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호와이니라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22:33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
거룩을 강조하시는 말씀 앞에서는 언제나 면구스럽다. 나는 어떤가, 하고 돌아보면 무엇으로도 자신할 수가 없다. 특히 어제는 연말정산을 위한 기부금영수증을 만들어주었다. 누구는 상당히 계산적인데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가령 저가 헌금으로 백을 드렸다고 하면 나는 이백을 적어준다. 한때는 이를 정확히 해야 한다고 여겨 일일이 계산기를 쓰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저 후히 흔들어 넘치게 적는다. 이러한 나를 누가 뭐라 한다면 나는 그 이상도 기꺼이 적어줄 수 있다. 주께 드린 것으로 그게 현물로만이 아니라 때로는 식사대접으로 혹은 선물로 마음으로 올려지고 드려지는 것도 포함한다. 이는 낭비하던 종이 주인이 아신다는 말을 듣고 주인의 것으로 후히 대접한 것을 마음에 두고서이다(눅 16장).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주인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방식이 좀 다르다. 이를 알았던 종은,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5-7).” 실제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 상식으로는 오히려 더 혼쭐이 날 것 같은데,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8).” 나는 이 말씀이 이상하지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나의 주인을 알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하긴 그래봐야 작년 한 해에는 여섯 건이 다였다. 곱절 이상으로 기부금금액을 적고 보니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저들의 자발적인 후원과 헌물로 교회 임대료를 내고, 누가 오면 식사를 대접하고,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사고도 모자람이 없다. 그 금액은 모두 세무서에 알려야 하지만 워낙 가난한 재정이라 우리 교회는 그러고도 넉넉하다. 작년 7월부터는 목회자 사례비로 매월 50만원씩도 줄 수 있어, 없는 가운데 넘치는 손길이었다.
오늘 말씀에 이를 허투루 쓰지 말 것에 대하여 “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레 22:32).” 하시는 말씀 앞에서 새삼 다시 마음을 붙들게도 한다. 이를 위해 주가 나를 인도하셨다.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33).” 언제부턴가 돈벌이를 위한 일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려고 하면서, 이번에도 실은 갈등이 좀 있었다. ‘시니어 글쓰기’ 어쩌고 하며 누가 이를 추천하기도 했고, 본인이 그리 했으면 하는 것을 잠시 돈을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내가 스스로 벌이를 생각하게 되면 누구를 대하는 일에 계산이 앞선다. 순수한 마음으로 저 한 영혼을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아내에게 좀 미안하고 가장으로, 장래를 위해서는 나름 걱정이 되긴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눅 9:2-4).” 이를 내게 적용해야 할 말씀으로 읽었다. 여하튼 언제부턴가 나는 이처럼 홀가분하여졌고, 오히려 넉넉하게 후히 더하시는 손길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참 돈 들어가야 할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젊은 사역자들의 경우에는 왜 이 일에 예민하지 않겠나? 내가 그러한 처지였다면 이 길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저들에게 그때마다 채우시고 모자람이 없는 주의 손길을 자부한다.
우리의 위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다. 우리로서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믿고 맡김의 문제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었다. 물욕이니 성욕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자신을 세워가야 하는 일이지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 마치 나는 노인이 되면 누구나 깊은 시선, 관조적인 성찰이 생겨나는 줄 알았다. 또한 어떤 욕구가 줄고 수용의 넓이가 저절로 확대될 줄로 알았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오죽하니 노인이 된 바울의 입에서 스스로 자신을 쳐 복종케 하고, 자신을 날마다 죽는다는 표현을 썼을까? 사람의 욕구는 끝이 없다. 그 야욕과 탐욕은 죽을 때까지 작동을 하는 모양이다.
이를 방지하는 제일 좋은 길은 ‘받은 게 많은 사람’으로 자신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를 더하신 이를 전파하는 데 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그러므로 우리의 심판의 기준은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우리로 오늘 이 길을 가게 하심을 묵상하면 이보다 더 큰 ‘후히 주심’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남은 과업은 하나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14).” 여기서 두 가지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과 온갖 교훈의 풍조, 곧 세상 유혹과 속임수에 의연해져야 한다.
교회 소속 증명서를 떼고 일일이 후원금액과 그 손길을 적어놓으며 생각하기를, 작년 한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는 데 감사하였다. 물론 친구의 지청구처럼 노후대책이니 지상에 자기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사는 것을 생각하면 비루할 수 있겠으나, 이는 우리의 숙명이다. 일찍이 지혜자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내 곁을 가만히 둘러봐도 저들이 어디서 간절함을 잃어버렸나 보면, 적당해지고 난 뒤였다. 건강을 잃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던 친구가 적당히 회복이 되고 살만해지면서 주를 외면하게 되는가 하면, 사명을 갖고 주의 길을 잘 가다 주저하는 경우 저의 걸음이 느려진 것은 사는 게 적당하다고 여기면서부터였다. 적당하다는 것, 또는 평범하다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의외로 이것이 또 우리로 영적인 침체에 들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어떤 일로 다급할 때, 더는 타협의 여지가 없을 때가 감사한 것이다.
누구누구 이름을 놓고 저들을 생각하며 새삼 나의 나 된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오늘의 나로 예전의 나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타락이란 진리를 향해 나아가던 길을 멈추거나 우회하는 일이다. 어제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좀 쉬고자 하는 욕구, 스스로에게 적당한 복상을 주고자 하는 욕구, 이는 노인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사람의 욕망일 것이었다. 그러해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에 감옥에 갇힌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쯤 하고 이루었으면 스스로도 이제 되었다 할 법도 한데, 더욱이 감옥에 갇힌 몸이면서도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우리가 잊어버리지 않고 앞에 있는 것, 푯대를 향해야 하는데 첫째,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다. 둘째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서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복음의 목표를 왜 좀 더 일찍 젊어서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후회로 또는 슬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얼추 노인이 되어 더는 운신의 폭도 적은 마당에 바울은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은 것이다. 이는 저에게 아주 특별한 체험이기도 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0-11).” 실제 저는 예수 믿고 따르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잡아다 옥에 가두고 죽기까지 붙들려고 했던 이가 아니던가. 그것이 옳다 여겼고, 어려서부터 배우고 의지하였던 율법이었으며, 저가 믿는 교리였다. 그런 그가 저렇게 바뀐 것은 실제의 ‘다메섹 사건’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을 주신 것이니, 저는 직접 겪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행 22:6-8).” 우리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다메섹이 있다. 누구는 실제적인 삶에서 그 충격을 받기도 하고 누구는 특별한 경험이 없었으나 실제의 마음이 고뇌의 늪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그리스도인은 없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어떠하든 저 둘의 공통점은 하나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그러니 스스로에게 잘하였다 하고 상을 주려하는, 오늘 날 풍토는 가소롭다. 우선순위를 잃어버린 사람은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지 못한다. 누구는 이를 ‘딸꾹질하는 인생’이라 하였다. 저 혼자 거듭되는 딸꾹질과 같이 멈추지 않는 잡념으로 시달리는 게 사명을 다하는 일보다 수월하다고 여기면 더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새 힘을 얻지 못하면 빌빌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주어진 사명에 소홀하다는 것보다 비극은 없다. 받은 게 많으면서 받은 줄 알지 못하고 사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이런 자들은 먹을 것이 있어도 굶주리고, 쉴 곳이 있어도 쉼을 얻지 못하는 강박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이 또한 이제야 나는 알 것 같다. 같이 신대원을 공부한 동기들로 나보다는 열대여섯 살 어린 나의 목회자들에게, 나는 염치 불구하고 나의 어리석었던 날들을 본받지 않기를 부탁하곤 한다. 어떻게든 내가 좀 해보려고 했던 날들에 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그때에는 왜 들리지 않았을까? 나는 이제 그러면 그럴수록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시는 말씀이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이제 마흔이 되는 어느 목사에게 나는 저의 지난날들이 어떠하든지 앞으로 주가 하실 일이 참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보면 다들 너무 애쓴다. 주께 맡기고 가면 될 일인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젊으니까 염려도 많은가….
실은 몇 가지 기도제목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아픈 아이’의 엄마와 올해에는 친밀하게 되기를. 다른 하나는 ‘동기 목사 내외가 같이 오기’를. 그리고 하나는 역시 동기 사역자의 가는 길이 주저하지 않기를. 하여 오늘은 목사 내외가 아이와 같이 오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럼 사모는 아이와 잠시 자리를 피하고, 나는 그럼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해야 할까? 돌려서 해야 할까? 기다리듯 나중에 해야 할까? 혼자 생각이 많아 주께 묻고 또 묻기만 하였다. 과연 같이 올까? 하는 마음부터…. 또 하나는 ‘아이엄마’와 좀 더 친밀해져 ‘아이 일’로라도 그들 영혼이 주를 더욱 바라기를 두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로 옮길까 한다고, 거기 친구가 있는데 어쩌고 하는 소식을 듣고 괜히 나는 혼자 시무룩해졌었다. 내게 맡기실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가도 ‘아이의 되풀이 되는 문제’ 더는 뭐라 한들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은 일들에 대해 회의감이 들면서 뭘 어찌 해야 하는지. 동기 사역자 내외의 우유부단함에 대하여는 내가 자꾸 참견할 일은 아닌 것 같고.
그러니 그럼 마음을 두지 마시던가. 나 혼자 괜히 저런 일로 시달린다. 어떨 땐 홧김에라도 내가 널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기는 아나? 하고 공연히 성질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저들은 내가 그러는지 마는지, 그런든가 말든가 관심도 없을 일을 두고 나 혼자 뭘 하고 있나싶어질 땐 허허롭기도 하다. 한데 이게 나의 일이라니! 이 녀석은 기껏 가까이 다가오다 보이스피싱 한 방에 그대로 나자빠졌는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누구에겐 언질을 주고 마음을 전하였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 누군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해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이럴 때, 나는 종종 심각하게 고민한다. 생각하기를 멈추어야 할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더는 관심을 거두어야 할까? 그런데 그게, 이상하지만 그게 그렇게 안 된다. 어제도 누구 일로 집에 들어와서 옷도 안 갈아입고 가만히 넋을 놓고 앉아있으려니까 아내가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채근하여서 간신히 몸을 움직였다. 그럴 때면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은가? 하고 시무룩해지기도 한다.
모르겠다, 내가 하는 일이란 게 고작 이런 게 다여서… 주 앞에 송구할 따름이지만 주님이 알아서 하셔야지 어쩌겠나? 왜 아이엄마가 다른 교회로 간다는 소리에 암담함이 들었을까? 그리곤 녀석의 평소보다 다른 문자들에 아니나 다를까, 월급 탔다고 얼마짜리 옷을 얼마나 샀다며 양해를 구하는 전화통화에 나도 그만 퉁명스럽게, 잘했어! 그렇지 뭐!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게 참 병적이라, 어디 저 아이만 그렇겠나만… 똑같은 이야기가 허공을 맴돌 뿐이다. 하나마나 한 일인 것만 같아, 대체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애매할 때도 있다. 이게 맞나? 싶고. 이 길이 아닌가? 싶고. 그러니 나는 자꾸 주 앞에서 시무룩하다. 주께서 하시려는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일부러 그러시는가 싶다. 그래서 나로 생각하게 하고, 나의 사소한 생각들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려고. 그러니 이제 아이를 더는 기대하지 말까? 저 목사 내외가 동기 사역자들이 그러든가 말든가 더는 마음 쓰지 말까? 하긴 내가 마음 쓴다고 될 일도 아닐 테고.
시무룩하니 일찍 잠이 들고 평소보다 한 시간은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말씀 앞에 앉았는데,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시 134:1-3).
오늘 시편이 말을 건네신다.
보라 밤에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 거듭되는 밤의 연속에서 인생의 고단함을 느낀다. 더는 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내가 주 앞에 서 있는 주의 종인 게 맞다면,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럴 상황이 아닌데, 밤인데, 어두울 따름인데,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어쩌니 저쩌니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나의 손을 들고 성소를 향하여, 즉 주만 바라보며
여호와를 송축하라
찬송이 나올 상황이 아닌데, 그걸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런 소리로 마음을 또 흔드시는 것일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아, 내게 더하실 복이 있었다. 바울도 감옥에 앉아서도 노인인데도 여전히 자신은 달려가노라 했던, 그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도… 저는 누구신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시다. 아이엄마도 아이도, 어느 가정의 목사 내외도 그 아이도, 미적거리든 뭉개고 있든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저이에게도, 여호와이시다. 저는 하나님,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다. 저가 내게 복을 내리시려 오늘의 이 밤도 허락하신 것이다(시 134:1-3). 이를 바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구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아, 이제 알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15).”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고 산다는 일은 무모한 것 같으나,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부름의 상이 기다리고 있다. 이를 위하여도 밤이 깊을수록 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주를 찬송하는 것이다. 복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어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 3:16). 아멘.