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

전봉석 2021. 12. 19. 04:56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레 4:13-15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2

 

 

구약에 나타나는 여러 제사들은 오늘을 살며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하고 위대한지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하신 말씀을 음미할 때면 오늘의 나로 주 앞에 사는 일은 복되다. 제사의 종류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것으로 부지중에 저지른 죄를 속죄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께 헌신할 때, 감사와 교제로 드려졌던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달리 속죄제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심을 받고자 자신을 오염으로부터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속건제는 보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내일 그 내용을 다루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이상의 제사를 드릴 때 그 절차는 속죄제나 속건제를 시작으로 번제, 화목제, 소제의 순서로 하였다. 먼저는 죄를 다루고, 다음은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하였으며, 그 뒤 서로의 교제와 사귐이 이어졌다. 후에 서원제와 감사제로 마무리가 된다(주석성경 참고).

 

오늘은 그러니까 드려지는 순서상으로는 우선적인 속죄제를 본문은 다루고 있다.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직분은 오로지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으로서 수송아지를 제물로 잡아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그것의 기름은 다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레 4:16-20).”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참혹하고 잔인하고 번거롭고 번잡스러운 광경이 상상된다.

 

이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단 한 번에 모두 드려졌으며, 단번에 사함을 받음으로 모두 끝난 일이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저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으로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 사명이 귀하고 엄중하다는 것은 날마다 말씀 가운데서 스스로 상기시켜 삼가 남들처럼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한 살림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령 누가 상담사가 될까 한다고 하여 나는 우선 말렸다. 알고자 하여 이해하는 차원으로 학문적인 접근이면 권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사연을 듣는 일이란 단순히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경청의 수준이 아니다. 이에 동조하고 동참하고 심지어는 저보다 더 번잡스럽고 복잡하고 어두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상담이다. 이는 마치 제사장의 역할과 같다. 저의 죄를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고 이를 잡고 피를 내어 제단에 뿌리고, 내장과 똥을 진영 밖으로 가져다 불사르고, 그 모든 뒤처리를 수행하는 일과 같다. 단지 직업군의 하나로 상담사는 나름 앞으로 전망이 있는 직종이다. 이제는 다들 먹고 사는 문제 그 이상으로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를 주의 이름으로 감당하기란 여간 고역이 아닐 거였다. 물론 직업군의 하나로 그저 (물론 단순한 상담은 없다. 애정 없는 들음과 대꾸는 상업적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에는 저가 살아온 모든 생과 생과 생이 서로 아우러져 있는 일이다. 그러니 저의 이야기에는 저의 부모의 이야기와 그 집안의 내력과 저의 유년과 그 깊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그뿐인가? 여전히 그로 인해 파생하는 얽히고설킨 문제들의 문제다. 단지 한 사람의 이야기란 없다. 모든 이야기는 파생된다.

 

물론 직업적으로 이를 다루고 사람과 그 영혼의 영적인 일을 결부시키지 않는다 해도, 별의 별 사람이 온갖 은밀함과 내밀함을 그 속에 지니고 산다. 가끔 난 사람의 속을 생각하면 쓰레기 매립장이 생각난다. 다루어야 하는 이야기가 결코 유쾌하고 즐거운 게 아니다. 그런 소릴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직업군의 하나로 수많은 환자를 돌본다 할 때 일일이 저의 개인사를 다루려는 의사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 저의 상태를 진단하고 추론하여 약을 처방하거나 말을 들어주고 권면을 할 뿐 더는 개입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저들은 매우 냉철하고 냉정하다. 상처는 그저 고장난 물건 같아서 고쳐야 할 대상이지 그로 인한 고통과 그 여파로 파생한 '다른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저들은 일일이 기억할 의무도 없다. 기록된 차트를 보고 서류상의 수치와 지난 번의 처방을 토대로 결정을 내릴 뿐이다. 마치 실험하듯 이렇게 안 되면 저렇게! 이게 아닌가? 싶으면 저것으로! 것도 안 되면 격리 또는 방치.

 

사역자로서의 이 일은 싫든 좋든, 하나님이 우리더러 기도하게 하시려는 첫 번째 의무다. ‘저로 인하여’ 속이 볶이고 마음이 쓰여 때론 위경련이 일기도 할 정도로 신경 쓴다해도 정작 그 당사자는 또한 이를 알지도 못한다. 속된 말로 나만 골탕을 먹는 셈이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지난 주에 저가 하고 간 말로 한 주간 내내 마음이 볶여 주여 주여 하며 혼자 기를 쓰고 씨름했더니, 저는 와서 한다는 소리가 '제가 그랬어요?' 하고 의아해할 때도 있다. 그럴 땐 진짜 '따귀 맞은 영혼' 같다. 뭐 이런 뭣 같은 경우가 다 있나? 하고 쌍욕이 나올 판이다. 한데 다음은 그 일로 주의 뜻을 헤아리고, 그러느라 말씀을 끌어당겨 마치 연구 자료를 찾아 근거 성경구절을 찾듯이 공부하게 된다. 그러니까 일반 상담과 영적으로 한 영혼을 상대하는 일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오늘 특별히 제사장의 직분과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위 상하고, 역겹고, 두렵고, 끔찍하며 더러운 일인가를, 그 무게를 새삼 느끼게도 된다.

 

당사자는 현재 자신의 일을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려운 정도, 고충을 다루며 이를 호소하고 하소연하는 정도, 그렇게 실컷 울고 떠들고 카타르시스에 다소 나르시즘을 느끼듯 개운해 하는? 한데 이를 듣고 저를 위해 기도하며 씨름하고 볶여야 하는 게 사역자의 상담이다. 죄를 가지고 온 이는 그 죄를 고하고 준비한 짐승을 내놓고 물러나면 그만인데, 이를 끌어안고 잡아 피를 내고 뿌리고 쪼개고 내장을 끄집내고 똥을 치우고 해야 하는, 눈물이 또는 화가 나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히 내 감정을 볶아치는 감정이입의 문제가 아니다. 나도 나름 냉정하다. 냉혹하기까지 하다. 누가 어떻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 한데 성령이 나로 하여금 저를 대신하여 자복하고 회개하게도, 저의 일로 씨름하며 주 앞에 애원하게도, 기껏 그렇게 볶여 한 주간이 녹초가 돼서 만났는데 저는 멀쩡한 듯 여전히, 또는 엉뚱한 소릴 할 때!! 아, 이런 된장맞을.

 

그렇다고 이를 가벼이 여겨 그런가보다 하고, 법벌이로 삼으면 이야말로 삯군이다. 하나의 직업군으로써 상담사는 따듯한 사람이지만 차갑고, 정을 가지고 대하나 냉정하다. 우리에게 그 정도의 직분으로 사명을 주신 게 아니다. 그러려면 굳이 왜 사역자가? 교회에서? 뭐하러! 요즘은 오은영이를 비롯해 난다긴다 하는 상담사들이 떼돈을 벌며 아주 냉철하게 또는 놀라운 방안으로 사람들을 잘도 요리하고 회를 떠서 만사 오케이 하듯 척척 답을 제시하는데! 개뿔. 본래 정답은 쉽고 그 과정은 난해하고, 그 과정은 꾸역꾸역 맞춰져도 그 정답이란 게 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가 되는 것이어서, 언제가 나는 말씀 없는 상담? 예수 없는 심리는 아예 관심도 없다. 그런 소린 보살도 한다. 오히려 점쟁이의 간략한 말이 훨씬 개운하다. 한 번 개운하게 똥 싸고 다시 안 싸고 살 수 있는 삶이면 모를까.

 

나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비켜서려고 해도 자꾸 또 그로 인하여 속상하고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느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나를 들들 볶는 것은 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단지 측은지심으로 누굴 대하는 게 아니다. 동정이나 동조 정도의 동참도 아니다. 이는 나의 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일이고, 제자들에게 일러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시며, 굳이 선을 그으신 일이다. 이를 나누자면 그냥 예수 앞으로 몰려온 군중들이 있고, 병 고침이나 배고픔, 서러움을 안고 해결 받고자 하여 찾아온 사람들이 있고, 늘 예수와 함께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이 있고, 예수를 따르는-따라하는, 닮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때의 필연적인 요구는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그러므로 무리에 섞여 있을 것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제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것인가의 문제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팔자려니, 하는 따위의 숙명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자기 삶을 받아들이고 사는 일은 안 믿는 자들도 어쩔 수 없이 운명을 운운하며 그리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굳이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하시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여 따를 것을 강조하셨다. 곧 이는 자기의 팔자소관 같은 이런저런 사연을 떠안고 사는 정도로의 일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이를 바울 사도의 증언으로 다시 되새기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기뻐한다'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과 '몸된 교회를 위하여'가 서로 중첩되는 것 같다. 누구의 어떤 일, 그의 사연을 듣고 이에 조언을 하는 정도가 우리에게 맡기신 상담이 아니다. 실은 나도 여러 번 상담사 자격증을 따려고도 했다. 신대원 때의 상담 이수 과목을 토대로 따로 더 공부를 하고 전공하여 임상심리까지는 너무 멀고 공부가 어려워서 상담심리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몇 번 도전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이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다. 번번이 막으시는 것은 실습이었는데, 전혀 주의 이름으로가 아닌 상담으로 생소한 누군가의 이야기-아픔을 듣는다는 일을 ‘나에게는’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실은 내 안에 앞으로 나름 전망 있는 직업군의 하나로 판단이 되었고, 이는 밥벌이로서도 괜찮겠다고 여겨졌다. 단도직입적으로 하나의 직업군으로 돈 벌 궁리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마음을 접은 것은, 주님은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내가 임의로 누군가를 마주하면 헉, 하고 불안이 또는 공포가 먼저 나를 엄습하였다. 한데 이상할 정도로 계속 주가 두시는 마음으로 누구를 마주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자꾸 저 사람은 신경 쓰인다. 누구 이야기는 흘려듣지 못하고, 그 사연이 계속 내 마음에 고이기도 한다. 고인 마음에서는 악취가 나듯 내가 속이 볶여 살 수가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이를 씻어내려면 저를 마주해야 한다. 저가 어찌 생각하든지, 나로 하여금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그런데 누구의 일에는 듣고 안타깝다가 더는 그게 다다. 다음의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저가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 더 귀한, 친한,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이 일이 바울의 표현처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할 때 '너희'는 그 대상이 내가 임의로 또는 마음 먹는다고 되는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이러는 게 어찌 말이 되나? 싶은데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고 안 하고의 결단의 일도 아니었다. 그냥 자꾸 신경이 쓰이는 누가 있다. 꼴보기 싫을 정도로 지겨운데, 그래서 성가시고 때론 짜증스럽기도 한데, 이상하게 그 일이 또 기쁘다? 그 애가, 저 사람이, 어떤 누구의 일이. 그러니 이를 어찌 설명할 수는 없다. 나도 모르니까. 돈벌이로 하는 일이면 모를까. 결코 남의 일로 여겨지지가 않는 사람이다. 이를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래, 아직 우리에게 남겨두시는 이 땅의 일로 이 일은 돈벌이를 위해서도, 자기만족이나 어떤 보람을 위해서도, 당연히 어떤 명예직으로의 일도 아니었다. 엄연히 그리스도의 일로 우리에게 맡기신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으로서의 사명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하나님의 자녀를 두고 그를 상대하는 일의 구별이었다.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렇게 내 육체에 채우는 일, 그러니까 저의 이야기를 그저 듣고 마는 정도의 가벼움으로가 아닌, 머리로나 가슴으로 정도가 아닌, ‘내 몸의 일’로 시달리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의 범불안증을 끌어안았다. 공황이나 우울이니 폐쇄공포니 불안이니 하는 모든 심리적인 요인들을 두루두루 떠안은 병명으로 정신과 담당의는 내게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고질적인 것’으로 정리했다. 말 그대로 골고루 다 떠안은 것이다.

 

새삼 이런 소릴 길게 하게 된 것은 먼저는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의 직분과 신약에서 제자로서 예수를 따른다는 직분에 대해 묵상하다 연관된 것이다. 하지만 더 솔직한 고백은 어제 갑자기 통화를 하게 된 누구의 일로 내내 마음이 볶였다가 이 모든 게 중첩되어 이 아침의 글쓰기를 이끄신 것 같다. 얼마 전 수 년 만에 연락이 닿은 아이가 있다. 외동딸인 줄 알았다가 언니가 있었던, 언니의 장애를 침묵으로 묻고 살며 ‘어릴 적부터 불안과 우울을 달고 살았던 아이’가 그 내용을 글로 쓰고 말로 토해내면서 좋은 결과를 여러 번 같이 경험하며 울다가 웃다가 하며 수업을 하였던… 그렇게 스쳐갔는가 했던 사이가 전전 해에 카페에 쪽지로 남긴 것을 햇수로 2년이 지나서야 읽고 한 번 문자를 주고 받았던… 하필 또 그 애가 우울증이 와서 집에 처박혔고, 되는 일도 하는 일도 없이 그리 지낸다고 하는….

 

그런 내용을 서로가 안부처럼 주고받고 나는 계속 미루고 있었는가보다. 몇 개월이 흐르고 전혀 상관이 없을 인연으로 두고 싶었는데 하나님은 이를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넣어두셨다. 툭, 하면 찔린다. 일부러 외면하듯 새삼 새로운 관계로 이어지는 것을 두고 나는 저 먼 산을 보는데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전혀 다른 누구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그 애가 툭, 툭, 찌르는 것이다. 어제도 갑자기 혼자 있는 시간에 그 애가 마음에 밟혔다. 심한 궁금증이 안달이 났다. 못살게 굴듯 요즘은 좀 어떤가 하는, 그런 마음에 시달려본 사람은 안다. 이런 마음은 마치 연애하는 사람 같다. 아니면 이별하고 일주일도 안 된 사람 같다. 자꾸 제 못대로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느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오전 열 시가 조금 너머 전화를 했다. 목소리를 듣고 통화를 하기는 정말 몇 년 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다 일어난 목소리였고, 나는 또 (순간) 그 핑계로 끊을까 하는데 아이가 졸린 목소리로도 계속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은 가끔 나를 못 살게 구신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호 5:13).” 저 아이는 자기의 상처를 알고, 그 우울감이 아주 어릴 적부터 있었다는 것을 졸린 목소리로 술술 풀어내다 잠이 깼다. 하루에 세 번, 먹어야 하는 정신과 약도 여섯 가지. 요즘은 어찌 지내는지, 신앙에 대해서는 방어적으로 그러나 일상의 글쓰기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아이는 말을 하였고, 나의 말을 받았다. 그렇게,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일 하신다! 첫 술에 배부를 리 없듯이 더는 치고 들어가지 못하고 이런저런 제안을 하고 통화를 끊었다.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0).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고, 그 일을 나에게 두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교회를 위하여’ 이 십자가를 지게 하신다. 그러니까 우리로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심은 단순히 각자 도생하듯 주어진 자기 삶이나 잘 지고 살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럴 거면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헛것이 된다. 그 십자가에 나의 죄를 못 박고 그의 피로 사함을 받았다면, 그 증거는 나의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 남들과 다를 게 없이 시달리며 사는 팔자소관 같은 일들을 두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돌아오지 아니하는 저, ‘반역한 자매 유다’를 위해 나로 듣게 하시고 같이 ‘내 육체에 채우게 하신다.’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호 7:16).

 

목사로 교사로 집사로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이 그저 교회가 정한 무슨 서열도 아니고, 밥벌이의 군상처럼 들러붙어 자기 필요를 채우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친구의 전화, 이제 믿음의 친구의 전화는 위로다. 서로 문안함은 그 사역을 나누고 기도로 같이 등짐을 짊어지고 주 앞에 엎드리게 한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내 곁으로 밀어두시는 이들이 하나 같이 ‘범불안증’의 궤도 안에 맴돌고 있었다. ‘그거 참…’ 하며 친구와 서로 남의 이야기를 하며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마음에 되새기며 위로와 격려와 축복이 된다는 것은,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오직 주의 말만 듣게 하시려고, 구름으로 가리신 것을 두고는 나중에, 나중에 우리가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니 지금은 오롯이 말씀으로만 붙들려서…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나의 사소함으로가 아니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 62:5).

 

스물다섯, 참으로 꽃다운 나이에 꽃보다 더 아름다운 아이가 우울증으로 고통 중에 있었다. 저의 호소가 주께 들려 오늘의 나로 또 찌르신다. 아이엄마는 한때 믿는 자였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더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고, 이에 둘째 딸까지. 분명 주가 찾고자 하는 '자매 유다'인 것을, 어림잡아도 짐작이 가는. 그런데 고착된 세월이 너무 깊어 마음은 어려운데. 나에게 상담이란 내 의지나 목적으로도 아니고, 뭔가 나의 경험으로나 지식으로도 아니다. 저를 위해 기도함으로 그렇게 말씀이 저에게 전하여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참으로 기이하고 기묘할 따름이어서, 그렇게 나를 세우고 이루어 가시는 주의 맡기심일 것을. 나는 오늘 시편의 이 간소하고 조촐한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짧은 시, 긴 찬송으로 마주한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