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기도할 뿐이라

전봉석 2021. 12. 11. 05:21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열 폭 휘장으로 성막을 지었으니 곧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들을 무늬 놓아 짜서 지은 것이라

출 36:8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4

 

 

오늘 성막 짓는 과정은 앞서 26장의 내용이 반복된다. 성막의 골격과 덮개를 만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26장에는 어떻게 만들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는 내용이고, 36장은 이를 준행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주목하게 되는 것이 덮개인데, 그 덮개는 네 가지 실로 짜인다. 먼저는 베실로 하얀 색의 세마포를 상징하고, 청색은 생명의 근원을, 자색은 하늘의 왕권을 홍색은 보혈을 의미한다.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덮개를 겨냥하는데, 속죄의 의미도 ‘덮는다’는 의미이다. 우리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으신다는 의미다. 우리가 죄가 가리어졌다는 의미도 같은 맥락이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곧 우리는 주 앞에 서야 한다.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해야 하는데, 우리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다른 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신다는 것과 이를 또한 변호사처럼 대언자로 대신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는 매우 놀라운 특권이면서 동시에 예외다.

 

이처럼 성막의 덮개는 비바람을 막아주고, 시끄러운 소리를 차단한다는 것이다. 여러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보호하고 참된 안식과 평안을 더한다. 그리고 성막을 지탱하는 기둥은 널판으로 광야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볼품없는 나무이나 무게는 가볍고 내구성은 강한 것으로 천막을 지을 때도 흔히 쓰이는 것이었다. 곧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그러나 그 널판이 네 기둥이 되면서 동시에 벽이 된다.

 

성막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뜻대로 정하시고, 지으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비록 화려하거나 모양도 풍채도 볼품이 없다 해도 이는 곧 생명이고, 영광이고, 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한다. 동시에 우리의 삶에 중심이 된다. 기준이 없으면 오락가락하게 돼 있다. 누구를 기준으로 좌우정렬! 하고 운동장에 모여 설 때 그 기준은 움직일 수 없다. 말씀을 중심으로 한다는 말은 첫째, 그 의미를 묵상하고 되새김으로 나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둘째, 이를 적용하여 어쨌든 그 기준은 ‘먼저’이다. 때론 좌우정렬, 하고 모여 설 때 그 기준 곁에서 가까울 때도 있고, 멀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기준은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누구의 물음에 답이 될까 모르겠으나 나는 요즘 저이로 인해 생각이 많다. 그러나 결론은 기도뿐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4).

 

세상이 그런 것 같다. 누구 하나의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의 샘플 같다. 서로가 다를 게 없는 게 인생이다. 누가 말하기를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하고 말을 열어 자신의 이런저런 예외적인 문제를 들추었다. 나는 저의 말을 듣다 그보다 더 큰 착각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세상 그 누구도 평범한 경우는 없다. ‘어쩌다 어른’이 되는 경우도 없다. 우리 믿는 자의 자각은 우연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6).

 

마치 어쩌다 우연처럼 만나 그릇된 선택으로 이렇게 저렇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모든 여정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일’이다. 이것이 성경의 기준이고, 믿는 자의 모든 판단에 있어 기준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창 1:4).” 그런데 누구를 멀리서 볼 때는 그저 평범하고 멀쩡하고 아무 탈 없이 잘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런 경우는 없다. 잔잔한 물은 고인 물 뿐이고, 고인 물은 곧 썩을 따름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 이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누구도 누구보다 나은 게 있어 덜 하고 더한 경우는 없다.

 

누가 나더러 너는 참 좋아 보인다, 하며 한결 같다느니, 똑같다느니, 늘 일관되다는 말로 표현하던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나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아니까, 내가 나를 쳐 복종하게 하는 우선은 ‘이 시간’을 엄수하는 일이다. 이를 저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 ‘이 아침, 이 새벽 시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나도 나를 아니까. 내가 얼마나 고집불통에 막나가는 위인인가를… 어제도 누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다 예전 일을 떠올리는데, 나의 변한 모습을 보고 그리 말한 것이다. 오죽하니 하나님이 내게 공황을 얹으셨을까? 그게 불안이냐 우울이냐 하는 따위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이유를 나는 이제 인정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시는 말씀이 나의 것이기도 한 것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바울의 진술을 마디 글로 나누어 그 의미를 되새기면 나의 고백이 되기도 한다. 어제는 뜬금없었지만 새벽에 쓴 묵상글을 아침에 교회로 올라가 다시 읽으며 고쳐 쓰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나도 바울처럼 또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데 도무지 그게 안 되니까, 누가 누구더러 뭐라 위로하고 격려하며 뭐라 나무랄 나야말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일 텐데. 나는 목사가 되고 싫든 좋든 누구의 말을 듣는 게 일과 중 하나이다. 갑자기 누가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어떤 이는 집밖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누구는 서러움과 억울함으로 그 마음에 미움과 설움이 가득하고, 그 원망은 부모를 위시하여 가장 가까운 이를 겨누는 총구 같아서… 쏴 버려! 하고 말해줄 수도 없고, 저들 이야기를 듣다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억장이 무너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누가 어쩌고 하면서 이해를 한다는데, 이해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런 거면 나는 예수를 판 가룟인 유다가 가장 이해가 된다. 오죽하니 앞장 서 따르던 선생을 팔아서 죽음에 몰고 스스로 목을 달아 죽었을까? 구약 성경에서는 사울이 나는 제일 안 됐고 이해가 된다. 저처럼 종교적이고 성결하려고 애쓴 이가 어디 있겠나? 전쟁을 앞두고 참다못해 자신이 예배를 드리고, 이방인의 손에 죽느니 같은 선민에게 죽기를 원하다 스스로 자신의 칼에 엎드리기까지 하였으니… 누가 말끝마다 이해는 한다기에 우리의 이해가 죄를 예외로, 구원을 허용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역으로 뭘 그처럼 누구에게 이해받고 존중 받고자 기를 쓰고 사는 것인지! 혹시 사람들이 몰라줄까봐, 또는 누구에게 이해받지 못할까봐, 저는 전전긍긍 사람들과 어울리려 기를 쓴다.

 

듣다듣다 나는 그 수고의 반에 반이라도 하나님께 쏟나? 하고 되물었다. 신랑한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어디 나가 사람들의 시선이나 그 판단에 눈치를 보고 이를 어찌 좀 무마하려 아는 척, 있는 척, 괜찮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하고 굴며 거짓으로 살기를 얼마나 애쓰고 수고하는지. 그런들? 그야 봐야 남이고, 남이란 고작 이해하는 정도일 텐데… 그 이해란 게 얼마나 얄팍하고 조악한 관심인지. 저 또한 그러는 척, 정도이지 뭘 더 할 수 있겠나? 나는 누구의 이런저런 말에 다니엘서의 한 구절을 그 답장으로 보내주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단 9:19).

 

내가 주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다면 이와 같이 주께 고하는 것이 왜 안 될까?

 

주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 얼마나 당당하고 담대하며, 정당하고 온전한 기도인가? 그저 모든 기도란 게 날 위해 빌고 또 구하려다 보니, 원하는 모든 게 안 믿는 자와 다를 없이 세상에서의 안녕과 평안을 위한 것인데… 꼭 그렇다면 그 소원을 이루는 데 있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된다는 소리다. 마치 대선을 앞두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교회에도 갔다가 절간에도 갔다가 어디 참배도 갔다가 하다못해 문화라는 명목으로 춤사위에 맞춰 널뛰듯 온갖 잡신을 다 부르고 다니는 일과 같다. 나는 하도 답답하여 누구에게 물었다. 꼭 하나님이어야 하나? 그런 일 때문이라면 어디 용하다는… 무당이면 또 어떻겠나? 우리의 기도란 그런 게 아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6).

 

이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정말 그런가? 그만큼 갈급하고 절박한가? 그렇다면서 하나님을 찾기는 하나? 애 챙기고 신경 쓰랴, 남편 돌보고 위하랴, 이 사람 저 사람 사교적인 삶을 위해 애쓰는 일에 반에 반이나마 과연 하나님을 찾기는 하나? 조금은 야박하게 들릴 소리였으나 아직 살만한 것이다! 죽겠는데 악, 소리 나고 곡소리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걸 지금 누구 눈치를 보고 혹시나 하고 이해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한단 말인가.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단 9:17).

 

엎드려 죽기 살기로 매달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언제까지 허허실실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위선을 떨고 있는지. 할 소린 아니지만 더 죽어야 한다. 숨이 죽어야 양념도 하고 요리를 할 것 아닌가. 나는 누구와 말하다 저가 나의 이런(?) 규칙적이고 매일 똑같은 일상을 두고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로 ‘좋아 보여요!’ 할 때 나는 저에게 일갈하였다. ‘아니면 살 수가 없으니까!’ 오죽하니 자신이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였다’ 하고,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겠나? 저는 천하의 바울 사도이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시 119:41).

 

아니면 살 수가 없으니까!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17:4-6).

 

사람 붙들고 하소연해봐야 소용없다. 이 사람 저 사람 기웃거리듯 저들과 잘 지내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서 ‘친절한 타인’ 그 이상일 수 없다. 물론 서로의 관계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바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겠으나… 그 모든 기준이 하나님으로, 말씀이고 우리의 기도여야지, 누구의 어떤 조언을 듣고 그리 행하였다고 한들? 세상 그 누구도 나의 구원자는 아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84:2).

 

하여 우리는 주께 주의 이름을 걸고 기도하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단 9:19).

 

감히 누구에게 그리 일러, 저를 주가 세우신 주의 일꾼이 맞다면 주께서 바로 세워주시기를. 아니면 더는 저로 인하여 내가 주를 멀리하는 자리로까지 떨어지지 않기를. 자식이면? 부모면? 그것이 때론 원수보다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주를 바라는 데 있어 늘 걸림이 되고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에 대하여, 하물며 예수께서도 육신을 입으시고 육신의 일을 두고는 기도뿐이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44).

 

내가 뭐라고 누구에게 권하고 그 일을 두고 이러니 저리니 말하겠나! 늘 주의 마음을 달라, 주의 권능으로 함께 하시라, 아뢰고 또 구하는 것은 내가 저보다 못한 위인인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곁에서 지켜보고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누구에게 어제도 문득 했던 말이… 그때를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는 나의 수치고 부끄러움이며 두고두고 주 앞에 속죄함 곧 덮어주심을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시 109:21).

 

오늘 시편의 말씀은 그래서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30-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