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회막 문으로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리지 아니하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 17:9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 129:2
위험한 안심은 무절제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순간이다. 구원과 거룩은 안심할 단계가 아니다. 질서가 있고 규례에 따름은 그래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곧 우리의 안심은 주님 안에서다. 오늘 본문은 거룩에 관한 것이다. 회막에 아닌 데서 짐승을 잡거나 피를 먹는 것을 금하고 있다. 거룩에 대한 규정은 동물을 잡는 일에서부터 옛 풍속을 따르는 일에까지 규정한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레 18:3).” 곧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함부로 내키는 바를 제멋대로 구는 것에 대하여 금한다.
오직 주 안에서, 그 외의 모든 것은 경계해야 한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은 그 목적을 분명히 하셨고,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4-15).” 결국 예수를 말미암아 찬송의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가끔씩 어떤 그리움이 스치고는 하는데 그와 같은 그리움은 어릴 적, 주께서 어떻게 나와 함께 하셨는가를 되돌려 묵상하게도 한다. 오늘 시편은 이를 회상하는데, 결국은 나로 승리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었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 129:2).
친구가 어머니를 모시고 여수 애양원 손양원 목사 기념관에를 갔다. 아마도 연말연시를 맞으며 그러한 시간을 갖은 것 같은데, 덕분에 그곳의 몇 장 사진이 나로 하여금 옛 기억을 더듬으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되새기게 하였다. 그곳에서의 반 년 가까운 생활은 지금도 내 생의 큰 위로다. 이런저런 사실적 기억의 배경은 슬픔뿐이라 해도, 그리하여 그 기억은,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3-4).
오늘 시편의 찬송이 내 것으로 들린다. 곧 우리의 실체는 유형의 어떤 것이 아니라지만 현실 속에 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억으로 하고 있다. 비록 그 날이 나를 어렵게 하고 노엽게 하였을지라도,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그러할 때 그러한 슬픔마저 기쁨이 되게 하셨다.
그 시절, 참 많이 가난하였으나 나의 아버지는 뒤늦게 주의 손에 붙들려서 신학을 하시며 어떠하든지 주만 바라고 사모하는 열정을 품고 계셨다. 곧 여수 애양원 병원에 있는 나를 보러 오실 때도 애양원 교회에서 아가서를 설교하며 하나님의 참 사랑이 어떠하신가를 전파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 앞에 앉은 청중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소외된 나환자들이었고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의 형편들이었다. 저들을 두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가서였고, 서울에서 여수까지 아들 문병을 온 부친은 주의 사랑이 어떠하심을 역설적으로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게 하신 이가 성령이신 것을 이제는 안다. 가끔 저들 무리에 섞여 그와 같은 말씀을 들을 때면 내 신세도 신세지만 저들 처지가 민망하여 그 설교 내용이 여간 신경 쓰이면서 들린 게 아니다. 어린 게 뭘 안다고 그런 생각으로 사람들 눈치를 살피고는 하였다.
그럼에도 저들 사이에서는 ‘사랑의 목사’로 별명이 붙었고, 덕분에 그 아들인 나의 이름까지도 저들 기도 제목에 올라 있었다. 몇 번 기억했던 일인데, 이후 3, 4년쯤 흘렀을까? 아마도 중3이나 고1이 되었을 때 나는 병원 진료를 핑계로 혼자 완행열차를 타고 여행삼아 여수 애양원에 간 적이 있다. 모든 역마다 들르는 완행이라 꼬박 열 시간을 걸려 새벽에나 그곳에 당도하였는데, 그 시간에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혼자 여행이라 무서울 법도 하였는데, 그보다 어떤 이끄심이었을까? 이른 새벽에 애양원 교회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잠시 눈을 좀 붙일 심산이었다. 저만치 앞에서는 예닐곱 명의 소경 장로들이 모여 아침 묵상으로 성경을 돌아가며 암송하였고, 같이 둘러 앉아 기도를 하였다.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누구의 또렷한 목소리로 천성교회 전목사와 그 아들 아무개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게 나의 부친은 물론 내 이름 석 자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내가 거기 들어와 앉은 지, 채 10분은 되었을까?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골에 땀이 찬다.
살며 사랑하며 우리가 느끼는 고립의 순간이 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아 2:7, 3:5).
나 혼자 외롭고 고독하다고 느낄 때,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2).
혼자인데 혼자 아닌, 고립된 느낌인데 고립무원이 결코 아닌 자유의 순간이 그때가 아니었을까? 한참 예민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 그렇게 나름의 방편으로 일상을 떠나 며칠 얻은 혼자만의 시간에서 누군가 날 위해, 내 이름 석 자를 불러가며 매일 아침 기도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 그때의 나는 내 앞에 먼저 교회와 아버지의 이름이 불리지 않고 그를 위한 기도가 없이 내 이름이 불렸다면 순간 잘못 들었을 것이라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한데 한참을 들으며 내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으로도 감동인데 뒤 이어 내 이름이 불리고, 날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 이어질 때의 감동은 소름 그 자체였다.
그러다 나는 교회 장의자에 누워 잠이 들었고, 어슴푸레 날이 밝아와 서둘러 병원으로 가느라 저들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내가 좀 더 어른스러웠더라면 그 기도 자리에 끼어 함께 기도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기는 하였다. 어제 그렇게 친구가 뜬금없이 보낸 사진 몇 장과 내 이야기 중에 그때의 이야기를 떠올라 소식을 전해주어서 새삼 묘한 순간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오후, 자그마치 40여 년 전의 일을 더듬으며 거기 어디에 양계양돈장이 있고, 그 좁은 마을 길 어귀에 소경 장로님과 어느 권사님의 집이 있던 초록색 철재대문이 기억나기도 하고… 그 어느 새벽 날의 기억이 새삼 또 감격스럽기도 하였다. 누군가 날 위해… 그러므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3:13).
그러하기까지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고 기도하며 응원한다고 하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이를 바울은 덧붙여,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 곧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데 따른 대답이 된다.
이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일러 이르시기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 누가 누구를 생각하고 또 그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기도한다는 일은 곧 성령으로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나 가능한 일이었다.
때론 이 평범한 일상의 한 날 같으나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우리는 문득 그와 같이 예수를 만난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결코 지나치지 않았던 체험들이 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 40:28-31).
이 놀라운 삶 가운데의 변화를 알고 경험하고 묵상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복 중의 복이 되었다. 예전에는 그날들이 기억에도 없었고, 떠올리기도 싫은 악몽 같은 고통의 날들이었는데, 이제는 가만히 주의 이름을 되뇌며 찬송하게 하는 단초가 된다니. 전엔 그게 그렇게 부끄럽고 속상하고 한심하고 처량하였던 순간이었는데, 그때의 그 가난이 또는 그 시절의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날 위해 기도하는 주의 천사들이었다니.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살후 1:10).
우연처럼 아니 부스럼처럼 긁으면 긁을수록 가렵고 괴롭기만 하였던 기억이 이제는 주를 찬송하게 하는 나의 찬양의 첫 머리가 될 줄이야! 존 파이퍼의 표현처럼 ‘백조들은 고통 받을 때 아름답게 노래한다.’ 그는 이어 ‘귀뚜라미가 아무리 울어대도 백조는 침묵한다.’고 하였다. 나는 저 두 문장을 메모하고 가끔씩 되새긴다. 백조가 누구일지, 귀뚜라미는 또 누구일지. 돌아보아 누구를 회상하며 저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이는 복되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예전에는 아버지의 가난과 맹목적인 헌신이 그토록 싫고 또 한탄스럽기도 하였는데, 그 가난의 훈장이 주의 나라를 건설하는 현장에서 받은 것이고, 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 백성으로서의 거룩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신한다. 이에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 하나님은 왜 우리의 헌신과 오늘의 기도를 감내하게 하시는가를 알겠다. 곧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 이를 바울의 진술에서 이를 시적으로 읽어보면 더욱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29).
이를 이쯤 해를 거듭하고서야 삶으로 살면서 깨닫고 피부로 느끼며 감사의 영광을 올릴 수 있게 되다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30-31).
아,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으로 아멘, 할 수 있게 되어서 나는 참으로 감사하다. 한 해 마지막 날을 보내며 호들갑스럽게 분주할 것도 없었지만 그처럼 친구의 뜻하지 않은 선물 같은 사진 몇 장으로의 회상과 감사의 영광이라니.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돌아보면 나의 서러웠던 장애가 또는 가난과 멸시와 남을 부러워하며 살았던 모든 수치와 민망함까지도 찬송이 되게 하실 줄이야. 그래서 사도는 이 모든 게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 그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강조하신 거였구나!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4).
이러한 시선으로 오늘 시편을 다시 읽을 때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 129:1-2).
그 고통의 순간이 때론,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3).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4-6).
저들은 나를 이기지 못하였고 이내 나는 굴복당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7-9).
비록 귀뚜라미는 울어대지만 백조는 침묵하였던 것이 그 때문이었겠다. 이는 욥의 고백과 같이 화답하여지는 것이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3,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