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출 38:8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시 111:4-5
하나님은 일을 진행하기에 앞서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셨다. 저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어 금 은 놋으로 정교한 작업을 감당하는 기술을 더하셨다. 부르심이 먼저고 그에 따른 확신은 남다른 은사로 이어진다. 이는 성령의 능력이다. 브살렐의 주도로 번제단을 만들었다. 번제는 산 짐승을 드리는 것으로 그 연기를 냄새로 올리었다. 이는 봉헌과 헌신을 뜻하고 동시에 속량을 의미한다. 드려지는 짐승은 수컷으로 흠 없는 것들로 하였다.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었는데 여인들이 쓰는 거울이 바쳐져서 그 재료로 쓰였다. 매일 수시로 거울을 보듯 물두멍은 우리 삶을 정결하게 하는 의미다.
말씀을 읽고 이를 받는 데는 성령의 감동으로다. 우린 흔히 성경을 두고 어렵다, 하는 말로 거리를 두는데 ‘어렵다’는 ‘싫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주의 말씀으로 나를 세우소서’ 하는 기도가 없으면 허사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시 119:28).
푸시킨의 표현처럼 ‘생활이 우리를 속인다’는 말, 우리 영혼이 이에 눌려 녹을 지경이다. 그러할 때 주의 말씀으로 나를 세우시라는 기도는 매우 유용하다. 누구에게 종종 기도할 시간을 따로 두고 말씀 앞에 자신을 앉히라고 이르곤 하는데, 억지로라도 필요한 훈련이다. 삶이 우리를 짓누르는 가운데 다들 그럴 겨를이 없다. 말씀을 전할 때 누가 종종 말씀을 되새기기보다 이를 위한 예시만 기억하는 경우를 본다. 언제부턴가 나는 약간 의도적으로 예시를 잘 들지 않는다. 어떤 일화를 들면 말씀은 묻히고 저의 경험이 또는 누구의 사례가 주도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흔히 보라고 가리키는 달은 안 보고 그 손가락을 보는 격이다. 기도가 필요한 시기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9-11).
누구를 위한 기도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허물의 사람을 받은 데서 출발한다. 나는 이를 기적과 같이 여겨져서, 오늘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이 종종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내가 아는 나는 이럴 사람이 아니다. 주께서 나의 삶에 그리 깊숙이 개입하기를 원치 않았고, 적당히 거리 두는 정도에서 사람을 대하고 누구를 사귀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종종 내 자신에게도 납득이 안 된다. 내가 왜 저이 때문에 마음이 쓰나, 하고 생각하다 나를 그처럼 신경 쓰고 위하였던 이들이 항상 내 곁에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모두가 저들에게 받은 기도이고 관심의 정도였다. 오늘 시편을 그렇게 읽고 다시 묵상한다.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시 111:4-5).
기적 곧 은혜가 먼저이고 양식이 그 뒤를 잇는다. 경외함이 이를 기억하게 한다. 어떤 일로 마음이 무겁고 누가 생각이 내차 떠나지 않을 때 주께 이를 고하며 맡긴다. 내가 쓰던 놋 거울을 녹여 물두멍을 만든다. 이를 들여다보며 날마다 씻는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함인데, 이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동일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전능자 하나님은 모든 하늘 위의 하늘이신 존재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먼저 구하고 찾는 삶이 우선이다. 여기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0).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하늘에서 그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믿음은 바람의 실상이다.’ 가령 누구를 생각하며 나는 저 아이를 통해 그 엄마를 생각한다. 그저 안타까움으로 그 가정을 쯧쯧, 혀를 찬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를 아이를 위해서도 아이엄마가 주 앞에 자복하고 엎드리고 맡기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 그러기 위해 앞서 이루신 우연 같은 일들이 때로는 기적처럼 여겨진다. 곧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우선하여 바라는 것이 기도의 첫머리고 화두이다. 여기에 우리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1-13).
이는 오늘을 사는 문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할 때 우리가 날마다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일은 그리하여 숭고한 사명이기도 하다. 각자 어떤 일로 어느 자리에 두셨든지, 그 일로 밥벌이를 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는 일은 경이로운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하는 회개의 연속은 물두멍에서의 행위와 같다. 이는 자신의 죄책으로부터 놓여나기 위해서도 남을 용서하는 것이 우선이다. 고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는 것은 주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유용하다. 시험에 들면 악에 빠지기 쉽다. 시험이 죄는 아니지만, 루터의 표현처럼 머리를 맴돌던 새가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하는 것은 죄이다. 곧 이런저런 염려와 근심이 죄는 아니다. 사느라 드는 불평과 원통함이 죄는 아니다. 한데 이를 계속 머물게 하거나 그와 같이 허용될 때, 죄는 곧 몸에 밴 습관처럼 우리 일상을 주도한다.
하여 우리에게는 엄연한 전제가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모든 주도와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주도 아래에 있다. 이를 인정하고 “아멘”으로 받아내는 삶이 곧…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일 5:14-15).
모든 문제의 화근은 믿음으로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보지 못한 것의 증거이고,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되뇌어 묵상할 필요가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바란 것을 이미 얻고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이미 행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말씀으로다.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알면서 정작 그 믿음은 느낌이나 감상에서 자신의 신념이나 아집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어찌 믿는다면서 안 믿는 자와 다를 게 없이 의심하고 또 회의하며 갈등하고 또 다른 대책을 강구하며 살아가는지. 그러는 동안의 우리 삶은 고루하고 막연하여서, 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을 확신하지 못할까? 믿음이 없다는 증거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6).”
이게 그러니까 내 맘 대로 되던가? 안 된다는 걸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 앞에 아뢰는 것일 텐데… 아이 일로 염려하고 자신의 남은 생을 두고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이다. 그러니 나름 죽어라 하고 사는 그 삶이 황량하고 초조하고 척박할 수밖에. 누구를 염두고 두고 이 글을 쓴다. 고스란히 저를 생각하던 마음이 나를 주 앞에 엎드리게 한다. 내가 곧 저이다. 누군들 자신을 자신할 수 있겠나?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1).
오늘도 번제단 앞에 서서 나를 제물로 삼는다. 물두멍에 손을 씻고 나의 죄를 고한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감각을 잃으면 그 안에는 온갖 죄책감으로 눌린다. 오늘의 이런 형편, 나에게 두신 저런 사정을 두고 주 앞에 씨름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다. 자식을 어찌 감당하려고 저러나? 자신은 또 어찌 할 텐가? 곁의 누가 문제고, 어떤 게 문제고… 하는 따위의 푸념은 아무 소용도 없다. 신세한탄이 하루치 밥값도 해결할 수 없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 116:3-4).
주 앞에 엎드리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다. 열심히 모아 온갖 재산을 물려준다 한들?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삶을 바탕으로 유산으로 남겨놓는다 한들? 가만 보면 이 모든 게 헛되었다. 주께 맡기지 못한 모든 것은 스스로 짊어지고 사는 등짐 같다. 허리는 휘고 등골이 빠질 지경인데도, 내려놓는다는 말…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 성령으로밖에 길이 없다. 안 믿는 사람들도 종종 그리 표현하며 누구는 낙향을 하고 누구는 속세를 등지고 산다. 그런들? 거기가 또 속세인 것을 나중에야 안다.
내가 아는 누가 누구를 학창시절부터 사랑하였다. 가정이 있고 자식도 있는 저를 이내 사랑한다고 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행복하고 평안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곧 또 그것이 허무한 생활이 되어 저는 다시 사랑을 찾다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이리 간략하게 남의 말을 옮길 것은 아니지만 우리네 삶이란 게 그처럼 허망할 뿐이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77:2).
나이가 이쯤 들어서일까? 누구의 삶에 자꾸 마음이 쓰여서일까? 나는 자주 주 없이 사는 삶의 허망함에 대하여 생각한다. 저들과 거리를 두고 살면서 정작 본인들은 지금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가끔 통화를 하면 가장 가깝고 친밀하였던 이부터 연신 삶을 두고 욕지기뿐이다. 그러니 저들의 신세한탄이 듣기 싫어서도 자꾸 더 거리를 두게 된다. 듣는 일이 고역인 것은 같은 말이 강도만 다를 뿐 계속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단 9:19).
요즘 자주 묵상하게 되는 구절의 말씀이다. 오늘 말씀을 여기에 이어붙이면, “이것으로 회막 문 기둥 받침과 놋 제단과 놋 그물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으며 뜰 주위의 기둥 받침과 그 휘장 문의 기둥 받침이며 성막의 모든 말뚝과 뜰 주위의 모든 말뚝을 만들었더라(출 39:30-31).” 오늘 우리의 녹아나는 마음이 곧 주께 귀히 쓰임 받는 것일 수 있다는 것,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그 속에 어떤 서러움과 원통함이 없는 인생이 누가 있겠나? 아담 이래로 우리의 삶이란 숙명처럼 그러하여서 이를 가지고 누구는 찬송이 되고 누구는 저주가 된다니!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111:3).
오늘 시편의 말씀을 입안에 오래 머금고 있다. 아,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4).
내가 나의 날을 돌아보며 이러저러하였던 서러움으로 오히려 주께 찬송과 경배를 하게 하심이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9).
고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