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이는 각종 나병 환부에 대한 규례니 곧 옴과 의복과 가옥의 나병과 돋는 것과 뾰루지와 색점이 어느 때는 부정하고 어느 때는 정함을 가르치는 것이니 나병의 규례가 이러하니라
레 14:54-57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 126:3
어쩌다 그리 된 것 같으나 우리 삶은 모두 주의 것이다. 주가 다루시고 주관하신다. 아이 적에 아빠 손을 잡고 교회를 처음 나갔는데, 거기는 통일교였다. 그 뒤로 아빠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빠는 집을 나가 새 가정을 꾸렸고 어린 소녀는 가슴을 졸이며 남겨진 엄마와 나이 터울이 나는 동생을 살펴야 했다. 저들에게 늘 ‘착한 아이’여야 했고, 그것으로 저들의 소외된 상처를 돌보는 일이라 여겼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환갑을 넘겨 나이든 지금까지도 여전히 자신에 들어붙은 나병 같다. 그런저런 이야기 중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고 나는 속으로 이게 웬일인가, 하고 하나님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도 이제는 이단인 것을 알면서 그래서도 교회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무려 두 시간 반이 걸려 인천까지 왔다. 나는 설마 또 오겠나싶어 저에게 교회도, 성경도 하나님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말에 저는 헛웃음을 지었다.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 그 열심을 다하는 것이고,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향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사랑으로 이끄시고 이루어 가시는 일이라 말해주었다. 이는 성경에 나타나는 증거대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우리가 이 땅에 나기 전에, 그러니까 집 나간 부친과 버려진 모친 사이에서 ‘착한 아이’로 살아야 했던 날들 그 이전의 일로 이를 어찌 머리로, 지식으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럼 어째서 하나님은 그러한 인생을 살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의 뜻을 아는 일에 있어 우리의 헤아림이 우리의 영화가 된다. 곧 우리가 이 땅에서 나병 같은 죄성으로 살면서 온갖 상황과 사물들이 당달아 오염되었다. “이는 각종 나병 환부에 대한 규례니 곧 옴과 의복과 가옥의 나병과 돋는 것과 뾰루지와 색점이 어느 때는 부정하고 어느 때는 정함을 가르치는 것이니 나병의 규례가 이러하니라(레 14:54-57).”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 단순히 사람의 문제가 사람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닌 것을 알게 한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이것이 돌이켜 보면 자신의 숙명 같고 피치 못할 현실로 인한 거 같으나 모두는 죄 때문이다. 저는 통일교 뿐 아니라, 신천지에서도 성경공부를 했더랬다. 그의 안에 종교심이 많다는 게 어떤 것인가, 알 것 같았다.
하나님이 많이 급하셨군요! 나는 불쑥 그리 말하였다. 저는 뭔 소린가 하는 표정이었다. 나 같이 부족한 사람에게까지 이처럼 몇 다리 걸러 연결하신 걸 보면! 나는 혼잣말처럼 저이에게 말했고, 우리의 우리 됨이 결코 우리의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닌 것을 설명하였다. 저는 글쓰기를 좀 배울까 하고 왔다고 이게 웬 봉변인가 싶다며 실없이 웃다가 울다 하였다. 저는 나의 ‘종교적인 접근’을 경계하였고, 저가 싫든 좋든 나는 목사로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저를 대할 것을 먼저 분명히 하였다. 저는 교회에 지쳐 종교를 배제하고 싶어했고 그럴 거면 굳이 내게 올 것까지 뭐 있겠나? 하고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싫으면 마는 것이고, 내가 한다고 하는 일도 아니고! 설마 다시 또 이 먼 길을 오겠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면 나는 당연히 하나님의 종으로 이 일을 맡아 하는 것이지, 하는 배짱도 생겼다. 스스로는 모르나 그 영혼을 두고 하나님이 서두신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저가 그러든가 말든가, 여기는 교회인 것을 분명히 하였고, 저가 아는 하나님이나 교회는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내가 모르는 일이고, 그러니 알아서 하시라! 하는, 어떤 확신.
분명히 ‘성령이 하시는 성령의 일’인 것을 짐작하였다. 그러니 저가 듣거나 말거나 ‘귀 있는 자’이면 들을 것이라 여겨서, 내 안에 두시는 어떤 확신을 붙들고 나는 저를 대하였다. 나이가 많고 적고, 저가 여태 어디서 뭔 소릴 들으며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든 어쩌든,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이는 다음 주에도 오겠다고 하였고, 나는 것도 이상하다 여기면서 둘 다 숙제를 하나씩 가졌다. 저는 그럼 에베소서를 읽어오고, 나는 통일교나 신천지 등 이단이 왜 이단인지를 알려주겠다고 장담하였다! 내가 뭘 아나? 나야 말로 그러든가 말든가 관심도 없던 것들에 대하여, 그러니 내게도 숙제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들먹이며 적그리스도 짓을 하는지, 저들이 말하는 성경이나 하나님이 왜 우리와 다른지, 곧 사람 중심의 은사주의나 기복주의 따위가 실상은 이단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은 많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도우심은 열심히 바라면서 정작 하나님은 싫은!
저가 물었다. ‘그럼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어찌 압니까?’ 나는 잠깐 생각하다 바보같이도 ‘내가 어찌 알겠나요?’ 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였다. 그 일-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믿음이란 놀란 기적이 우리에게는 선물로 주어진 게 아니겠나? 다 알면 굳이 믿고 말고가 무슨 소용인가?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그런데 성경도 감추시는 게 하나님의 영화이고, 이를 살펴 헤아리는 게 우리의 영화라고 하였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성경의 영웅들, 믿음의 사람들도 알지 못하면서 믿었고, 믿음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약속은 받았는데 실제는 다른 것을 두고도 저들이 의심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가 아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필요로 '하나님의' 무엇이 필요한 것이면 아무렴 어떤가.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말이다. 우리의 믿음이란 어떠하든지 하나님이어서 가능하다. 하나님이시면 된다. 이를 오늘 시인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 126:3).
그런 것이다. 저는 돌아가기 전에 마음이 편하고 기쁘다고 하였고, 나는 그것이 또 희한하여 입을 삐쭉 내밀면서 돌아섰다. 내가 어찌 한 것이면 뿌듯하겠는데, 한 것도 없는데? 그러니 다들 사는 게 참 어이가 없다. 또한 얼마나 고달팠을까? 이를 충당하기 위해 하나님이 필요했지, 정작 하나님 그 자체, 그 분, 오직 하나님만으로는 아니었던 것이다. 저이는 처음 보는 자이에서, 다 좋았다고 하면서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어처구니없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울먹거렸고, 저의 삶 곳곳에서 ‘옴과 의복과 가옥의 나병’이 득시글거렸다는 것을 입으로 실토하였다. 그렇게 ‘돋는 것과 뾰루지와 색점이’ 주름진 삶의 곳곳에 스며 있었다. 그 영혼의 갈급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때는 부정하고 어느 때는 정함을 가르치는 것이’ 나의 일임을 알았다. 나는 좀 나은 삶이었나? 주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으로 이를 전할 수 있을까? ‘이게 뭐지?’ 싶은, 나의 황당함을 주께서도 아신다. 아시면서 부러 그리 보내신다. 저도 저지만 날 위해서도 말이다. 결국은 성령으로다.
성경이 어려워요, 하는 저이의 말에 당연하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인데, 성령의 감동 없이 읽고 배우고 알려고만 하니 어려울밖에. 나는 그럼 쉽겠나? 설마, 그럴리가. 그래서 하나님으로다. 성령이 아니시면 재미도 없고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저이처럼 극성스럽게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저에게 이를 말하자 웃었다. 우린 누구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 바울도 죽을 때까지 자신과 싸웠던 이유다. 저에게 이를 말함은 그동안의 일로 너무 애쓰지 마시라 권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보다 더 크신 사랑이시다. 절망과 낙심은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한다. 설교원고 초안을 뒤적거리며, 나는 저가 돌아가고 다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였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 77:10-11).
저이와의 대화에서 밀리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행하신 '내 삶의 기이함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가 뭐라 말하고 억지를 부리든 나는 이제 아닌 건 아닌 거다. 죄는 죄다. 악은 악이다. 회개가 필요하고 용서를 구하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하지 못하실 죄가 없다. 단 한 시도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이 천하에 엘리야도 실의에 빠져 죽고자하여 엎드렸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왕상 19:4-5).” 하물며 나의 빙충맞은 모습에서야 주가 아니시면 무엇으로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주가 행하신 기이한 일' 중에 나 같은 걸 들어 이처럼 사용하시는 일보다 더 기이한 게 또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엄히 다스리시나 또한 부드럽게 싸매신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그러니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22).” 나는 개인적으로 렘브란트의 유화 <돌아온 탕자>를 좋아한다. 액자로 갖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못 사고, 그림을 스캔해서 프사로 걸어두고 가끔씩 물끄러미 들여다 본다. 자세히 보면 작가의 의도가 참 기묘하다. 돌아온 아들 탕자의 등에 얹힌 아버지의 손이 하나는 아버지의 손이고, 하나는 어머니의 손으로 묘사되어 있다. 저를 둘러 싼 사람들의 시선과 표정, 명암과 그 눈빛, 그리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구석진 뒷 자리에 서 있는 구경꾼 같은 맏아들? 이는 렘브란트의 놀라운 통찰로 의도된 그림이다. 저의 그림 한 장이 우리의 여러 군상과 함께 아버지의 공의와 인자하심을 보여준다. 곧 우리의 노여움으로 우리로 찬송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이 말씀을 무상할 때면 어제 찾아온 저이의 이런저런 사연도 가까운 훗날 반드시 찬송이 될 것을 소망한다. 저는 자기 안에 오래도록 갇혀 있는 종교적인 오해와 불신이 두텁다. 저가 만일 자기 고집으로 나의 전함을 쳐낸다면 하나님이 또한 저를 쳐내실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본디 이단과 여자와 재물에 대한 욕심은 피하는 것이지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게 아니다. 맞서 이길 수 있어! 하는 것은 교만 위의 오만이다. 이를 알기 때문에 저가 자기 신앙을 고수한다면 하나님은 중단하실 것이다. 스스로도 이단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물든 '옴과 나병 같은 의식'으로 인해 '이해와 상식'이 불결하게 되었음을 나는 이제 알려주어야 한다. 때론 단호하게, 거침없이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말씀이 나를 붙드심을 나는 참 큰 복으로 여긴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하실 것을 말이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저의 갈급함으로 주의 이름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는 어찌 보면 같은 묵상의 힘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면 묵상할 여력이 생길 것이다. 무엇으로 이를 강요한들 될 리 없는 것이면 일찌감치 끊어낼 것이고! 앞으로 계속 오겠다는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가 그리 묵상하고 주를 인정하니까, 그야말로 '될 대로 되라' 하는 힘이 생겨난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시 77:12-13).
그러니 나는 오직 작은 소리로 주를 묵상하며 그의 말씀을 읊조리는 것 뿐. 넘쳐나는 신들의 세상이다. 그것이 돈이고 자기애고 자식이고 이상이며 꿈이고 낭만이라 해도, 종교 위에 더 많은 우상을 숭배가 찬을 치는 세상에서, 언제 짬을 내어 묵상의 시간을 낼까? 묵상이 생활이고 하나님께 기도가 일상이어야지,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은 매순간의 일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다른 데 정신 팔려 있는 동안에는 어림없다. 이를 알고자 하여 주 앞에 가만히 또 가만히 묻고 기다리는 시간이 억지로라도 필요하다. 어제는 내내 저의 말을 들으면서 ‘뭐지?’ 하고 놀라, '하나님! 뭐하세요?' 하고 묻고 또 묻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저이를 보내신 거예요?’ 하고 멍하니 저의 말을 듣곤 하였다. 통일교니 부친의 외도와 딴 살림이니, 저의 구구한 사연은 내 알 바 아니다. 인생 들춰보면 별의 별 인간들이 다 있다. 다만,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시 143:5-6).
나의 이런저런 사연이 아니라, 그래서? 이것이 주를 찬송하게 할까? 하는 데 자주 정신을 빠앗겼다. 미처 내가 알지 못하는 때에 하나님이 어찌 행하시고, 나를 어찌 어루만지셨는지, 그러므로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나의 지난 날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곧 주의 오래 참으심이 오늘의 나로, 우리들로 여기에 있게 하셨다. 저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나 같은 이가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도, 곧 우리가 처한 ‘어떤 위기’에서 하나님은 능히 일하시고 계심을 증명하실 것이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시 77:14-15).
이는 저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도 역사하신 것이다. 우리의 일상과 미처 알지 못하고 살아온 모든 시공간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신 것이다. 이단이고 삼단이고 날 뛰고, 적그리스도고 삯군 목사고, 점점 더 날 뛸 판인데,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4-8)."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주를 보라.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시 77:16-19).
하물며,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20).
그래서였을까? 저가 말하길 영혼이 맑아야 할까요? 주를 바로 알려면, 성경을 바로 알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하고 연거푸 되묻는 말에 나의 말은 싱거웠다. 주께서 하시는 대로 두시라. 믿고 맡김으로 의지하시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에 온갖 노력이? 애씀이? 수고가? 불평이 되고 불안이 되어 더욱 미심쩍음으로 주와 멀어질 테니,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12).” 저들도 오죽했겠나? 그 불안과 공포를 어찌 스스로 감당하겠나? 저이가 그토록 갈급함에도 엉뚱한 데를 기웃거리며 살았던 그동안의 헛된 걸음처럼.
그러나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우리가 주를 사랑하고 찾고 발견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주가 먼저시다. 주께서 시작하신 일이다. 나는 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안정제도 꺼내어 먹었다. 저의 말을 듣다 순간 헉, 하고 올라오는 어떤 불안이 숨을 고르게 하지 못했고 나는 망설이다 그것까지도 숨기지 않았다. 이는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나 같은 것까지 들어 사용하시고 귀히 쓰시는 일이었으니, 내가 안 하면 길가의 돌이라도 입을 열어 말하게 하실 것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시 77:19).
어찌 그 길을 알 수 있을까 싶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 17:2-4).” 하나님이 행하시고 하나님이 돌보신다. 나는 저가 언제까지 올지, 뭐가 어찌 될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오늘이라 일컫는 날에 내게 두시는 한 영혼이라, 그리 여길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하나님의 일은 그러해서 나는 사막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흩어져 사라질 뿐이겠으나,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주가 이루시고 행하심에 대하여는 확신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그렇게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나 그런 나를 들어 쓰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내가 뭘 어찌해보려 할 때 이를 또한 막으시고 간섭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내 안에 두시는 것, 어떤 확신, 그 막연함으로 다만 주를 바라고 주가 행하시는 대로 나를 맡기는 것밖에.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 126:2).
곧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어찌 행하시는가, 왜 오늘 우리로 이 자리에 두시는가, 이 일이 어떻게 주의 뜻을 나타내는가,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할 것이다. 우리 혀로는 찬송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시 77:16-19).
알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그리하여 나에게 보이시는 것을 저이에게 들려주고, 내가 들은 것을 저이에게 보여주는 일,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날에 보리라
(왕상 22:25).
우리 하나님이 일하심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126:3).
그리하여 오늘도 무던하여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