화되는 다른 대형교회들만 봐서 그런가, 그 자체로도 신선하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도 불의에 있어 탐욕을 이기지 못할 때가 있다. 결국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잠 28:16).” 앞서 이사야의 따끔한 지적처럼 ‘몰지각한 목자’들을 개들의 탐욕을 품은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의 카리스마(은사)에 의해 교회가 좌지우지 되는 것은 엄연한 폐단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곧 우리가 이 땅에서 교회를 이뤄 간다는 것은 단지 사람 숫자로가 아니다. 외형적인 교인들의 숫자로도 아니다. 아무래도 사람 사는 사회에서 그 규모나 사람들의 숫자가 힘이고 능력이 되기는 하겠으나, 이는 근본적인 죄로 악의에 해당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이 단서가 얼마나 우리에게 유용한지. 아니, 그런데 교회에서 언제부턴가 이 부분이 제외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자못 어긋나면 세상을 좇아 교회도 유행을 따르는 결과를 낳는다. 사람들의 시선을, 저들의 관심을 의식하면서는 '교인만족서비스' 그 자체로 우상숭배와 다를 게 없다. 불의가 되는 것이다. 모르겠다, 나는. 어쩌다 또 교회가 그런 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하나님으로 욕을 듣게 하였는지. 왜 굳이 목사 내외는 또 거짓말을 해서 자신들의 동선을 속였는지.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안에는 근원적으로 불의한 죄의 속성이 있다는 것을 일순간 가벼이 하면 목사도 예외가 아니다. 오죽하니 바울도 날마다 죽었을까?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일에도 예외는 없다. 뉴스를 보다 채널을 돌렸다. 우리에게 주신 참된 자유는 대체 어디서 잃어버린 것일까? 극성인 교회가 아무래도 옳지 못한 길로 간다. 당연한 이치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시 25:1-3).
이에,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사 50:8).
우리가 우리의 자유함을 잃을 때 그 공백은 감사가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족한 줄을 알지 못할 때 불의는 우리를 잠식한다. 악의와 탐욕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이를 당해낼 수 있는 방도는 섬김뿐이다.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일하신다. 우리의 예상이 빗나갈 때, 하나님의 뜻은 선명해진다. 보란 듯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그럼에도 세상 이치나 교회 이치나 크고, 힘 있고, 능력 있어야 주의 일인 줄 안다. 교회가 이 일에 예외가 아닌 것이 나는 슬퍼한다. 그리고 다행이다. 나의 약함이 자랑이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하는 성경의 원리는 간단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4-15).” 왜들 세상에서 그처럼 '완벽한 교회'를 건축하려 안달일까? 기업하나? 이 땅에서의 선교란 게 치적을 쌓는 일인가? 여느 비영리사회단체 만도 못한 전략으로,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때론 속임수까지 써가면서, 거기다 주의 이름을 들먹거리곤 하니까 이 난리다. 어느 교회는 교인들 단합차원에서 어디로 선교여행을 계획한다. 어디에 무슨 구제와 봉사를 기획하고, 수십 개의 쌀 포대를 앞에 두고 현수막을 펼쳐서 기념사진을 찍고, 지약구의원이나 목사나 모두가 정치화되어 간다. 미친 건 세상이 아니라 점점 교회들이다. 세상은 원래 정상이 아니니까, 거기서 덩달아 날뛰면 그게 미친거지 별 것인가?
나는 오늘 읽은 말씀이 자꾸 그렇게 들린다.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하고 엄연히 구별하여 엄격히 다루시는데도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하시는 말씀을 교묘하게 무시하는 것만 같다. 결국 자신들 좋은 대로 “냄새를 맡으려고 이 같은 것을 만드는” 사람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겸사겸사 교회를 다니고 주를 믿고 섬기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러한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하시는 말씀에 오금이 저린다(출 30:37-38). 과연 나는 어떠한지? 누구를 마주하고 저의 아픔이나 힘듦을 두고 염려하면서, 행여 나 또한 그것을 어떤 치적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은 아닌지. 누가 알아줄까, 하고. 또 이를 귀히 여기면 으쓱하면서. 에이, 설마. 하지만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수 없어 두렵다. 이를 일깨우듯 오늘 시편은 나의 어깨를 흔드시는 것 같다.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2).
곧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8-9).
이 놀라운 은총이 아니면 내가 뭘 하들? 교회가 뭐 그리 대단히 선을 행한들? 오늘 말씀에서 돌아보자. 자신을 늘 정결히 하여 각자의 ‘물두멍’을 그 영혼에 두어 날마다 씻어 정결히 하자. ‘향유’를 부어 나의 하루가, 또는 다루는 모든 일을 정결히 하자. ‘향기’를 내어 주께 상달하려 하되, 행여 자기의 즐거움을 도모하는 데 보람을 느끼지 말자. 누구 말에 혹 해서 으쓱하다가는 개 같은 목자를 면할 길이 없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이를 정녕 두려워할 줄 안다면 주의 인자하심 앞에 무릎을 꿇는 일밖에,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0-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