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8:3-4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 130:3
말씀을 바라고 이를 섬기는 데 있어, 육체로일까 정신으로일까? ‘손으로 하면 일꾼이고, 정신과 손으로 하면 장인이고, 정신과 손과 마음으로 하면 예술가라고 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우리로서는 정신보다는 몸의 일을 따르며 사는 게 아닐까?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이를 두고 힘겨운 싸움을 되풀이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는 아닐까?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19).
특히 주의 일을 두고 마음과 몸의 싸움은 지독하기만 하여,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이처럼 말씀 앞에서는 육신을 멀리하고 마음이 원하는 바, 말씀으로 더욱 가까이 행해야지 하는데도 정작 몸의 질고로 마음은 금세 허물어지기 일쑤여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1).
이를 두고 괴로워할 줄 아는 게 주의 권능으로였다. 믿는 자로서는 의연하고 여유로울 수 없다. 나는 바울의 절규와 규탄을 사랑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이로써 애통하며 자복하는 심령으로 사는 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
새해 첫 주일 날 아침, 문득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묵상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저의 깊은 묵상을 마음에 되새기게 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무엇으로 의지하며 살까? 마음으로라 하면 그때마다 변덕스러운 것을 알고, 육신으로라 하면 나의 연약한 몸으로는 감당이 안 되고, 정신으로라 하면 나의 공상과 몽상이 앞서는 것을 아는 터라… 나로서는 아무 것으로도 내가 내 의지로 주를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에 12년을 감옥에 갇혀 있던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말하길, ‘고맙다, 감옥아! 내 삶에 찾아와줘서….’ 하였다는 데 그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몸으로도 마음으로 나의 정신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나의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 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였던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결국은 오늘의 현실을 조성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였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 길을 지나는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총을 나의 몸이나 마음으로가 아니라 현실로 알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누구에게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설명할 때 종종 나의 이 변덕스러운 마음도 몸도 아닌 현실의 불가항력적인 일을 간증으로 한다. 가령 97학번으로 다시 신학교로 복학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바닥이었다. 부친은 교회를 건축하느라 모든 재산은 물론 교인들을 탕진하고 있었고, 어쩌다 그 건물 1층으로 들어가서 살림을 살게 된 나는 누구의 표현대로 난파선에 올라탄 것 같은 현실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교인들은 가을 낙엽이 떨어져 날려가듯 속절없이 흩어져갔고, 우리는 덩달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그것도 통신으로 알게 된 한 분이 그런저런 사정을 알 리 없으면서 틈만 나면 신학을 하시라, 목사가 되시라 졸라대듯 종용하는 게 아닌가? 어느 날인가는 하도 극성이어서 ‘먹고 죽을 돈이 없어서도 못 한다!’ 하고 쏘아 붙인 말인데, 저는 어째서 나의 학비를 대고 간간이 생활비까지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게 희한하고 믿기지 않아 언제까지 하나 싶어, 억하심정으로 학부를 마치고 신대원 한 학기까지 했던 것 같다. 편입을 했던 것이니 2년 반, 5학기의 등록금과 생활자금으로 얼추 3천만 원 이상의 돈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한심하면서도 신비하기만 하다. 그러다 결국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하고 환멸에 못 이겨 그만두겠다고 하였을 때 저는 마치 거짓말처럼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었나 싶게 사라졌다.
그렇게 또 09학번으로 신대원을 하게 될 때는 이른바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이끄신 것인데, 이때도 신대원 3년, 6학기 동안의 등록금이며 생활자금을 일체 하나님이 이런저런 손길로 채우셨다. 그야말로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로 먹이시고 메추라기로 채우셨던 일들이다. 느닷없이 30년 만에 연락이 된 친구가 뜬금없이 등록금을 보내오질 않나, 소위 낚시나 어디 멀리 바람 쐬러 갈 때 동행하였던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누구의 난데없는 손길로, 또는 미국에 있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누가 누구를 통해 듣고 글쎄 일면식도 없이…. 그때마다 나는 ‘고맙다, 감옥아!’ 하고 인사하였던 존 번연의 위트가 그냥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 같다.
젊은 동기 내외가 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 현실적인 돈 문제에서다. 아이 둘을 키우며 당장 이고 지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무게는 실질적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목사님 정말 이 길이 맞을까요? 하고 주저하면서 묻곤 하는데… 결국은 딛고 설 것인가? 요단강이 마르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그러니 나로서는 나의 현실이 말하여주었고 보여주었던 것만 가지고 증거 할밖에.
강하고 담대하라
…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6-9).
누구에게 들려줄 수 있는 나의 말이란 때론 형편없는 것이나 이로써 여호수아는 갈 길를 재촉하였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3:1).” 당시 그 절기로는 요단강이 가장 범람하였을 시기라, 출렁이는 강을 하나님은 그저 딛고 건너라고 하시는데, 우리로서는 그 강을 말려서 마른 땅이 드러나면 이를 확신삼아 건너겠다,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나?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갈등처럼 끝도 없는 씨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5).”
특히 사역의 길이란 ‘믿음이 먼저냐 행함이 먼저냐’의 싸움이 끝이 없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거기까지 이르러 계속 미적거리고 뭉개며 정탐만 하다 허송세월을 보낼 것인가? 나야말로 그 확실한 이끄심에도 불구하고 87학번 때는 말할 것도 없고, 97번에서 불신앙이 일자 훌쩍 다시 1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09학번으로, 이번에는 강제로 쳐서 복종시키신 게 아니었던가? 우리에겐 어쩌면 ‘에라, 모르겠다!’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고맙다, 감옥아!’ 하는 야유 같은 여유가 필요하다.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6).” 이게 그러니까 말처럼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15).” 하필 또 딱 그런 때를 골라서 말이다. 하나님의 때는 때로 우리를 너무 잔인하게 몰아붙이신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고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지쳐 쓰러지기 일보일 때,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5-16).
이러한 기적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 권할 수도 없다. 자랑하여 내세울 수도 없는 일이다. 이름을 잊었는데 어느 사모의 수기집에서 저는 남편 목사를 따라 동남아 어느 나라 선교사로 나갔다. 얼마 후 선교사로 앞장섰던 남편 목사가 풍토병으로 죽었다. 사모는 뒤로 회군하여 고국으로 돌아갈까 하다 주의 뜻을 받들어 그 길을 마저 가는데, 몇 년 뒤 두 아들이 교통사고로 같은 날에 죽었다. 홀연 단신 저이 혼자 남겨져 원주민들과 생활하며 여생을 주의 길로 가는데, 나이 예순을 바라보던 어느 날 납치를 당해 여러 날을 강간과 농락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목숨만은 건졌다. 그때 저이의 고백이란 참으로 기이하여, 그러한 역경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고백하게 된다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후 1:9).
문득 이 아침,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8:3-4).” 하시는 말씀에서 되새기게 되는 나의 날들과 그 현실이 이끄시는 삶의 위대함을 찬송하게 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 130:3).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4).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여 내 몸으로 이끌어 내가 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5-6).
오직 주만 바라보게 하시려고, 내 영혼으로 주의 말씀을 바라보게 하심이었다. 누가 어떤 목회를 하고, 어디서 어떤 성과를 거두고, 하는 따위의 일로 시선을 빼앗길 때마다 주만 바라보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딤후 2:10).” 곧 주의 손에 있는 나의 앞날을 두고,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시 31:15-17).
그리하여 나의 삶을 통하여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려하심이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돌아보면 모든 게 은혜였음을. 저들의 이런저런 고충이 결국은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인 것을. 오직 우리로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라. 하여 오늘 시편은 이를 들려주신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 130:1).
깊은 곳, 차마 누구에게 말할 수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우리로 주께만 아뢰고 고하게 하심으로,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