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레 6:13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49-50
제단 위에 불이 꺼지지 않음은 우리의 기도가 쉼이 없다는 의미다. 사르고 또 살라 주 앞에서 태워지고 올려지는 사연들은 삶의 질고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와 같은 아룀은 오리려 우리의 먹을거리가 된다. 곧 우리의 새로운 살 길,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0:20).
곧 우리가 들어갈 길은 열려졌다. 그리스도는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그 모든 제사의 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이를 소제로 삼아 저의 살을 먹고 저의 피를 마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두 가지 행실을 제시한다. 하나는 말씀이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49-50).
이처럼 내가 주께 향하여 이 걸음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바라고서부터 그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께 아뢰는 기도다.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47-48).
이 기도는 말씀을 의뢰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지함이니이다
(41-42).
곧 말씀을 의지함으로 주께 구하고 고하는 일, ‘나는 기도할 것이라!’ 하는 결연한 의지로써의 신앙으로밖에는 달리 이 모든 상황을 헤쳐 나갈 수가 없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32:6).
주를 만날 기회, 그 시간을 두지 못하고 사는 삶은 팍팍하다. 저가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그 믿음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주님의 말씀은 황망하기까지 하다. 저마다 믿는다고 믿는 사람들이고, 나름은 주의 일을 하고 산다고 사는 것인데, 그저 자신의 원한-속에 쌓인 문제들만 나열하고 이를 해결 받고자 기를 쓰기만 하니… 그 원한을 풀어주기는 하겠으나 그게 다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곧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과연 그러한가?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믿는다고는 하는데 그 믿음을 어찌 증명할 것인가? 무엇으로 알겠나? 야고보 사도는 일갈하길,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20).” 나는 요즘 누구의 연락을 기다린다. 내가 먼저 연락할 수도 또는 묻고 재촉하여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 전에 참고 또 기다린다. 하나는 주 앞에 나의 마음이 그 소원함이 옳은가? 하는 확신을 구하는 시간이고, 또 하나는 저의 결단이다. 내가 백날 종용하고 뭐라 이른들, 목사의 말은 그저 또 그러는가보다 하는 것일 수 있어서.
사는 게 그저 여기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아무래도 괜찮다. 이래저래 어려우면 간단한 결정들도 많다. 그만 살아도 되고, 그만 봐도 되고, 그만 애써도 되는 일들이다. 그야말로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뭐 그리 여한이 있을까? 한데 말씀은 우리로 영원한 존재인 것을, 누구는 영생을 누구는 영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니. 오늘 나에게 두시는 어떤 어려움 또는 갈등까지도 주를 바라는 데 유용하여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를 알고 붙들고 의뢰하면 할수록 나는 누구와의 인연을 그리 연연할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다 때가 있나니 저와 나를 오늘 나란히 주 앞에 세우시는 이유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만 ‘월요일의 일’을 하였다. 주일 말씀 초안을 잡고, 그에 따른 성경구절을 찾아보고, 그 말씀의 배경을 살핀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해야 할 일을 우선을 둔다. 억지로라도 한다. 아니면 여러 잡생각이 나를 사로잡기 일쑤이고 이 일 저 일 온갖 일들로 휩쓸려버린다. 희한한 정도로 어떤 사연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가장 단적인 공통점은 저의 생활이 얽히고설켜 스스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일을 피하는 지혜 하나, 나의 하루를 최소화하고 간단화하기. 그럼에 툭툭 터지는 변고 앞에서는 그러려니, 놓아두면 저절로 해결되는 게 대부분이다. 이를 시편 76편의 시적 배경에서 읽었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하여 18만 5천 대군이 에워쌌다. 모두가 예루살렘에 갇혀 굶어죽게 생겼다. 한데 이 엄청난 일을 두고 그러려니 하는 것.
솔직히 보면 우리의 신앙이란 여러 어려운 체험, 현실과의 씨름에서 진보하고 성장한다. 그런 의도였을까? 시인은 먼저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시 76:1).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고백은 귀에 익숙하다.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도,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7).
결국 그러기까지 자기 고집과 아집을 꺾지 못하는 것이니, 누구 탓을 하겠나? 그야말로 생긴 대로 사는 것이고, 자기 고집에 겨워 씨름하는 게 팔자소관이다. 별 수 없다. 이를 두고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오늘 우리가 이런저런 시련 당하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우리의 소망은 그 안에서 싹을 띄운다. 곧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한 자리다.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시 76:2).
자신이 다른 곳을 배회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처소를 멀리는 삶을 두고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못한다. 일련의 사태,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그 신앙들은 바닥을 드러낸다. 온 가족이 전멸하듯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 줌이니 유튜브를 동원하여 비대면 예배를 권장하지만 그것도 빈맥과 같아서 ‘죽은 자식 부랄 만지는 꼴이다.’ 평소 저의 신앙과 그 믿음의 정도가 드러난다. 이번에 방학하고 글방에 오고자 하는 아이들 서넛이 있는데 모두가 믿음의 가정으로 심지어 누구는 그 조부모가 목회를 하신다. 그럼에도 그들 부모가 또는 아이들이 교회를 등지고 예배를 멀리한지 몇 년이 되었다. 희한하지? 교회도 안 가고, 기도나 말씀도 소홀히 하고, 드려지는 헌금이나 헌신도 끊긴지 오래인데도 저들은 ‘믿는 사람’으로 자신들을 그리 여긴다. 부모가 그러니 아이들이야 천방지축이라. 어쩌겠나?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인생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7-28).” 흔히 밥은 밥상에서 똥은 똥간에서 먹고 싸듯이 하물며 주를 바라는 데 있어 교회 없이, 말씀 없이, 그 삶이 온전하겠나? 그러니 죽어라 하고 애쓰시고 수고하시라. 각자의 삽질이야 누가 말리겠나만 그 아이들의 인생까지 어쩌려는 것인지? 자신이 앞서 죽을 텐데, 죽고도 책임지실 텐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1).
주의 물으심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러니 대부분이 과거형으로 말한다. 예전에는 다녔고 믿었다고, 그런데 희한한 건 여전히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니! 그래서 나를 이곳에 두심인가? 우리 교회가 주의 사명을 다함인가? 꼭 우리 교회로 오라는 소린 아니다. 다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생각한다는 것,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이를 안다면 내가 헛되이 누굴, 또는 오늘의 여타 상황을 홀로 짊어지고 씨불씨불거리지는 않을 것인데.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스스로를 망각하면 스스로가 짊어져야 한다. 별 수 없는 일이다. 사모가 돼서 돈돈거리며 살아야 하는 인생도 있고,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도 사느라 여념이 없어 세상 종노릇하듯 끌려 다니는 인생으로 살아야 하는 일이라면, 그의 안에 주를 모실 자리가 있기는 하겠나? 그럴 여유나 있겠나? 소파에 늘어져 억지 쉼을 더 바랄 뿐. 그런데 말씀은 우리를 붙들어 세우시는 것이어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증명돼야 한다. 마음만? 말로만?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사는 건 늘 죽지 못해 사는 꼴이면서?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15).
이것이 그 삶을 주도하게 하셔야 한다. 정작 하나님의 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것들이다. 이는 자신이 자신을 그리 망가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방심과 안이함과 뭉그적거리는 우유부단함이 저의 영혼을 병들게 하였다.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셀라)
(시 76:3).
우리 안은 날마다 전쟁이라, 이러한 목사의 권면이 염불처럼 들린다. 팔자 좋은 소리로나 들린다면 저의 영혼은 죽었거나 회생불능의 상태로 상한 것이다. 이에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대하 32:8).” 곧 오늘을 사는 힘은 우리를 도우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이와 함께 한다.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두려운 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내가 구원할 것임이라(사 49:25).”
아, 이와 같은 말씀에서 새 힘을 얻지 못함은 저의 침체된 영혼이 심각한 것인데 것도 스스로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지? 그러려니 하고 말면 누군들 저의 손을 잡을 수 있을지.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억지로라도 기어이 또 하루를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기회이고 축복인가 하는 것을. 오늘이라도 당장 오라 하시면 가야 할 터인데, 그처럼 애지중지하는 아들은? 그 자식은 정말 어쩌려는 것일까? 오늘 시편은 이를 놓고 기도한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시 119:7-8).
곧이어 우리가 우리 자식을 온전히 세울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9-10).
비록 내 삶이 들러붙은 듯 뗄 수가 없다 해도,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25).
고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34).
말씀으로 새 힘을 얻기를. 함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우리의 남은 생이 주를 경외함으로 주께 쓰임이 되기를.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