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출 31:14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시 104:33-34
주의 일을 하게 하시는 데는 채워주시는 영이 있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출 31:3-5).” 여기서 일을 맡은 ‘브살렐’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2).” 이는 하나님이 지명하셨다. 주의 사람을 일러 그렇게 지명하여 불러 자기 것으로 삼으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먼저는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그 모든 계획에는 목적이 있으시다.
주가 부르신 자는 지혜로운 마음을 채워 주어 주의 명령을 알아듣고 준행하게 하신다.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출 31:6).” 우리 안에 주를 향한 갈증을 넣어두신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곧 행함에 있어 그 둘의 갈림, 하나는 모래 위에 하나는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자신의 공적으로는 이룰 게 없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한참을 머물며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오늘의 이 모든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데 대한 확신으로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내가 한다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주가 하게 하셨고, 하게 하시는 일이어야 한다. 그 차이는 엄연하였다. 진짜 주의 자녀가 있고 가짜 주의 자녀도 있다. 하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이런저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어 기어이 찬송이 되게 하는 사람이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여기서 노여움은,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 3:18-22).
당연히 낙심이 된다. 어떤 어려움도 우리에게 예외는 아니다. 일련의 사태에서 똑같이 겪고, 그 고초와 재난은 쑥과 담즙 같이 견딜 수 없이 쓰지만 그래서 낙심도 하나, 이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일.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3).
죽을 것 같이 힘든데 또한 그것으로 주를 바라게 하심이었다. 구원을 얻는 데는 우리의 행함이 아무 소용도 없지만 행함으로 이를 증명하지 못하는 생명은 거짓이다. 생명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은 아잇적엔 꼼지락거리며 움직이고 그 필요를 채우시는 이를 알아간다. 자라면서는 저를 알아보고 그 뜻을 헤아리며 산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그러니 서로 자신이 옳다할 수 없는 것은 믿음으로 보이는 행함으로였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
이를 삶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주의 마음이 필요하다. 주가 채우시는 지혜로 판단해야 한다. 가령 아이가 사는 쪽을 중심으로 새로운 변이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었다. 당분간 퇴근 후에 가던 헬스와 우쿨렐레를 배우러 가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리고 퇴근 후에 와서 같이 먹던 점심도 당분간은 조심하자고 일렀다. 기껏 알아듣게 이야기했는데, 어제 오후께 문자가 와서 내일 점심 때 뵙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멈칫 답을 하기 전에 아이의 상황을 두고 생각하다 그러자고 하며 자연스럽게 나도 그냥 답을 하였다. 때론 답답하고 때론 황당하게 돌아오는 아이의 답변에서 저를 헤아리게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읽힌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믿음의 이중적인 화음을 잘 타고 이를 순종하는 것이 바른 지혜이겠다. 순간 치미는 어떤 답답함, 또는 갈등에 대하여는 주께 돌리고 이를 마음에 둘 때 결국은 찬송이 된다는 말씀 앞에 나는 승복한다. 이것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 안에 심리적인 죄의 요인이 있는데 이는 시기와 분쟁이 그 대표적이고 살인도 불사한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 14:30).” 평온한 마음은 주의 뜻을 이행하는 데서 오고 시기는 사람을 보고 저를 추구할 때에 온다.
어제는 유난히 설교 말씀을 전하며 스스로에게 들려주시는 주의 은혜가 충만하였다. 다들 나름의 이런저런 사연이나 심지어 내가 보고 느끼기에 못마땅한 것들에 대해 한 발 물러서서, 나는 오롯이 전하는 자로 설 때에 주시는 마음이었다. 내가 전하며 내가 먼저 은혜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나를 위해 나로 목사로 세우셨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아니었으면 내가 아는 나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지. 그 꼴은 상상만 해도 알 것 같다. 이에 아침마다 새로운 마음을 더하시는 것도, 이를 글로 쓰고 마음으로 담아 주의 말씀을 따라가게 하시려는 것도 모두가 주가 채우시는 주의 값진 지혜인 것을 이제는 안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제사직을 행할 때에 입는 정교하게 짠 의복 곧 제사장 아론의 성의와 그의 아들들의 옷과 관유와 성소의 향기로운 향이라. 무릇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출 31:3, 10-11).”
결국 이를 행하게 하시고, 할 수 있도록 조성하시고, 하게 하심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시는 이 모든 행함을 두고, 나는 주가 더하신 은혜의 믿음을 실체로 안다. 단지 마음의 현상, 어떤 느낌으로가 아니었다. 실제 내게 일어나는 일로 설교 원고를 준비할 때와 이를 바탕으로 생각할 때에 누구의 일과 어떤 상황을 중첩시켜 주께서 조명하시는 일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 그래서 늘 나에게 들리는 것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내가 보는 것을 말해줄 수만 있다면, 하고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그 가운데 ‘아이의 일’은 늘 어려우면서도 신선하다. 내 의지나 노력으로 안 되는 일에 대해 주께 맡기게 하는 훈련소 같다. 하게 하신 일에 대하여는 할 수 있게도 하시고, 할 수 없는 일을 두고는 씨름도 하고 낙심도 하지만 이를 마음에 두었을 때 주가 이루시는 모든 것을 생각나게도 하신다.
그것으로 내 안의, 우리의 분쟁을 돌아본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와 나 사이에도 분쟁이 있다. 이는 마치 떠도는 섬 같아서,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잠 23:23-24).” 이를 얻기까지 그 값은 엄청나지만 그로 말미암아 즐거움도 크다. 내 안에 두시는 마음에는 나를 인정하게 하심으로 주의 뜻을 더욱 바르고 살펴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시 50:11-13).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뭐가 아쉬운 게 있어 나에게 요구하시고 바라시는 게 있겠나? 이는 모두 나를 위한 일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15).
감사로 할 때, 환난 날에 주를 부를 수 있다. 이게 보니까 알려준다고 알려줘도 알아듣지 못하고 가르친다고 가르쳐도 이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여서, 결국은 그럴 수 있도록 그리하게 하시는 것이 복에 복이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6-17).
나의 어떤 성과가 아니다. 우리의 복음은 번듯한 결과로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땅에서 이루는 어떠한 결과로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는 없다. 이에 바울은 부드러운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과감하게 이를 진술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2-3).
그러면서 우리의 오해는 깨지고 자신의 아집은 무너져서, 결국은 믿음이 자라간다는 일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1).
버릴 줄 안다는 것은 더 좋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8).
이에 따른 모든 진행을 삶으로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의 살아계심을 삶으로 몸소 알아가는 것인데,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돌이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해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이는 생각만으로 깨달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하는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를 준행하는 삶으로 증명된다. 그때에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 아버지는 알고 계셨고 기다리고 계셨다. 이미 다 아시면서도 그리 두시는 까닭은 그 고초와 곤고함이 쑥과 담즙 같다는 것을 알 때에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원리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결국 살아서 삶으로 깨달아야 하는 사람이어서 사는 날 동안이 중요한 것이겠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니,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출 31:13).”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쉼을 위한 것이었다. 그때에 결국 터져 나오는 것이 찬송이었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시 104:33-34).
이 놀라운 말씀 앞에 오늘도 앉히셨다. 하루의 날은 더 연장되어 나로 하여금 주의 일을 수행하고 감당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1).
하는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시려고.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16-17, 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