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전봉석 2022. 1. 5. 05:11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레 21:4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우리는 이제 모두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들이 되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즉 여전히 그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같은 길인데 서로 다른 곳을 향해 가는 것이어서,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시 78:17).

 

곧 가장 불쌍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있는데도 그것을 뭉개고 온전히 붙들지 못하는 경우이다.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진리를 향해 가다 그 길을 멀리한 사람인 경우 저는 누구보다 완고하여진다. 자기 뜻을 위하고 그 소견을 좋게 여기며 나름 하나님을 안다, 믿는다 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께 불성실한 사람이 되어간다. 곧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판단과 기준을 우선하고, 이에 아무런 가책도 돌아봄도 없이 완고해진 경우이다. 이에 예수님은 온유한 자를 찾으신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곧 주신 사명, 그 땅에서 주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일.

 

실제 불신앙은 고질적인 자기 고집이다. 시편 78편을 준비하면서, 그들은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말씀 앞에 찔끔하였다(18). 일용할 양식으로는 족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능욕하기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19).” 곧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빙자하여 의심하고 덧붙여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20).” 하고 거들먹거리듯 전능하신 이를 부추긴다. 우리 생활 가운데 이와 같은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면 있을수록 서러움도 같이 동작을 하는 것이다. 기억이란 참 왜곡되기 쉽고, 덧입혀진 기억은 무엇이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우리의 감정으로는 분간할 수가 없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22).

 

단적으로는 그래서이다. 맡은 바 자신의 책무를 알고 있으면서도 ‘휴식하고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 6:34).” 즉 주신 말씀의 참 의미를 무시한 채 자신의 필요를 구한다. 겉으로는 주의 말씀을 원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3).” 하시는 그 말씀이 목적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름 성경을 알고 자신이 ‘청함을 받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일수록 쉼을 꿈꾸고 낭만을 추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알고는 있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불편한 게 싫은 것이다. 하나님을 외면하지는 않지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삼상 28:15).” 영매를 통해서라도, 죽은 사무엘의 영혼을 끌어올려 하나님의 뜻을 알려 하는 사울의 종교심이 우리 안에는 있다.

 

실상은 자기만족, 자기호응을 위한 것이다. 곧 하나님을 외면하고 싶은 욕구가 대놓고는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을 왜곡 되이 가까이 함으로 변질적인 신앙을 그럴듯하게 종교심으로 갖고 산다. 즉 모두가 말하길, 자기도 믿는다고 하는 소리도 그런 것 같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공의를 행하신다는 사실을 좋아하면서도 꺼려한다(시 78:23-32). 이를 왜곡하는 것은 교묘한 불신앙이다. 열심 있는 안이함이다. 맡은 바 사명을 추구하면서도 미뤄두는 일이다. 즉 스스로 쉼을 얻고자 하는 욕구, 자신이 행한 일에 스스로에게 보상하고자 하는 욕구. 흔히 우리가 영적인 축복만을 갈구하다보면 이런 왜곡된 편이주의에 빠지게 된다. 한 마디로 자기 좋은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시기를 강요하는 일이다. 이를 신앙이라 여기는 사람들. 예수님 때도 예수님의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했던 사람들처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하실 때, 저들이 바란 떡과 예수님이 주신 떡은 엄연히 달랐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3).” 그러자 저들도 원했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 그런데 원하던 떡이 아니었다. 그때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60).” 하고 꺼려지는가 싶더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 하시는 말씀에서 뭔 소린지 원, 저들은 알려고 하기 보다 '어렵다' 하고, 듣고자 했던 말씀 곧 자신들이 바랐던 떡이 아닌 데서 오는 실망감으로 떠나갔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이게 본질적으로 우리의 신앙의 본색이다. 예수님은 허탈하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67).”

 

즉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부정하고 외면하고 살면 차라리 다행일까? 그럼 들음으로 믿음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텐데, 이미 들었다고 하니, 이에 완고함에 더해져서 '하나님과의 연대감'이 자신을 속여 영혼을 병들게 한다. 가령 내 곁에도 어려서부터 믿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여전히 저들은 교회를 다닌다. 그러면서 세상도 즐긴다. 나더러는 종종 ‘깨어 있는 목회(?)’를 강조한다. 말씀으로 운운하면 ‘고리타분한 목사’로 혀를 찬다. 저가 어울리는 목사들은 파계승들 같다. 해탈의 경지에 이른 목회자들 같다. 민주주의를 위해, 사회의 어두움을 타파하는 데 노력하며 저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애한을 들어주며 함께 즐길 줄 안다. 그야말로 ‘운동하는 종교인’들이다. 저들에겐 모든 게 가하다. 누구는 한 발 더 나아가 종교적 화합을 외친다. 동성애나 성소수자를 위한 운동에 앞장선다. 그런 저들의 열심은 가히 눈물겨울 정도이다. 저들은 주장은 예수께서도 '그런 자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더 좋은 사회를 위해. 이를 부추겨 ‘실천하는 목회자 모임’을 강요한다. 나의 밋밋함은 우유부단함으로 공격당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이는 아예 온 우주가 하나님이다. 저의 사상은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이고 멋지다. 입에 무는 쌀밥 한 숟가락에도 영혼이 깃들었다. 바람의 결에도 낙엽의 멀어지는 소리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깃들었다. 듣다보면 선각자다. 시인이다. 저의 누구는 암자를 짓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도 한다. 이 시대의 세례요한처럼 광야에 혼자 머물면서, 주의 길을 예비한다. 곧 저들의 <하나님과의 연대감>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 진리와는 멀어지고 세상과는 해탈의 길로 통한다. 모든 게 다 영혼이 있다. 개도, 고양이도, 사랑하며 가꾸는 식물에도 신이 깃들었다. 듣다보면 상당히 매력적이다. 영적으로 여겨져 내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모든 신이 하나라는 주장, 하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심으로! 그런데 듣다보면 도로 샤머니즘이다. 예전에 나의 조부는 하나님을 모르고 시골집 곳곳에 귀신 밥을 두었다. 어린 나는 신기하면서도 그것이 무서웠다. 심지어 변소 뒤편 거름더미 앞에도 하얀 티밥 같은 고봉밥에 숟가락이 꽂아두었다.

 

오늘날에도 주의 길을 간다고 하는 이의 의식 가운데 미루고 어물거리며 자기 마음에 확신을 우선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하나님이 마음을 주시길 기다린다는 소린데, 실은 쉼을, 휴식을, 스스로 안주하려는 마음이 우상화한 것이다. 지혜자는 이르기를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잠 13:15).” 곧 우리는 잠시도 가만 있을 수 없는 생명들이다. 안주하여 느긋할 겨를이 없다. 바울과 같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달리다 말고 쉬는 선수는 없다. 그러니 보면 내 곁에도 믿는다고 믿는 이들이 참 많았다. 희한하지? 그땐 참 하나님 믿기가 쉬웠다. 죄다 나름의 신앙으로, 저마다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았다. 이제와 말씀 앞에 비추면 그게 다 나 자신이라 일컫는 우상이었구나, 하는 것이 보인다. 여전히 나의 사랑하는 선생과 친구는 교회를 안 나가면서도 믿는다. 성경 없이도 말씀을 잘 안다. 기도를 하긴 하는데 그렇게 간절할 것까지는 없다. 만사 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니까! 그렇게 저들과 통화하다 보면 내가 좀 이상해진 것 같기도 하고.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히 3:12).

 

설마, 하고 스스로를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다. 자신은 괜찮다고 여기는 이를 향한 소리다. 심지어 살아나신 후에 제자 가운데에도 보이시며 말씀하셨는데,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란 그래서 우리 의지로는 불가능한 모양이다(시 78:18-20). 또한 탐심이 있어 그 안에 낭만을 꿈꾸고 자신이 선호하는 바 취향에 따른 교회 선택과 말씀 이해를 모두 포함한다(23-29). 더러는 하나님이 저의 요구대로 주신다. 이를 응답 받은 것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그런데 저의 영혼은 상대적으로 쇠약해진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시 106:14-15).

 

우리가 구하여 얻었다 하는 것이 모두 복은 아니다.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3).” 그러므로 기도는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나의 필요에 따른 게 아니다. 나의 요구로써가 아니다.

 

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시 78:29-31).

 

진심으로의 기도는 회개로 문을 연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면 심판뿐이다(30-31). 바울은 이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마치 모든 게 순탄한 것처럼,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시는 데 대해 좋아하기만 할 게 아닌 것이다. 우리의 회개에도 진실한 회개가 있고 거짓 회개도 있다. 거짓 회개는,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시 78:36-37).

 

상대적으로 참된 회개는,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38-39).

 

즉 주의 긍휼하심으로 저가 수용하시는 것뿐이다. 우리가 임의로 그 마음을 다한다고 하나 또한 그렇지 못한 자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상대적인 모습으로나 등한히 여겨 무관심하거나 하는 경우들도 흔하다. 즉 이 모두는 깨닫지 못함으로 짐승과 다를 게 없다(40-42). 이를 다시 바울의 설명으로 들어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이것이 우리의 실체다. 결국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이 없이는 성장도 어렵다(시 78:43-53). 남의 간증이나 설교로는 한계가 있다. 감동이나 연대감, 소속감으로는 부족하다.

 

어느 날 예수님은 물으실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7).” 곧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나는 아주 가끔, 오늘 나로 은택을 입은 자라 여기는 까닭은 나 역시 앞서 잠깐 언급하였던 그 친구들이나 선생과 같은 자리에서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내 곁에는 온갖 종교인들이 많았다. 모두가 착했고 성실했으며 나름은 경건하였다. 그 대화가 허투루 오가지 않았고 삶을 꾸려가는 것이 저마다 진지하였다. 나는 저들의 당당함에 종종 주눅이 들 정도여서 가끔은 나 스스로도 태연한 척, 흉내라도 내곤하였던 기억이 난다. 한데 하나님이 화가 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1).”

 

예수님도 한탄 섞인 목소리로 물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이상할 정도로 내 곁의 사람들은 잘 되었고, 나름들 잘 살았다. 기자, 의사, 공무원과 교사도 여럿 있었고 사회적 공익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한 실태를 보게 된 것은 어느 공익단체의 일원이 되어 활동할 때였다. 겉으로 홍보하고 드러내어 행사하는 일들과 달리 그 안에는 ‘눈 먼 돈’이 돌아다녔고, 이권다툼으로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럼에도 서로가 유대관계를 잃지 않았던 것은 서로의 비리를 서로가 붙들고 있었다. 나는 어느 쪽도 아니면서 모두의 필요로 들어갔다가 두 해를 견디는 동안 영혼은 황폐해져 결국 하나님이 강제로 끄집어내셨다. 어쩌면 그때였을까? 어떤 환멸과 거짓됨으로 여러 번 도망치듯 혼자 그렇게 낚시를 다녔다. 그때도 나는 교회를 다녔고, 내 곁에 믿는다는 친구들이 여럿이었으나 모두가 적당한 유대감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믿었다.

 

결국 우리의 순탄한 삶이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였다(시 78:54-64). 나는 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어쩌면 그 단체에서 반년만 더 있었다면 나 역시 무슨 횡령과 배임으로 같이 엮여 옥살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와 생각하니 극적으로 저들 양쪽으로부터 버림을 당했고, 쫓겨나듯 밀려나고 난 뒤 한두 해 만에 같이 앞장 섰던 사람들이 줄줄이 잡혀갔다. 희한하게도 성경은 일러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아니면 죄는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한다. 우리의 성실함이란 하나님과 그 마음이 합한 자로 사는 것이다(시 78:65-72). 예수님은 가르치시기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작고 보잘것없는,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듯한 일이란 하나님 앞에 없다. 그러므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우리 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쉬고자 하는 욕구, 혼자 알아서 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실은 주가 나의 생수이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분명히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하셨음에도, 그 옆에서 따로 삽질을 하는 꼴이니. 어쩌겠나? 가장 불쌍한 인생은 진리를 알되 진리를 따르기를 거절하는 삶이다.

 

그러니 살아야지. 별 수 있나? 맡기라 하시는데 맡기지 못해 짊어지고 사는 짐인 것을. 내려놓으라 하시는데 미덥지가 않아 내려놓을 수가 없어 들고 섰는 것을. 별 수 없다. 살아 봐야 알고, 끝까지 가봐야 하는 길이라면…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호 5:6).

 

아, 이 불쌍한 영혼이여!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사 59:2).

 

이와 같은 말씀을 오늘 말씀으로 다시 되새김질하면,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레 21:4).” 우리 스스로 믿음 안에서 어른으로 자라가야 한다는 것을,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2).” 한데 여전히 사느라 사는 일에 연연하여 모든 고상하고 철학적인 고민 뒤에는 돈이 문제였다. 돈돈거리며 걸신들려 사는 영혼으로 전락하였다. 사역지를 구하는데도 사례가 먼저, 조건이 우선, 처우가 어떠한지를 따지게 되는 이 지독히 현실적인 문제 앞에 발목이 잡힌다. 아….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우리가 서로 같이 믿는 자로서 서로에게 본이 되고, 때론 갈 길을 알 수 없을 때 서로의 격려와 위로로 말씀 앞에 다시 앉을 수 있는…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나는 종종 감당도 못할 줄 알면서도 누가 올지 말지를 두고 주께 고할 때,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의 편에서 생각하려 한다. 솔직히 이번에도 누가 안 온다고 했을 때 실은 얼마나 홀가분하고 감사하던지. 그러나 앞서서는 주의 뜻이면 저를 기다리고 올 것을 대비하며 마음의 각오도 하는 일이어서. 주 앞에 성실함이란 그저 주의 능력만을 믿을 뿐이다. 이를 위하여도 말씀 앞에 앉는 것이다.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신 30: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