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권능의 날에

전봉석 2021. 12. 12. 05:18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는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었더라

출 37:24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등잔대의 등불이 밤낮 매일 성소를 밝힘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하심을 확인한다. 광야 생활 같은, 날마다 전쟁을 치러야 하는 가나안 땅 같은, 약속의 날들을 사는 동안에 우리 생활의 구심점이며 모든 판단을 밝힌다. 네 귀퉁이를 받치는 뿔은 구원의 상징이고,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가지고 일하신다. 관유는 구별된 삶이요, 향품의 배합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우리의 날들이 섞여 드려진다. 속죄판은 은혜의 자리로 우리 죄를 고하고 아룀으로 그 모든 죄와 허물이 덮인다.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법궤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나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의 돌판이 들었다. 북쪽으로는 떡상이 있고, 남쪽으로는 등잔이 있으며 성소의 정면인 휘장 앞으로는 분향단이 있다. 떡상에는 매일 열두 가지의 떡이 올려지고, 이는 열두 지파를 먹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제사장들이 먹는다. 등잔대는 순금을 쳐서 만들었는데 중앙의 한 대에서 일곱 줄기가 뻗어, 감람유로 불을 밝혔다. 7은 완전함을 등불은 진리의 말씀을 뜻한다. 감람유는 성령을 의미한다. 분향단은 성소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는데 우리의 기도가 드려지는 장소다. 이를 네 사람이 어깨에 메고 이동하였다. 법궤와 향단, 떡상도 각각 어깨에 메고 이동하였다.

 

오늘 본문은 하나하나 그 의미가 새롭고 묵상의 깊이를 더한다. 곧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예수의 이름으로다. 그 길과 진리와 생명을 통해서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곧 저는 말씀이시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이 엄청난 진리 앞에서 왜 우리가 말씀으로밖에 살 수 없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하루하루의 날들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듯하나, 그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키가 자라고 몸이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 보기에 사랑스러워진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단 9:17).” 나의 하루가 주의 성소에서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하는 책무를 가졌다. 이를 위하여는 믿음이 필요하고, 믿음으로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자신을 돌아보아 주의 사하심을 구할 수 있는 자리가 성소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시 25:10-12).

 

이런저런 염려와 근심이 있으나 또한 그것으로 자신을 근신하게 한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폭발적인 전염병 감염자들이 늘고 있는 이때에도 안이하고 태평한 삶은 겁도 없다. 누구더러 뭐라 하기에 앞서 나를 돌아보며 주 앞에 온전히 세워가는 것이 중요한 시절이다. 이미 예전부터 말세를 운운하다 보니 모두가 무뎌진 종말의 위협은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이에 말씀을 독려하고 우리를 재촉하는 듯하다.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는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었더라(출 37:24).” 나의 가장 귀한 것으로 이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33:13).

 

이런저런 말로 당부하고 또한 이른다 한들 누구라도 그 안이함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런저런 상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저마다의 사정이 저들로 당면한 현실을 왜곡하게 한다. 설마, 하는 안이함이고 괜찮다고 여기는 태평함이 우리 영혼까지 마비시키는 것 같다. 코로나가 몇 년째 계속 되면서 저마다 교회를 잘 다니던 사람들도 하나둘 교회를 멀리하고 예배를 등하시하면서 감정적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적인 삶으로는 안 믿는 자들과 다를 게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화상으로, 온라인으로 자신이 알아서 예배에 참여한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이겠나? 저마다 하고 싶은 것은 많고, 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는 마당에 한두 번 밀리기 시작하던 예배는 아예 모두 사그라진 등불 같이 심지만 타서 연기를 낸다. 아이나 그 부모나 신앙이 해이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누구를 만나고 누구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에 나는 저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예배다. 묵상으로의 삶이고 이를 계기로 어두워진 자신의 영혼을 밟혔으면 하는 바람으로다. 새로 오겠다는 아이들에게도 이를 전제로 하고 그 가치로 우선한다. 결국 우선과 나중의 문제인데 이것이 혼재된 시간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다. 어떤 문제를 안고 사는 가정을 보면 열에 아홉이 ‘예전에는 다녔는데, 믿었는데’ 하는 따위의 회상으로 오늘의 잃어버린 신앙을 개의치 않는 듯하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2).

 

이를 고백할 줄 모를 때 일련의 사태를 안이하게 여길 뿐이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4-5).

 

당면한 현실을 모호하게 바라보는 한 저이에게 뭐라 한들 들릴 리 없고 보일 리 없다. 우리는 계시, 곧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세계에서 예수를 만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그러므로 내가 임의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손을 떼고 주를 바라본다. 할 때에 주의 약속이 나를 붙드시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곧 상급이 되셨던 것처럼 일련의 사태에서 다들 어떠니 어떠니 해도, 나는 주를 바람이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4-6).

 

서술된 글을 마디글로 나누어 그 분절로 의미화하면 새롭다. 오늘 나의 이 시간은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이다. 누구더러 백날 떠들어봐야 저는 이 시간을 가질 수도 없고, 하려고 하는 의지도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걸 하고 있다는 착시다. 하루 한 번 단 몇 분도 주와 시간을 온전하게 갖지 못하면서, 곧 저들의 삶에 더는 성소가 없는데도 자신들은 믿는다고 여긴다. 시험 때라 한 아이가 토요일에도 와서 공부를 했다. 아내는 아이와 서너 시간을 씨름하고, 곧 저 애들이 방학이 되면 글방으로 올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저들로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은근히 압력을 가하듯 설명하였다.

 

곧 네 명의 아이들이 같이들 온다는데 코로나를 전후해서 다들 그 가정이 교회를 안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부모도 아이들도 모두는 믿는다는 사람들이었는데, 몸이 안 다니니까 마음은 멀어져서 더는 누구도 주일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넌지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듣기만 하였다. 이제는 주께서 보내시는 바, 그 이유가 있음을 안다. 내가 뭘 어쩔 수 있을 것이어서가 아니라 저를 통해 나를, 나를 통해 저를… 우리들로 하여금 이 땅에 왔다 가는 이유를 분명히 알게 하려 하시려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7-10).

 

이를 들을 귀가 있는지, 그 마음에 아직 불씨가 남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글방이 교회가 되고, 선생에서 목사로 나를 옮기신 것은 주의 일의 일선에 세우심이다. 생의 최전방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삶들 가운데서 저들의 잃어버린 신앙에 성령의 기름으로 불씨를 다시 붙일 수 있을지…. 나는 오늘 말씀에서 내내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되새긴다. 하물며 주의 종의 또는 사역자로 세우심을 받은 이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일반인과 다를 게 없어,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 왜 저를 오늘 내게 붙이시는가? 되묻게 된다.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뜻으로.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7).

 

난데없는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때를 같이 한다. 내가 얼마 동안을 어떻게 저와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는 동안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이제 순복할 따름이다. 나의 순종은 묵묵함으로다. 오는 이를 마다하지 않지만 가는 이를 또한 붙들지도 않는다. 이 모두는 주의 권세 아래서다. 나는 아이 일로 그 엄마가 왔으면 하고, 이를 두고 기도하지만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아이로는 가망이 없다. 아이의 문제는 곧 엄마 때문이다. 엄마가 주 앞에 세워지지 않으면 아이는 가망이 없다. 나이가 들고 어쩌다 어떤 일로 살다가 죽을 것인지 알지 못한다. 분명 그 모든 일의 의미를 주가 알게 하실 텐데.

 

아이에 대해 아무리 씨름해도 그 엄마로의 문제다. 이런저런 사정이나 그럴 수 없는, 싫은 마음은 내가 이해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든 안 하든, 오든 안 오든, 그 또한 내가 어쩔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결국은 주가 하시겠으나, 성령으로가 아니면 아무런 대책도 없다. 나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주 앞에 앉는다. 아, 나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듯하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시 119:25, 28).

 

가만히 누구를 생각하다 또 나를 주께 아뢰면서,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49).

 

힘에 부쳐 더는 어쩔 수 없다, 하고 두 손 놓고 있을 때 이처럼 아침마다 주 앞에 앉히시고 나를 일깨우신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그리 되새기게 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110:3).

 

내가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4).

 

이 거룩한 반열에서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심이니,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5-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