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전봉석 2021. 12. 15. 05:17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 40:38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 113:1-3

 

 

우리가 하루를 더 사는 이유는 무얼까? 오늘 말씀을 읽다 엉뚱하게도 이런 의문이 들었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아 창가 쪽 책상에 와 앉았다. 아직 덜 깬 의식은 몽롱하고 몸은 뻣뻣하다. 의자에 곧게 앉아 허리를 편다. 말씀을 읽으며 물을 마신다. 옆에 둔 두유를 한 모금 마시자 입안이 달다. 뱃속 깊은 데까지 흘러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턱을 괴고 다시 집중을 하는데, 모든 문장에 ‘또’라는 부사가 연거푸 되풀이 된 것에 주의한다. 또는 ‘어떤 일이 거듭’, ‘그 밖에 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담는 접속어다. ‘그리고, 그래도, 또다시’를 유의어로 거느린다. 이처럼 사전을 검색하고 다시 그 의미를 되새긴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무얼 위해 사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고, 그것은 곧 거룩을 위한 것이란 데 이르렀다.

 

또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너는 또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그 안을 거룩하게 하라

그 제단이 지극히 거룩하리라

(출 40:9-10).

 

이 일을 행하는 데 있어 또, 또, 하고 거듭되는 행위가 따른다. 한두 번 의식하여 그리 행함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거듭 되풀이 하여 또, 또, 또 하루를 살아내는 일. 이는 주의 성소에서 주와 함께 사는 일이다. 그러할 때,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8).”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보았더라.’ 눈으로 보고 귀고 듣고 사는 삶이 거룩이다. 감히 단언하건대 거룩이란 반복과 연마로 수행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마치 하루하루를 사는 것과 같아서 기분이 어떻든지, 몸이 어떻든지, 상황이나 여건이 어떻든지 또 다시 주어지는 하루는 거침이 없다. 누굴 봐주고 어떤 사정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하루는 또 어김없이 주어지고 산 자는 기어이 살아서 하루를 다 채워야 한다. 이는 잔인하고 가혹하기까지 하다. 예외가 없는 하루는 어찌 됐든지 산 자들의 몫이다. 이처럼 의식이 돌아오면서 동시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불안이 또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작동을 하는지, 나는 조금 더 견디다가 안정제를 삼킨다. 나의 기분이나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처럼 하루는 거침없이 시작을 알린다.

 

그럼에도 또, 또, 하루에 감당해야 하는 몫의 일들을 수행하는 것. ‘우리를 참혹하게 만드는 거나 강하게 만드는 거나 다 똑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돈 주앙의 말이다. 또 하루를 산다는 것을 하는 주의 성소에서 이 모든 일을 수행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연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를 덮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19).” 곧 우리의 삶이란 주의 명령이다. 이 하루는 어떠하든지 수행해야 하는 수고이고, 이 수고에 따라 거룩은 싸여간다.

 

그러는 데 있어 우리의 고질적인 그릇된 태도는 탓이다. ‘~ 때문에’ 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만약 ~했더라면’ 하고 이를 떠넘긴다. 먼저는 처음 사람 아담이 죄로 인해 그리 행한 것으로,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그러자 여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 이와 같은 ‘탓’은 우리 안에 고착되어 오늘에도 여전히 무엇에 대해 남을 탓함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저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다. 그 탓은 예수님 때문이다. 동생 마리아도 같은 말을 한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또, 때문에, 했더라면… 하루 중 내 안에 드는 이와 같은 변명과 핑계와 탓이 얼마나 자주, 무의식적으로 거듭되는지 모른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에, 어떤 상황에, 무엇을 두고 욱, 하고 치미는 감정과 함께 또, 우리는 이를 반복하여 ‘~ 때문에’ 하고 누굴 탓하고, 무엇을 이유로 들어 억울해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남에게 돌리며 ‘~했더라면’ 하고 자신을 두둔하며 빠져보려 한다. 어느 글에 보니 1950년대 이후 매 해마다 정신장애는 늘고 세분화되어 오늘에는 3배 이상이 높아져서 30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니 누굴 탓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은 발뺌을 할 궁리만 하고, 자신을 남다르게 존중하는 것으로 ‘탓’을 기회로 삼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에 설교하였다. 이를 마디글로 끊어서 읽으면 이해가 더 쉬울 듯하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9-10).

 

즉 전과 후가 엄연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다. 어쩌다 주어진 하루를 또, 살아야 하는 우연이 아니다. 그리 하찮은 날이 아니고, 괜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엄연히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가 된 ‘그의 소유’이다. 그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다. 이는 거룩한 존재다. 거룩은 앞서도 묵상하였던 것처럼 거듭 또, 또다시 연마하고 수행하는 과정으로 이루어가는, 내가 곧 왕이요, 제사장이다. 여전히 구약을 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베드로는 이를 위해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냈다고 하였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빛과 어둠은 심리학에서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 내 안의 어둠 곧 내면의 어린 시절을 뜻한다. 누구는 말하길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에 걸린 최면에 빠져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불러내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란 이 놀라운 사명이 곧 오늘 하루에 또 이루어가야 하는 거룩이다.

 

전에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는 베드로 사도의 단호한 설교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긍휼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나는 없다. 내가 어찌 잘 해서 다시 얻게 되는 하루가 아니다. 언제 어떻게 거두어가실지 알 수 없으나, 오늘은 또, 날마다 특별한 날이다. 그리하여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 3:13).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고 기도함은 그런 의미의 것이었다. 어제는 친구 누가 자신의 생일을 알리며 축복기도를 부탁하였다. 멋쩍은 일일 수 있는데 저가 나에게 그와 같은 문자를 하는 까닭은 주를 알기 때문이고, 내가 주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였다. 물론 나는 주의 이름으로 저의 생일을 축복하는 데 있어, 시편 146편 2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였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 146:2).

 

저의 살아온 날을 전해 듣던 날,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찰 정도로 마음이 어려웠다. 소위 말해 기구한 운명이다, 잔인한 세월이다 하는 말이 딱 저에게 맞을 법한, 험한 세월을 살아왔다. 여전히 어떤 문제로 꼬여 송사에 연루되고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그 하루가 고달프기만 하지만 ‘축복기도’를 바라는 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이제 남은 생전에 주를 찬송하고 찬양하는 일로만 채워가기를. 이런저런 ‘탓’을 그치지 않는 이상 그 안의 어둠은 더욱 짙어만 갈뿐 결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게 인생이었다. 누구는 그래서 교회를 떠났다. 사람에게 또는 담임목사로부터 상처를 받은 이유에서다.

 

또 누구는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렸다. 저의 ‘탓’은 하나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해대다 이내 모든 게 다 부질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아니 다신론자가 되어 급기야 모든 게 다 하나님이라고 한다. 심지어 우리가 먹는 한 끼 식사, 입 안 가득 문 흰 쌀밥 한 숟가락에도 영혼이 담겨 있었다고 주절되고 있으니… ‘탓’은 참으로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게 하는 것 같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온갖 말쟁이들의 말, 말, 말 속에는 탓, 탓, 탓만이 득시글거린다. 전 정권을 탓하고, 진영논리에 따른 자신과 다른 생각을 탓하고, 싸잡아 자신의 생각에 호응하지 않는 모두를 ‘모두까기’하듯 탓한다. 하긴 누구는 국민을 개, 돼지로 비유하며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판국이니 그야말로 개판인 세상이다. 때는 바야흐로 말세를 맞이하였고, 이에 수긍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 탓만 일삼는다. 모 교수나 어느 변호사의 말은 저의 SNS에 올라오기 무섭게 받아쓰기하는 '기레기'들로 인해 몸값은 올라가고 마치 저의 말이 정답이기나 한 것처럼 열광하는 미치광이들도 늘고 있다. 그러니 다들 무덤덤하던가 유난히 예민하게 굴던가, 이골이 난 듯 서로를 편가르기 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코딱지만한 나라에서 니편 내편 쟤편 걔편 쪼개고 쪼개 서로가 못 먹게 만드는 파이 같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두고 엄히 말씀하시는 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요 16:7-11).

 

곧 성령이 없으면 우리도 아무 것도 아니다. 스스로 무얼 할 수 없다. 기도도 할 수 없고 누구를 이해하고 위할 수도 없다. 성령이 없는 삶은 자기밖에 없는데 그 자신도 허상이라, 변덕이 죽 끓듯하여 뭐가 실제 자신인지 자신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저 탓, 다 너 때문이다. 너만 아니었으면, 하고 헛소리를 해대는데 정작 그러면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성령으로가 아니면 하나님의 자비도 없고, 이를 누릴 수도, 분별할 수도 없다. 이에,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4).

 

곧 오늘 하루, 이 또 주어진 한 날의 하루가 결코 어쩌다, 마땅히, 그리 되어진 날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날은 엄연히 주께서 값 주고 사신 날이다. 아니면 나는 이미 죽어 마땅하였고, 더는 주의 긍휼하심도 자비도 없는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영원히 후회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0).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그 의미를 묵상하며 주의 뜻을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은총이었다. 나의 몸과 영혼은 연약하여, 잠에서 깨어나 의식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불안도 염려도 어떤 슬픔과 우울도 동시에 일어나면서 나는 이내 정신과에서 가져온 안정제로 하루를 또 시작하는 신세이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으로, 나도 나의 약함을 사랑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그렇게 나는 또 하루를 또, 또, 주시는 날들 동안 또 그렇게 받들며 이 아침에도 말씀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 113:1-3).

 

이것이 나의 남의 생애도 축복이 되고 과업이 되어 누구를 생각하고, 위하고, 저를 위해 중보하다 성령이 인도하셔서 내 곁에 두시면 한 영혼으로 받아, 우리는 함께 거룩을 이루어가는 동행이 된다. 그러할 때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계 3:9).

 

이것이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2:9).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 113:6-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